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의 관심과 명령 그 실천을 위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를 저의 구원자와 주(主)로 믿는 필자(筆者)는 여러 가지 미혹의 영이 강하게 역사하는 이 시대에 우리 믿음의 형제들이 사도들로부터 전해들은 믿음을 강화하고, 곧 재림하실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공중에서 영접할 준비를 하게 하기 위해서 이 글을 씁니다.
제가 이 글을 마칠 즈음에, 제가 쓴 글로 인해서 저의 신앙이 확실히 성장하여 주님이 저의 모든 것이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의 은혜가 매우 강력하게 저의 심령에 믿어져서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서 저의 남은 생애를 온전히 주님의 종으로서 살아야겠다는 각오를 새롭게 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재림하실 주님을 사랑하므로 조금도 두려움 없이 주님이 어서 오시기를 기다리는 신앙이 되었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저는 이 글이 믿음의 형제들을 주님께 온전히 순종할 믿음으로 인도할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이 글을 통해서 당신의 일을 하실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그들을 구속하신 주님께 순종하게 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생명이 되시는 하나님 곁을 떠나는 것, 곧 불순종은 사망에 이르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죄 가운데서 죽을 수밖에 없는 당신의 백성들을 부르시고, 은혜를 주셔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팔복(八福)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의 선언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팔복은 하나님께서 부르신 자들을 당신의 친 백성으로 빚어 가시는 과정 중에 나타나는 성도들의 믿음의 완성 단계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믿음과 신앙의 깊이가 더해 갈수록 이 팔복이야말로 천국의 비밀을 가장 심오하게 나타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필자는 팔복의 마지막 복에 이르게 되면 우리 안에서 아들의 형상이 빛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영혼 깊이 인식하게 된다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에 마태도 예수님의 가르침 중에 이 팔복을 맨 앞에 기록하였습니다.
필자가 팔복에 대하여 연구하고자 여러 방면으로 그에 대한 책들을 찾아보았으나, 이 팔복에 대한 연구가 다른 성경연구에 비해서 심히 빈약하게 다루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에 필자는 팔복에 대한 필자의 견해가 앞으로 많은 믿음의 형제들이 팔복을 연구함에 있어서 하나의 밑거름이 되고,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베푸시고자 하는 은혜의 보고를 풍성하게 하여, 이에 대한 연구가 더욱더 깊이 있게 다루어지는 데 초석(礎石)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도들이 예수님의 계시로 받은 믿음은 성도가 창세전부터 하나님의 아들들로 예정을 입어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필자는 이 팔복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들을 만세 전부터 예정하셔서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빚어 가시는 과정 중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진리의 말씀임을 믿습니다.
그 진리의 오묘함과 그 풍성함은 성도들의 생애가 다 마칠 때까지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완전함에는 다다를 수 없다고 봅니다.
필자는 팔복에 대해서 묵상할 때마다 필자에게 주신 주님의 은혜를 성도들에게 드러내야 한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다른 형제들 역시 주님께 받아서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이 은혜를 서로에게 나타내어서 우리들의 신앙이 서로에게 도움을 주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또한 필자가 이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가운데 주님의 은혜와 동행이 있었음을 고백하는 바입니다.
필자도 알지 못했었던 진리에 대해서 알아가고, 또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은혜 곧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라는 말씀이 실제적으로 필자에게 응해서 필자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필자가 세상을 향한 지극한 사랑의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그 하나님을 큰 기쁨으로 즐거워하게 되었으니, 이 이상 더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필자는 이 글을 신학적인 체계를 가지고 학계에 제출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필자가 받은 은혜를 진술하는 것이니, 글이 비록 거칠고, 두서가 없고, 논리적인 면이 떨어질지라도 독자들이 넓은 아량을 가지고 이 글을 읽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오직 필자가 바라는 것은 이 글을 통해서 제게 주신 그 은혜를 이 글을 읽는 모두에게도 주셔서, 진실로 믿음의 사람들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을 알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필자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아는 기쁨만큼 더 큰 기쁨은 없다고 봅니다.
