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삶에는 좀처럼 견디기 힘든 불협화음이 많이 일어난다. 이 잡음은 끝내 우리를 미혹해 사익에만 골몰하게 하며, 낯설고 위험에 처한 이웃에게 장벽을 치게 만들기도 한다. 2015년 풀러 신학교가 주최한 강연회에서 월터 브루그만은 다시 한 번 우리를 성경의 말씀 앞으로 불러내 하나님과 이웃의 목소리에 진지하게 귀 기울이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정의와 은혜와 율법이 어떻게 하나가 되는지를 이해시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에 동참하는 그리스도의 제자인 우리의 부르심을 새롭게 했다. 도전을 심어 주고 영감을 불어넣으며 마음을 요동치게 하는 브루그만의 예언자적 선언이 드디어 책을 통해 더 많은 독자들과 만나게 되었다. 그의 선포를 통해 우리는 굳건한 믿음과 신뢰를 바탕으로 하나님의 미쁘신 사랑을 능히 증언하고 이 세상 속에서 신실하게 순종하며 살아갈 준비를 갖추게 될 것이다. 우리가 성령의 권능을 받은 이유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 참여하기 위함이다. 그리하기 위해 이 책은 우리를 새로운 돌봄의 문화로 안내할 것이다.
[출판사 리뷰]
이 시대의 구약학자 월터 브루그만의
정의, 은혜, 율법을 위한 예언자적 선포!
“나는 이 책에서 관계성을 둘러싼 주제들을 해설했는데, 우리 사회에 매우 절실한 것이다. 사회적 관계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상품과 기술로 축소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 환원주의적 행태는 옛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성경은 옛 세계를 장악했던 환원주의에 저항하라고 담차게 증언한다. 게다가 끈질기고 상상력 넘치는 방식을 동원하여, 비판적인 이의 제기 수준을 뛰어넘어 대안적 현실까지 제시한다. 이 대안적 현실은 ‘비현실적’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생동하고 번성하는 사회를 만드는 데 너무나 절실한 것이다”(저자 서문 중에서).
우리는 문화 전쟁으로 인한 소음이 난무하는 전장에서 길을 찾고 있다. 당연히 교회에는 현명한 안내자가 필요하다. 물론 그와 같은 사람은 성경적인 터 위에 서 있고 예언자의 청신함과 목회자의 긍휼함을 겸비해야 한다. 월터 브루그만이야말로 수십 년 동안 늘 그런 안내자였다. 브루그만은 평생에 걸쳐 교회가 ‘예언자적 상상력’을 실천할 수 있도록 독려했는데, 이 책에서 그는 우리에게 ‘예언자적 들음’(prophetic listening)을 일깨워 준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의 부르짖음을 귀담아들으시고, 이스라엘을 선도한 예언자들은 그러한 하나님의 마음에 귀 기울였다. 브루그만은 이 사실에 힘입어 성경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임을 증명한다.
브루그만은 정의, 은혜, 율법이라는 논쟁적 용어와 씨름하는 가운데 세 용어가 성경적으로 어떻게 관계 맺는지를 밝힌다. 이 관계적 용어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에 신실함과 사랑으로 화답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 준다. 율법은 법임에도 불구하고 관계를 보호하는 목적을 이루고, 순종은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을 향한 우리의 응답이 된다. 그는 정의를 추구하려는 우리 마음을 법의 냉혹한 적용에만 두지 않고 공동선을 향한 열정으로 정향시킨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사고방식에 따르면 정의는 보응을 뜻하고, 대다수의 사람들도 정의가 은혜와 대립한다고 생각한다. 브루그만은 이러한 관점으로부터 정의를 구해 내고, 이를 한층 더 부요한 의미로 이끌어 낸다. 그렇다면 모름지기 정의란 “사회, 경제, 정치의 영역에서 이웃과의 연대 및 차별 없는 참여를 질서로 세우는 것”이다. 시편 기자가 사랑과 성실과 공의와 평화가 입맞추리라 선언했듯이, 브루그만은 성경을 찬찬히 살피어 우리가 신실하신 하나님과 신실한 관계를 맺는다면 정의, 은혜, 율법이 서로 부둥켜안을 것임을 증명해 낸다. 또한 그는 십계명이 형성된 과정을 관찰하면서 율법이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표현이며, 노예제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했다는 뜻임을 입증한다. 율법은 이스라엘을 속박으로부터 이끌어 내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하나님은 만민을 이롭게 하는 정의를 펼쳐 모든 관계를 일신하라고 이스라엘을 부르셨다.
