묵상을 통해 나에게 말을 걸어온 말씀들을 여기 기록한다. 자잘한 일상의 소품 같은 삶의 부록들을 여기에 챙겨 두려 한다. 시인들에게 시가 말을 걸어온다고 하듯이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때, 그 말씀이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내가 말씀을 읽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나를 읽고, 내가 말씀을 묵상할 때, 그 말씀은 나를 해석한다. 그럴 때 내 삶으로 말씀을 번역하는 과정이 나의 참된 신앙의 본질이 된다. 그 말씀 앞에 나는 한 치의 숨김도 없이 영혼이 노출되고 해부된다.
– 9쪽
5월에는 꽃과 나비와 벌들의 향연이다. 온갖 땅에 기는 것과 하늘에 나는 새들이 제 몫을 다하는 계절이다. 거리에 나서기만 하면 꽃 대궐이다. 연녹색 이파리들이 미풍에 살랑거린다. 완전 녹색이 되기보다 지금의 연녹색은 싱그러움의 대명사다.
어찌 노래하지 않겠는가?
어찌 시를 짓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금은 가만히 있는 것 자체가 죄다.
– 27쪽
나를 아는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나의 경제적 부실과 무책임한 현실의 상황을 곱지 않은 눈총으로 바라본다. 한때 좋은 직장에 근무하면서 그것도 세 번씩이나 학교에 들어갔다 나왔다하면서까지 그 좋은 기회를 마다 하고 굳이 이렇게 어려운 길을 선택했느냐고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염려요 관심이기도 하다.
현실의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겪는 안타까움을 에둘러 표현하는 말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염려와 관심의 저변에는 안타까움을 넘어 무능력한 처지에 놓여 있는 나를 한심하고도 측은히 여기기까지 한다. 부모님의 자식에 대한 지나친 염려 또한 한 몫을 더한다.
그러나 지금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고전 15:10)라는 말씀은 나 자신을 적절히 안위하거나 합리화하는 변증이 아니다. 변변치 않은 나의 과거 교직 생활을 아직까지 무용담으로 삼는 것은 분명 나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은 물론이요 나 자신에 대한 사명과 비전과 기도마저 무력화시키고 하나님의 간섭하심을 부정하는 일과도 같다.
– 116쪽
예루살렘 찾은 동방 박사들은 십자군 영성이요,
베들레헴 아기께 경배함은 십자가 영성이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 시기함은 십자군 영성이요,
“그는 흥하고 나는 쇠하리라” 함은 십자가 영성이다.
베드로가 주님 가는 길 가로막음은 십자군 영성이요,
자기를 부인하라 하심은 십자가 영성이다.
변화산에 장막치자 함은 십자군 영성이요,
산 아래로 내려감은 십자가 영성이다.
사마리아에 불 내리려 함은 십자군 영성이요,
꾸짖고 다른 마을로 감은 십자가 영성이다.
“누가 더 크냐?”는 다툼은 십자군 영성이요,
“어린이가 되라” 하심은 십자가 영성이다.
자기를 높이려 함은 십자군 영성이요,
자기를 낮추는 것은 십자가 영성이다.
작은 자를 무시함은 십자군 영성이요,
작은 자를 돌봄은 십자가 영성이다.
가룟 유다의 배신은 십자군 영성이요,
주님의 끌려가심은 십자가 영성이다.
칼을 빼어 귀를 벤 것은 십자군 영성이요,
12군단 하늘 군대도 포기하심은 십자가 영성이다.
정죄하고 처형함은 십자군 영성이요,
묵묵히 달리심은 십자가 영성이다.
무덤의 봉인도 지키지 못한 십자군 영성,
죽음을 이기고, 무덤 문을 열고, 부활로 승리한 십자가 영성.
우리는 늘 십자가의 길이냐 십자군의 길이냐 선택하며 산다.
– 201-20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