성경에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다”(행 17:11)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필자가 출판한 이 책이야말로 더욱더 사도들이 증거한 진리와 일치하는지를 점검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필자는 오래 전에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읽고 성경에 대해서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저의 지식도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그저 머리에만 머물고 그쳤을 것입니다.
칼빈은 그 시대에 주님이 쓰신 주님의 참된 종이었다는 인식이 저의 신앙이 성장해 갈수록 더해간 것을 고백합니다.
지금 출판하는 이 책도 필자의 신앙 지식을 바탕으로 한 글이므로 먼저는 읽는 독자들의 성경 지식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 받을 것이고, 후에는 성령의 교통으로 심령에서 증거 받을 줄로 믿습니다.
마른 쭉정이 같은 이 죄인에게 주님의 은혜가 임해서 당신만이 아시는 아버지를 알게 하셨으니, 필자는 주님의 은혜를 영원히 잊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저를 위해 대속하신 대가가 너무 크고 놀라워서 복음에 빚진 자로서 다시는 죄에 빠지지 않을 것과 사도들의 가르침을 따라 온전함에 이르는 것이 그분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이에 필자는 고백합니다.
주님의 임재 앞에 필자는 단지 저의 전 존재가 죄 덩어리임을 알고 오로지 주님의 대속의 십자가만을 붙잡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범죄한 후에 성전으로 도망가서 단 뿔을 붙잡는 믿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와 진리의 말씀으로 다시 태어나야만 하는 존재!
주님의 십자가와 함께 멸해지고, 주님의 부활과 함께 연합되어야만 존재할 수 있는 존재가 자신을 자랑할 만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의지하며 주님이 내 안에서 온전하게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비밀한 은혜이므로 이 글이 비록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주님의 손에 이끌려 기록되어졌을지라도 주의 성령께서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그 은혜를 전달하지 아니하면 이 글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질지라도 그것은 헛된 것이 될 것이고, 오히려 그 일이 저에게 독이 된다는 것을 의심치 않습니다.
필자는 단지 죄인이고, 육으로 태어나서 죄 가운데서 자랐고, 그 가운데서 부름을 받아 주님의 은혜 가운데서 죄 사함의 비밀과 하나님과의 화목과 천국의 소망을 갖게 하셨기에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립니다.
필자는 아무것도 아님을 고백하며, 앞으로도 영원히 주님의 손에 이끌리어 그 영광의 광채를 바라보기를 바라는 마음뿐입니다.
필자가 아는 이 믿음의 지식은 경건한 우리의 성도들이 익히 경험한 것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따르고 있는 성도는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이라고 믿습니다. 다만 필자는 필자에게 주시는 은사를 통하여 이 믿음을 글로써 표현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혹여 이 글이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가 되어서 독자들이 주님의 구속의 은혜를 확실히 알고 주님의 사람으로, 주님의 종으로서의 관계가 새롭게 되어 주님과의 동행이 이루어지게 되었다면 이 책은 그 즉시로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십시오.
이런 사람은 제가 쓴 글보다도 훨씬 더 믿음의 비밀에 대해서 잘 알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어떠한 글도 성령의 사람의 실제에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이 글로 인해서 주님께 대한 순종이 이루어지면 이 글은 그 소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이 글이 주님께서 대속하신 십자가의 비밀한 은혜를 아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사랑과 주님의 은혜를 영원히 찬양하면서 주님을 사랑하는 모든 형제들에게 하나님의 비밀한 축복이 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함평 나비 들녘에서
정 성 수 드림
[제목해설]
팔복으로 들림을 준비하라
마태복음 5장 1절부터 12절까지 말씀에 나타나 있는 ‘8가지 복’을 흔히 ‘팔복’(八福)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는 “복이 있나니”가 아홉 번 나오지만, 11-12절은 10절의 설명이므로 실질적으로 8회가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복이 있나니’로 번역된 헬라어는 형용사 ‘마카리오스’(makarios)로서 ‘하나님께 축복되어 있다’, ‘복되다’의 뜻입니다.