이 새롭게 하심의 중심에 우리가 ‘신실함’(fidelity)으로 부름받았다는 확언이 자리한다. 신실함이란 얼굴과 얼굴을 맞대는 관계를 맺는 것이며, 우리는 이 관계 안에서 약속을 이행하고 공동선을 추구한다. 브루그만은 이것을 ‘타자 세우기’(othering, 타자의 유익을 구하는 행동)라고 부른다. 이 사회에서 우리는 자신에게만 갇혀 자기 배만 채워도 된다고 미혹당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신실하라는 부르심은 우리 삶을 전복한다. 서로 얼굴을 맞댄 이웃 사랑의 관계는 우리를 소외와 적대감에서 건져 낸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신실한 사랑이 우리의 사회적 관계를 송두리째 변화시켜 이웃과 이방인 그리고 원수까지 품게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에서 율법은 곧 대화다. 은혜와 정의의 하나님이 사람들과 나누시는 대화다. 이들은 그분의 말씀을 듣고 다시 묻기도 하는 상대가 되었음을 알고 벅찬 기쁨을 가누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이 대화가 이끌어 내는 순종에는 청신함과 기쁨과 자유가 충만하게 깃든다. 이 대화를 오늘날에도 살려 나가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필요하다. 성령께서 이끌어 가시는 끝없는 ‘해석의 대화’에 누가 참여할 수 있는가? 신실함을 겸비해서 듣고 대답하는 것 말고 무슨 묘수가 있으리요! 우리는 세상을 새롭게 바꿀 수 있다. 그것은 언제나 가능하다.”
신실은 공동선과 통해 있다. 공동선은 하나님, 나, 이웃이 하나로 이어진 전망을 드러낸다. 공동선은 ‘샬롬’(평화)의 기치 아래서 생동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샬롬을 이루고, 그분을 성실하게 신뢰하고 복종해야 한다. 그 길 외에는 이스라엘이 행복을 만끽하거나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길이 없다. 이 공동선에서 야웨가 감당하신 몫은 이스라엘에게 안전과 식량을 제공하시고 이스라엘이 스스로 만들 수 없는 삶의 기초 자양분을 제공해 주시는 것이었다. 공동선은 양측 모두를 놀라게 하며 이렇게 촉구한다. 이웃 관계에 투자하라. 유독 연약하고 보호받지 못하며 궁핍에 처한 이웃을 돌아보라! 샬롬의 기치 아래 있는 공동선은 누구도 함부로 배제되거나 업신여김을 받지 않아야 하며, 그 누구도 낙오될 수 없음을 말해 준다.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들도 마찬가지다. 공동선이란 야웨께서 숭고한 자기 존재로 자유로이 귀환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돌보아 달라는 비속한 요구에 불려 나오신 분임을 뜻한다. 아울러 공동선은 이 신실이라는 내러티브에 몸담고 있는 어떤 지체도 자신의 안녕에만 탐닉할 수 없음을 말해 준다. 모든 지체는 공동체라는 현실로 재차 소환된다.
_1. 하나님의 본성과 일하심 중에서
이스라엘의 상상력이 담아낸 정의에 관해 이렇게 질문해 보자. 모든 것을 전체로 흡수해 버리는 불의의 내러티브가 제어될 수 있을까? 달리 말해, 이 불의한 체제 밖에서도 정의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런 삶을 상상할 수 있는 요충지가 있을까? 이는 이스라엘의 정체성과 관련된 핵심적인 질문이자 공공의 삶을 살리는 핵심적인 질문이며, 우리 모두에게도 해당하는 시급한 질문이다. 처음부터 복음은 전체주의 체제가 중단되었고 또 그렇게 되리라는 소식을 말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결단과 인간의 행함이 연대하여 기존 체제를 중단시킨 사건을 반복해서 이야기한다. 체제를 중단시키는 것은 다채로운 갈래로 전개되지만, 출애굽 내러티브는 우리에게 체제를 중단시키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것이 무엇인지 일러 준다. 모름지기 불의한 체제 한가운데서 정의를 실천하려면 책략을 써야 한다. 출애굽 내러티브를 계승한 예언자들은 약탈적 경제 정책과 예루살렘 엘리트의 악행에 맞서서 실상 기예(技藝)에 가까운 대안을 끊임없이 창조한다.
