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26∼30쪽, ‘작은 세계에서 더 넓은 세계로’중에서…]
자유로운 춤의 세계로
애통은 우리를 초라하게 한다. 우리가 얼마나 작은 사람인지 냉정하게 일깨워 준다. 그러나 바로 그곳이 춤추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셔서 일어나 첫 스텝을 내딛게 하시는 곳이다. 고통과 가난과 불편함 속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고통을 떠나서가 아니라 바로 그 고통 속에서 우리의 슬픔으로 들어와 우리 손을 부드럽게 잡아 일으켜 세우며 춤을 청하신다.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시편 30:11) 라 고백한 시편 기자처럼 우리도 기도하는 법을 알게 된다. 슬픔의 한복판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춤출 때 우리는 자신의 좁은 자리에 머물러 있을 필요 없이 춤동작으로 그 자리를 뛰어넘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삶의 중심을 자기에게 두지 않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손을 잡고 더 큰 춤의 자리로 들어간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위한 자리를 내 한복판에 확보하는 법을 배운다. 이렇게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있을 때 우리 삶은 한결 부요해진다. 온 세상이 우리의 춤판임을 알게 된다. 우리의 스텝은 한결 흥겨워진다. 하나님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춤추도록 부르셨기 때문이다.
한 친구가 자신이 깨달은 것을 내게 편지로 썼다. 친구는 크리스마스 다음 주를 치매를 앓고 있는 아버지와 함께 보내기로 했다. 어느 날 아침, 그는 아버지가 계신 치료 프로그램 장소로 찾아갔다. 아버지는 내 친구가 태어나기 훨씬 전에 세상을 떠나신 친구의 할머니를 도와 드려야 한다며 걱정하고 계셨다. 그 걱정은 정녕 아버지가 솔직하게 표현할 수 없는 깊은 고뇌를 드러낸 것이었다.
친구는 아버지를 모시고 시골길로 나가 한 시간 이상 드라이브를 했다. 둘 사이에 오가는 말은 거의 없었지만 친구는 아버지가 점점 불안에서 벗어나 진정되는 것을 느꼈다. 한 시간 가까이 말이 없던 아버지가 고개를 돌려 아들을 똑바로 보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랑 이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도 참 오랜만이구나.” 친구는 웃으며 아버지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고뇌는 평안이 되었다. 상실은 수확이 되었다. 둘 사이의 침묵마저도 치유를 품고 있었다. 고난을 통과하는 과정에는 이렇게 뜻밖의 순간이 적잖이 찾아온다. 고민과 기다림 속에 선물로 찾아오는 순간은, 하나님이 고난을 통과하는 길에서 만나게 하시는 사람들과 깊이 관련된 순간이다.
이렇듯 우리는 자신의 작은 자아에서 하나님의 넓은 은혜로 옮겨가는 과정을 단순한 결심이나 혼자 힘으로 겪지 않는다. 자신의 필요 때문에 아무 것이나 절박하게 붙잡고 싶을 때, 치유되지 않은 상처가 주변 분위기를 휘감을 때, 우리는 불안해진다. 그러나 그때 우리는 그 상처를 통해 자신이 치유돼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 깨달음 속에서 춤추며 앞으로 나아갈 때 우리의 스텝을 내딛을 지평이 은혜로 열린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춤추시는 하나님과 연결된다. 모든 것을 품으시는 사랑을, 매일 매순간 우리는 만나 주시는 그 사랑을 받는 법을 배움으로써 우리는 자신의 슬픔과 상실의 경험 너머를 내다보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인내가 필요한 상황에서 참음으로 기다린다. 내가 주실 선물을 눈여겨보며 말이다. 유명한 네덜란드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생기 넘치는 멋진 꽃 그림들을 보라. 그는 고달픈 인생에서 얼마나 깊은 비애와 슬픔과 우울을 맛본 사람인가! 그런데도 그의 그림은 얼마나 아름다우며 환희에 차 있는가! 생명이 충일한 해바라기 그림을 보라. 슬픔이 어디서 끝나고 춤이 어디서 시작되는지 누가 알 수 있겠는가? 우리의 영광은 고통 속에 숨어 있다. 고통을 겪는 가운데 하나님이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도록 기회를 드리기만 한다면 말이다. 상처에 반대하지 않고 하나님께 나아갈 때, 우리는 상처를 변하게 하여 더 큰 선을 이루시도록 그 분께 기회를 드리는 것이며, 우리와 함께 그 선을 발견하도록 다른 사람들을 춤에 초청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