10절까지는 감탄문으로 쓰여 있는 것으로 보아 예수님께서는 “아! 행복스러운지고!” 혹은 “아! 얼마나 축복인가!”라고 감탄의 음성을 높이고 계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시간의 경과나 상황의 변화에 따라 소멸되는, 뜻 없는 이 세상의 복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슬픔이나 고통에 의해서도 소멸되는 일이 없으며, 이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하나님의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복이 있나니’는 하나님의 객관적인 축복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습니다.
이것을 각각의 경우에 해당시키고 있는 것이 ‘이유, 근거’를 보여주는 ‘것임이요’입니다.
팔복의 처음 네 가지 복은 ‘자기 자신에게 의(義)가 없어서 어찌할 수 없음을 발견하는 단계들’을 말씀하고 있으며, 다음 네 가지 복은 처음 네 가지 복의 기초 위에서 ‘그리스도인의 책임과 의무’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팔복의 첫 부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복 받을 삶의 자세는 천국 시민의 생활을 통해서 얻게 되는 복인 동시에 곧 그리스도인들의 특성입니다.
첫 부분은 사람이 자신에게 의가 없어서 어찌할 수 없음을 발견하는 단계로 자신이 구원받는 단계를 말합니다.
제1복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심령’(心靈)이란 영혼의 근본적인 부분입니다.
그리하여 심령이 가난한 자들의 영적 경건이 모자라서 가난하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의 심령에 관련하여 가난하다는 뜻입니다.
이는 자신의 영적 비참과 결핍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아무 선한 일을 행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바를 행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마음속으로 인정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아니하며, 오직 하나님께만 모든 것을 기대하는 자들입니다.
제2복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
‘애통(哀痛)하는 자’란 주로 ‘신령한 애통, 자아의 죄책감과 부족, 영적 파탄을 깨닫고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자’를 말합니다.
중생(重生)한 사람들은 ‘모든 경건하지 않은 일과 또 경건하지 않은 죄인들이 주를 거슬러 한 모든 완악한 말’(유 15)을 인하여 울 정도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이 애통은 자기중심의 애통이 아닙니다.
하나님 중심의 애통입니다.
애통하는 자들은 자기 자신의 죄와 결점들에 대해서만 애통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만연된 악과 수많은 고난과 비참의 원인들에 대해서 슬퍼하며 고통을 나누는 자들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구하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며, 하나님께서는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멸시하지 않으실 것’(시 51:17)이라고 하였습니다.
제3복 온유한 자는 복이 있다.
온유는 하나님께 순종할 마음의 자세입니다.
‘온유’(溫柔)란 ‘부드럽고 순종하는 겸손한 태도’를 말합니다.
온유한 자는 악의를 품지 않습니다.
자기가 입은 해를 두고두고 생각하는 대신에 주 안에서 위로를 찾고 자기의 길을 전폭적으로 그에게 의탁합니다.
온유는 하나님의 은총만이 그의 모든 것이 되므로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로 알아’(히 10:34) 자기의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사랑하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의 손에 모든 것을 맡깁니다.
제4복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
이들은 악에 대한 하나님의 최후의 승리와 그의 나라가 완전히 서는 것을 사모하여 의롭고 바른 일을 행하기를 갈망하는 자입니다.
이 의(義)는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의입니다.
주님은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열망하는 자들을 주리고, 목마름으로 표현하셨습니다.
팔복의 둘째 부분
그리스도인들이 신자가 된 후에 더욱 힘써야 할 책임과 의무입니다.
둘째 부분에는 천국 시민의 적극적인 생활을 통해서 얻게 되는 그리스도인들의 특성이 나타납니다.
제5복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다.
‘긍휼’(矜恤)은 ‘비참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입니다.
죄인에 대한 ‘용서의 정신’입니다.
