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주일학교가 위기를 맞았다는 염려 섞인 이야기는 이제 식상할 정도로 자주 들려지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점점 별종처럼 달라지고 있고, 이런 달라지는 아이들을 주일학교가 붙잡아주지 않아서 아이들이 자꾸 떠나고 있다고 아우성친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주일학교가 위기를 만났다고 “큰일났다, 큰일났다.” 하면서도 그 ‘큰일난’ 문제를 해결하려는 아무런 몸부림도 잘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는 막막함이 현장에 있는 우리 모두를 공포에 떨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한국교회 주일학교 현장에서 잔뼈가 굵어왔고 지금도 그 현장을 떠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랑의교회 청소년 부서인 고3부에서의 2년간의 사역, 중등부에서의 5년간의 사역, 그리고 작년 말에 시작한 고등부에서의 사역 등 긴 세월을 청소년들과 함께하며 보냈습니다. 지금까지 현장에서 아이들과 함께하면서 제가 경험한 기쁨과 감격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크고 놀라웠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 청소년들과 함께하면서 제가 경험한 아픔과 좌절감 역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바깥 학교나 사회에서 상처받고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피 흘리며 찾아온 많은 학생들, 교회에 오면 자신들의 상처를 헤아려주며 그 상처 치료해줄까 해서 찾아온 그 학생들, 그들을 제대로 품어주고 이해해주지 못했던 지난 시간들은 학생들뿐 아니라 제게도 큰 상처가 되어 남아 있습니다. ‘교회도 별 수 없구나. 우리를 이해해주지 못하고, 품어주지 못하기는 마찬가지구나.’ 하는 원망스런 눈빛을 던지며 떠나가던 그 아이들의 표정을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대안은 정말 없는 것일까요? 낙심하여 떠나는 아이들을 이대로 물끄러미 바라만 봐야 하는 것일까요?
‘무한대(?):주일 한 시간 반’의 싸움
요즘 기업들이 자주 사용하는 용어인 ‘경쟁력’이란 단어를 주일학교에 적용해봅니다. 주일학교는 지금 청소년들을 유혹하는 바깥 세상과 ‘학생 유치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주일학교가 아이들로 하여금 그 많은 유혹을 이겨내고 오늘도 발걸음을 교회를 향해 달려오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주일학교가 아이들로 하여금 “어려운 사춘기 시절에 가장 크게 영향받은 곳은 다름 아닌 주일학교 현장이었다.”라는 고백을 하게 할까 하는 치열한 싸움을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들을 누를 어떤 ‘경쟁력’이 있을까요? 그들을 끌어당길 어떤 ‘흡인력’이 우리에게 있을까요? 불행하게도 우리에겐 골리앗과 같은 ‘세상’을 꺾어 누를 경쟁력이, 강력한 흡인력이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먼저 칠 일 동안의 시간 확보 싸움을 놓고 봐도, 주일학교는 ‘무한대(?) : 주일 한 시간 반’의 열등한 싸움을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공간을 두고 봐도 그렇습니다. 좁고 좁은 콩나물 시루통 같은 분반공부 장소는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답답해져옵니다. 그뿐입니까? 그 좁은 공간 안에 담겨져 있는 시설들을 놓고 따지자면 더욱 마음이 아파옵니다.
7일 동안 세상에서 최첨단 디지털 문화를 경험하던 청소년들이 주일이 되면 타임머신을 타지도 않고 30년 전, 아버지 어머니 세대가 사용하던 낡아빠진 시설물, 그 공간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런 외부적인 요인 외에도 과외다, 학원이다, 대학입시다 하여 너무나 분주한 나머지 주중에 성경 한 줄 읽을 마음의 여유조차 없는 학생들의 내부적인 요인도 큰 문제라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인터넷이다 게임방이다 하는 각종 오락 프로그램과 상상을 초월하는 음란하고 퇴폐적인 타락한 문화들에 온통 마음을 다 빼앗기고 있는 것이 우리 청소년들의 상황입니다.
