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마치 시속 200킬로 이상의 자동차를 타고 달리는 느낌을 받았다. 도중에 일어나 한 바퀴 걷고 숨을 고른 다음 다시 앉아서 읽고 감탄하고, 다시 일어나 쉬다가 또다시 책을 손에 들고 읽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역시 체스터턴이다!”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말이었다. (서문_강영안, 9쪽)
누군가 체스터턴에게 만일 무인도에 표류하면 무슨 책을 갖고 가고 싶은지를 묻자, 그는 잠시 생각한 뒤에 “물론 배 만들기에 관한 실용적인 안내서지”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 만일 내가 그렇게 표류하게 되어 성경 이외에 한 권을 택할 수 있다면 나는 체스터턴의 영적 자서전인 『정통』을 선택할 것이다. (서문_필립 얀시, 15쪽)
나는 내 나름의 이단을 창설하려고 무척 노력했지만, 거기에 마지막 손질을 가했을 때 그것이 바로 정통신앙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41쪽)
사람은 스스로에 대해 의심을 품되 진리에 대해서는 의심을 품지 말아야 했다. 그런데 이것이 거꾸로 뒤집혔다. 요즈음 사람이 내세우는 부분은 사실 내세우지 말아야 할 부분이다. 바로 그 자신이다. 그가 의심하는 부분은 마땅히 의심해서는 안 될 부분이다. 바로 신적 이성(Divine Reason)이다. (81-82쪽)
나는 인생을 무엇보다 하나의 이야기라고 언제나 생각해 왔었다. 만일 어떤 이야기가 있다면, 당연히 이야기꾼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143쪽)
기독교가 세상에 들어온 것은 무엇보다도 사람은 내면을 들여다볼 뿐 아니라 바깥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경이감과 열정을 품은 채 신적인 동반자와 신적인 우두머리를 바라보아야 한다고 격렬하게 주장하기 위함이었다. 그리스도인이 되면 다음과 같은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사람은 내면의 빛과 함께 홀로 내버려진 존재가 아니라는 것과 해처럼 아름답고 달처럼 청명하며 군기 달린 군대처럼 무서운 저 바깥의 빛을 명백히 인식하는 즐거움이다. (175-176쪽)
이방사상은 대칭으로 균형을 잡아서 똑바로 선 대리석 기둥과 같았다. 기독교는 주춧대를 건드리면 흔들거리면서도 거기서 파생된 것들이 서로 균형을 잡아 주기 때문에 천년 동안 보좌에 놓여 있었던, 울퉁불퉁하고 거대한 낭만적인 바위와 같았다. (222쪽)
만일 그 기둥이 하얀색을 유지하기를 원한다면 페인트칠을 다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말하자면, 당신은 언제나 혁명을 일으켜야 한다는 뜻이다. (254쪽)
우울은 간주곡과 같이 막간에 생기는 일시적인 마음 상태여야 한다. 반면에 찬양은 영구적인 영혼의 맥박이 되어야 한다. 비관주의는 기껏해야 감정적인 반쪽짜리 휴일일 뿐이다. 기쁨은 모든 것을 살아 숨 쉬게 하는 소란한 노동과 같다. (34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