긍휼은 친절한 마음과 친절한 행위를 다 포함합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들은 스스로 자기는 하나님의 긍휼을 입을 자격이 없으며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그들이 단순히 죄인일 뿐 아니라, 정죄 받을 죄인이 될 것임을 알고 있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다른 사람을 대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보여주신 긍휼함을 그들의 태도를 통해서도 나타내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제6복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다.
신실하고 정직한 사람, 위선이나 외식함이 없는 성실한 사람입니다.
마음 청결은 마음이 악하게 갈려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섬기려 하지 아니하는 한 마음, 곧 단순한 마음을 가진 자입니다.
마음이 청결케 되려면 주님의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제7복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복이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 화평한 자들입니다.
따라서 복음으로 하나님에게로 돌아오게 하여 화목하게 해야 합니다.
불화한 자들 사이에 화목을 가져다주기 위해서 그들에게 주어진 모든 기회를 선도함으로써 그들이 참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제8복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다.
‘의’(義)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로서, ‘의를 추구하다가 박해를 받는다’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를 위해서 박해받는 것’을 말합니다.
악인의 성품은 항상 맞부딪칩니다.
그러한 이유로 세상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미워합니다.
이렇게 박해받는 일은 다른 원인이 아니라, 무슨 일이 닥친다고 할지라도 계속 진리와 공의와 순결에 대한 하나님의 표준을 고수하고, 인간이 하나님의 대용물로 세운 우상들에게 무릎을 꿇거나 비 진리와 타협하기를 거부한 일로 인하여 당하는 고통인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여덟 가지 복’은 축복인 동시에 천국 시민의 특성입니다.
이는 인간의 편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주님의 편에 초점을 두고 주님 앞에 선 우리의 태도와 자세에서 정의할 수 있습니다.
팔복은 이 세상적인 복이 아닙니다.
팔복은 영적인 복으로서 천국 시민의 특성을 말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삶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릴 수 있는 당신의 아들들에게 나타날 수 있는 복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의미에서의 축복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주님은 당신의 능력으로 당신의 입에서 나온 아버지의 말씀으로 그의 택하신 자들을 당신의 온전한 형상으로 빛나게 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이것을 염두 하시고 그의 제자들에게 팔복을 말씀하셨습니다.
[출판사 서평]
팔복예찬(八福禮讚)
팔복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의 선언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팔복은
하나님께서 부르신 자들을
당신의 친 백성으로 빚어 가시는
과정 중에 나타나는
성도들의 믿음의 완성 단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팔복은
천국의 비밀을 가장 심오하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팔복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들을 만세 전부터 예정하셔서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빚어 가시는
과정 중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진리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스펄전은 팔복을
‘천국을 향하여 놓여 있는 사다리’로 비유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팔복의 처음 네 가지 복은
‘자기 자신에게 의(義)가 없어서
어찌할 수 없음을 발견하는 단계들’을 말씀하고 있으며,
다음 네 가지 복은
처음 네 가지 복의 기초 위에서
‘그리스도인의 책임과 의무’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로부터 시작한 복은
그 다음 단계로 올라 설 때마다
그 아래 계단의 열매가
그의 심령에서 더 깊고 풍성하게 열매 맺습니다.
즉 ‘온유한 자가 받는 복’도
그 위의 단계인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더욱더 주님의 온유하심을 닮아 가게 되고,
‘긍휼의 복’도 다음 단계인
‘마음이 청결한 자의 복’에서
더욱더 깊이 있고 선명하게 나타납니다.
이에 저자는
이 책에서 반복적인 형태로 팔복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이네오출판사 대표 나상만 목사
제1복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25
심령의 가난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주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당신을 바라봄으로 자신들의 심령의 가난을 알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자신에게로 돌이키시기 위해서 미리 그들의 심령을 겸손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리에 있는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개인 개인들, 집단, 나라들을 겸손하게 하시기 위해서 일하십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세상눈에 보이지 않는 천국을 소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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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복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 97
성도들의 신앙의 정진에 있어서 애통은 반드시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 장에서 말씀하고 계시는 애통은 심령, 곧 마음을 찢는 애통입니다.