불행하게도 이런 아이들을 강력한 흡인력으로 교회 안으로 끌어당기게 할 힘이 우리에게 없는 것이 아픈 우리의 현실이라면 과장된 분석일까요? 이것이 우리 주일학교의 정직한 자화상입니다. 아무리 생각하고 생각해봐도 골리앗과 같은 세상과 맞서 싸울 경쟁력 있는 도구가 우리에게 잘 보이지 않습니다. 유혹하는 세상을 향해 멋지게 전쟁을 선포하고 묶여 있던 아이들을 구해올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우리는 무엇을 무기로 경쟁력 있는 싸움을 싸울 것입니까? 청소년들의 몸과 마음을 붙잡아놓을 흡인력있는 비장의 무기는 우리에게 없는 것일까요?
경쟁력 있는 두 가지 강력무기
청소년들과 함께했던 지난 시간들은 바로 이 질문들에 대한 고민의 시간들이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가 없어서 아파하고 울었던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이런 저의 상심의 눈물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지난 7년간의 사랑의교회 청소년 부서 현장에서 ‘경쟁력’ 있는 강력한 두 가지 무기를 발견하게 해주신 것입니다.
이 무기 중 하나는 청소년들에게 ‘예배를 통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주선해주는 일이었고, 또 다른 무기는 그들에게 ‘세상에서 맛보지 못한 진심 어린 사랑’을 베풀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이 두 무기는 너무나 강력해서, 절대적인 시간 확보라는 무기를 갖춘 골리앗, 아이들을 유혹하는 뛰어난 공간과 엄청난 현대 시설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갖춘 골리앗을 단번에 부수고도 남을 ‘경쟁력’ 있는 무기였음을 사역 현장에서 입증했습니다.
첫번째 무기를 만들고 다듬기 위해 지난 7년 동안 예배 안에 드라마를 사용해보기도 했고 영상을 도입해보기도 했습니다. 우리 청소년들이 이 예배를 통해 매 주일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만 있다면 그 어떤 열악한 환경이나 여건도 문제되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지고 일해왔습니다.
사실 그동안 주일학교 현장에서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는 수도 없이 전해졌지만 ‘하나님’ 자체를 만나는 일은 잘 일어나지 않았고, 청소년들이 ‘하나님을 전하는 사람’은 만날 수 있었지만 그들이 전하는 ‘하나님’ 자체와는 인격적 만남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주일학교 지도자들이 고민해야 할 부흥에 관한 결정적인 포인트가 있다면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 그 분을 만날 수 있는 예배를 디자인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이 고민은 청소년 사역을 그만두는 그 순간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무기를 만들기 위해, 청소년들을 진짜 사랑하는 목사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하게 되었습니다. 천성적으로 사랑이 부족한 사람이기에 이 결심은 쉬운 결단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놀라운 것은 조금만 관심을 표현해도 그들은 너무나 고마워했었고, 조그마한 사랑만 베풀어도 그들은 쉬 감격하고 기뻐하였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이런 사랑을 구경하는 일이 바깥 학교나 세상에서는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바깥 세상은 기능은 살아 있지만 관계가 죽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적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일은 있지만 그 사람 자체를 기뻐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일학교 안에서의 이 ‘진심어린 사랑’만이 교회의 경쟁력 있는 무기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왜 이 험악한 세상에 보내셨는지”
최근에, 오래 전에 학생들이 보내준 편지 두 통을 다시 꺼내 읽어보았습니다. 한 아이는 중등부를 졸업하면서 그동안의 힘들었던 중학교 시절을 돌아보는 글을 적어 보내주었고, 또 다른 아이는 이 사회의 모순된 구조나 어른들의 위선을 꼬집으면서, 그렇기 때문에 주일학교나 지도자인 저에 대한 기대감을 표현해주었습니다.
편지 내용 중 일부를 그대로 전할까 합니다.
편지1: “저는 이제 고등부를 향해 떼기 힘든 발걸음을 떼는 3학년
[본문 110-111 “3장 청소년부 부흥은 교사부흥에서”중에서]
교회는 지금
제가 어려서 교회에 다닐 때만 해도 교회는 다양한 문화 활동의 장 이었습니다. 또 활발한 교제의 장이기도 했습니다. 오죽하면 교회당 을 연애당이라고 그랬겠습니까? 교회 안에서 온갖 일들이 치러집니다. 가을이 되면 시와 음악이 있는 밤, 선교의 밤 행사가 있고, 청소년 들은 교회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찬양합니다. 그 당시만 해도 교회의 여름성경학교는 그야말로 동네 잔치였습니다. 아마 다들 이런 향수를 갖고 있을 것입니다. 예전만 해도 교회 행사는 최고 문화의 장이었습 니다.