_2. 정의 중에서
한 때 정의를 ‘변화시키는 관계’라고 메모해 두신 야웨께서 시간이 지나 다시 그 메모를 꺼내 읽으시는 것만 같다. 야웨의 정의는 흔하디흔한 보응의 법칙과 무관하다. 언약에 뿌리내린 정의는 그분의 넘치는 관대함에 힘입어 살고 유지된다. 이스라엘이 이것을 알게 된 것은, 이웃 사랑을 사회에서 지속시키는 일이 넘치는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자비를 모르는 인색함은 항상 선한 이웃 관계를 무력화시켰고, 우리도 늘 이런 맥락에서 출발했기에 이스라엘과 동일한 깨달음을 얻었다. 이스라엘은 진실로 깨달았다. 넘치는 은혜를 구현하려면 그토록 넓은 은혜를 베푸신 창조주 하나님, 그분의 기꺼운 마음에 뿌리내려야 한다. 이 정의는 뻔하고 완고한 제재 조치의 한계를 극복하고, 회복하는 정의로까지 나아간다. 그러므로 교환적 정의는 회복적 정의로 바뀐다. 진실로 말하건대, 회복적 정의는 하나님의 길에 대한 더할 나위 없는 표현이다. 굳이 다른 표현을 찾는다면 ‘은혜’, 곧 ‘광야에서 발견하는 은혜’와 절망 및 무력이라는 터에서 발견한 은혜일 것이다. 이 일을 능히 이루신 하나님이 우리를 신실함으로 다시 초대하신다.
_3. 은혜 중에서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은 계속해서 계명을 통해 말을 걸어오실 것이다. 이스라엘은 더 많은 계명을 받을 것이므로 들음을 중단할 수 없다. 야웨의 토라는 한곳에 고정되거나 갇힐 수 없으며, 특정한 의미로 확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메대와 페르시아의 법과 달리, 야웨의 토라는 항상 미지의 터로 나아갈 수 있게 열려 있고 준비되어 있다. 이스라엘과 유대교 전통은 새로운 담화를 낳는 해석을 시도한다. 이 해석 행위야말로 토라의 역동성을 보증해 주고, 얼핏 보면 폐쇄적으로 언급된 십계명을 미지의 해석을 향해 활짝 열어 준다. 그러한 점에서 해석이란 십계명이 특정한 상황 속에서 무엇을 뜻하고 요구하는지를 치열하게 논쟁하는 행위를 말한다. 비평적으로 말한다면, 우리는 구약의 토라가 어떤 책인지 알고 있다. 토라는 대전(大典)과도 같아서 다양한 환경에서 나온 여러 문서를 전용하고 통합했다. 그러나 토라가 선택한 전용과 통합은 상황을 감안한 해석 작업이었으며, 기존 문서의 요구를 확장하고 변경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따라서 토라의 본질은 규율을 늘어놓는 데 있지 않으며, 새로운 시대와 환경, 새로운 시대정신을 고려하는 지속적인 대화에 있다.
_4. 율법 중에서
1. 하나님의 본성과 일하심: 축소할 수 없고 가늠할 수 없는 관계 맺음
2. 정의: 시온에서 다시 시내산으로
3. 은혜: 한계를 뛰어넘는 사랑
4. 율법: 끊임없이 들으라, 지키라
이 책은 고대와 현재의 일반적인 상상력을 지배하는 제국 이야기의 대안으로 구약성경이 제공하는 다양한 방식에 대한 감동적인 설명이다. 우리는 우리의 상상력과 욕망과 실천을 구체화하는 브루그만의 신학과 해석에 동의할 것인지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_이안 프로반, 리젠트 칼리지
우리가 신실하신 하나님과 신실한 관계를 맺는다면 정의와 은혜와 율법이 서로 부둥켜안으리라! 이 책은 우리를 새로운 돌봄의 문화로 안내할 것이다.
_팀 디어본, 풀러 신학교
브루그만은 삶의 거의 모든 측면을 상품화하는 우리 사회에 적실한 성경의 요청은, 인류 공동체와 창조 생태계의 복지를 위해 서로 이웃이 되는 것이라고 도전한다. 이 책은 고대 이스라엘의 참모습을 향하여 나침반을 들지만, ‘모든 사람을 위한 자유와 정의’를 찾기 어려운 현대 세계에서 그 길을 찾는 지도가 될 것이다.
_새뮤얼 발렌틴, 유니언 장로회 신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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