애통과 위로는 동시에 이루어집니다.
주님은 자기 민족들의 죄로 애통해 하는 자들을 위로하십니다.
주님께서 애통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위로의 성격
주님의 위로로 구약의 성도나 신약의 성도나 죄가 용서되고 씻기는 방법은 똑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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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복 온유한 자는 복이 있다 103
온유란 무엇입니까?
성도는 율법을 지켜야 합니까?
온유한 자는 이 땅에서도 심겨짐을 받고 궁극적으로는 아버지의 나라를 주님과 함께 상속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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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복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 129
성도는 다음의 네 가지 이유 때문에 의에 주리고 목마르게 됩니다.
주님은 말씀하시므로 의에 대한 갈증이 추구하는 것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입니다.
주님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을 당신의 계명으로 인도하여 영적인 배부름에 이르게 하십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심령이 배부름을 얻으려면 우리와 하나가 되신 주님과 하나가 되어야 하고 모든 믿음의 형제들과의 연합을 도모해야 합니다.
기록된 진리의 말씀은 진리의 성령과 일치합니다.
지방교회 사람들이나 많은 목사들이 성령 받는 것에 대해 오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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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복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다 199
주님이 말씀하시는 긍휼의 마음을 품으려면 우리는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품으려면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자기에게 죄지은 자에 대해서 진심으로 용서하고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목해야 합니다.
성도가 사람을 긍휼히 여기려면 육으로 난 사람의 처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아는 자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열심을 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긍휼을 알려면 주님을 머리로 하는 지체들 간의 연합을 도모해야 합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주님의 신령한 몸에 연합될 소망이 있기에 이 세상의 그 누구라도 하나님의 긍휼의 대상임을 압니다.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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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복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다 241
마음의 청결함을 얻으려면 주님의 가르침에 순종해야 합니다.
주님으로 옷 입으려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항상 바라봐야 합니다.
사도들은 주님의 가르침 곧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는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기도는 긍휼히 여기는 자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는 최선의 길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려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자들을 청결하게 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음에 합당한 생활로 마음에 평강을 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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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복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다 285
화평하게 하는 자는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아 하나님 앞에 사는 자들입니다.
의는 전가되지 않고 죄도 죄만 전가되지 않습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을 뿐만 아니라 주님의 행위를 본받는 자들입니다.
복음으로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자들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일은 평강의 왕이신 주님이 직접 하시는 일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주님이 그들 안에서 일하시도록 늘 기도에 힘쓰는 가운데 다음의 몇 가지를 갖추어야 합니다.
화목하게 하는 자는 성령의 열매가 마음에 맺어져야 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성령은 그들의 인격에서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의 예로서 구약의 선지자 이사야
화평하게 하는 자는 주님이 지신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화평을 가지고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는 자들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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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복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다 407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어떤 자들입니까?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사모하는 열심 때문에 박해를 받습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들은 믿는다는 자들로부터 박해를 받습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사람 사랑하심을 알기 때문에 박해를 받습니다.
주님께서는 겸손하셨기에 교만한 자들로부터 박해를 받으셨습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쉬어가는 코너
이에 저자는
자기 자신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 사랑을
더욱더 알기 원하고,
그 사랑을
자기 심령으로 실천하기를 노래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어찌 그리 달콤하고 좋은지”
“하나님의 율법의 계명이
어찌 그리 정의로운지…”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는 말씀이
어찌 그리 내 영혼을 기쁨으로 충만하게 하는지!
저자는
자신이 바울과 같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강점이 많은
바울을 닮은 것이 아니라
바울의 약점을 닮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에 저자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 12장에서
‘자신의 자신됨’을 드러냈듯이
저자 스스로가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목자가 될 수 있는
이유를 밝히는
바울의 고백을 부끄럽게 인용한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Weight | 1.5 lb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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