먹을 것도 궁하고 놀거리도 없던 때에 여름성경학교를 하면 온통 신 기하고 재미있는 것뿐이니 전도하기도 얼마나 쉬웠는지 모릅니다. 믿 는 아이든, 믿지 않는 아이든 그 당시 아이들의 마음속에는 ‘교회란 참문화가 있는 곳이다. 재미 있고 좋은 곳이구나. 이렇게 여러 가지 혜 택을 주는 곳이구나’ 이런 느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 은 교회를 가리켜 문화의 장이라거나 좋은 곳, 재미있는 곳으로 받아 들이는 아이들은 거의 없습니다.
각 교회마다 출석통계를 보면 장탄식이 절로 나오지 않습니까? 초 등학교 저학년 때는 노트 주고, 볼펜 주고, 가방 주고 하면서 막 끌어 모으니까 애들이 제법 모입니다. 그런데 학년이 올라갈수록, 그러니 까 머리가 커갈수록, 볼펜이나 가방 같은 데 욕심을 부리지 않는 때가 되면 아이들은 슬슬 교회를 떠나갑니다.
교회는 점점 피라미드 구조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올라가면서 자꾸 자꾸 줄어듭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세상은 자꾸 변해가고 아 이들의 흥미를 끌어당기는 것들이 끊임없이 개발되고 있는데 유독 교회만 늘 그 자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세상은 얼마나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까? 컴퓨터, 인터넷, 인공위성, 케이블 텔레비전 등 몇 해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들어 보지도 못했던 단어들이 우리에 게 밀려오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이렇게 달 라지지만 어른들은 그다지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유행에 민 감한 우리 아이들은 여기에 지대한 영향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제 세대를 일명 땅따먹기 세대라고 합니다. 아이들과 함께 할 놀이 가 없어서 돌멩이를 가지고 땅따먹는 놀이를 참 열심히 했습니다. 조 금 넉넉해서 종이라도 있는 집 애들이면 딱지 접기를 하고 놀았습니 다. 그렇게 귀한 종이가 화장실에 있을 턱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시대에 교회란 어떤 곳이었습니까? 그야말로 꿈의 동산입니다. 그 당 시 교회라고 하면 상상을 초월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아이들은 컴퓨터 통신을 하면서 노는 아이들입니다. 저는 친구집에 놀러갈 때 딱지 들고 갔습니다만 요새 아이들은 친구집 에 갈 때 디스켓을 갖고 갑니다. 각자 자기에게 없는 프로그램을 서로 주고받으면서 노는 세대입니다. 그러니까 저희들과는 완전히 다른 세대입니다.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아서 껍데기만 똑같지, 닮은 데라고 는 한 군데도 없는 그런 세대입니다. 이런 아이들에 대한 분석 없이 자기 열심만 가지고 열심히 하다보니 선생님은 흥미 있고 열의가 있고 새로울지 몰라도 아이들은 흥미를 잃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1부 이 중고딩을 제게 주소서 Let s take over youth groups
청소년부 교사를 특급 지도자로 만드는 이찬수의 러브 어페어
1장 애정과 관심을 듬뿍 ·23
2장 예배만이 중딩고딩의 마음을 연다·77
3장 청소년부 부흥은 교사부흥에서·109
4장 불붙은 교사가 불씨를 나눈다·139
2부 기교가 아니라 기독교를 가르치라 Instruction with roots
청소년을 뿌리깊은 나무로 만드는 핵심교리 전수법
5장 화이트 유스 화이팅 유스 ·175
6장 인터넷보다 큐티가 재미있다 ·187
7장 세계는 넓고 세계관은 좁다 ·211
3부 교회에도 스타가 필요하다 They need a holy star
‘교회출석만 잘하면 된다’에서 소금과 빛이 되는 차세대 실세로 키우는 비방
8장 야망이 아닌 성결의 꿈·227
9장 비전 빼면 쓰러진다·247
10장 예수님이 슈퍼스타·265
Weight | 1 lbs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