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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렴

$40.00 $28.00

저자 : 김익하  |  출판사 : 창조문예사
발행일 : 2021-03-10  |  (148*210)mm 488p  |  979-11-86545-93-5
고독 사랑 생명 구원의 소설 미학
가난하고 고단하게 살아온 서민층의 곡진한 삶을 정성 들여서 쓴 서사로, 인간 사회의 뒤안길에 가려 있는 여리되 따스하고 진실 된 인간의 모습을 조명한 소설이다. 우리말 사용에 탁월한 작가로 정평이 나 있는 김익하의 어휘들은 ‘간추린 낱말 사전’을 첨부하여 독자의 이해를 도왔다. 2019~2020년에 월간 『창조문예』에 연재된 장편소설이다.

※ 토렴이란 밥이나 국수 따위에 따뜻한 국물을 부었다 따랐다 하며 데우는 것으로, 가난하고 궁핍한 옛 서민들은 찬 음식을 토렴하여 끼니를 때웠다.

[줄거리]

“옛적에는 그랬다. 굶은 사람이 대문 안으로 깡통을 디밀면서 끼니를 요구할 때, 집 안에 새로 지은 밥이 남은 게 없고 딱하게도 묵은 보리밥을 줄 때가 있는데, 그땐 반드시 맑은 물에 깨끗하게 헹군 다음 뜨거운 장국으로 토렴해 주는 게 없는 사람에게 베풀 최소한 도리였다.”

어릴 때 홀어머니 곁을 떠나 고아 신세나 다를 바 없게 성장한 이동우(=서성표, =이희구)와, 남편과 사별하고 자식들마저 뿔뿔이 흩어져 외톨이 촌로 신세로 전락한 합죽할미가, 혈연으로는 이어지지 않았으나 진정한 가족이 되는 이야기다.

[출판사 리뷰]

이 작품을 쓰는 동안 마스크를 착용해야 하는 통금과 불통 시대를 맞았다. 유일한 소통 도구로 문자가 말을 대신하게 되었다. 해서 적확한 쓰임이 유용한데 이 순간에도 목하 많은 문자가 훼손되고 있다. 문자를 소비해서 작품을 제작하므로 상시 보호해야 할 의무가 주어진 작가 처지에선 요즘처럼 글 쓰는 일이 무용하다고 느낀 적도 없었다. 문자도 시대 변화를 겪긴 하지만, 현금 세태를 관통하면서 그 문자들이 수침한 논에서 거둬들인 앵미와 같이 변질해서 양곡으로 쓸 수 없는 위기를 맞았다. 문자 곳간인 국어대사전이 전몰장병 기념관의 죽은 자 명부와 다름없도록 세 치 혀에 목숨 건 자들이 왜곡 훼손해서 후대들 언어생활을 황폐화한 전죄前罪를 지었다.
부쩍 쓰임이 잦아진 공정이니, 위민이니, 협치니, 민의니, 혐의 없음, 나는 모르는 일 따위 등 셀 수 없이 많은 문자가 생명을 잃고 쓰임새에 따라 수상쩍기도 하지만 남루해졌다. 도저한 문자가 복원 회복이 불가능할 만큼 허섭스레기로 변질한 사태에 자괴감마저 든다. 그러니 훼손된 문자를 포쇄하고 벼려 써야 할 처지에선 선택한 문자도 제 뜻을 바르게 나타낼지 미심쩍다. 참으로 곤욕스럽게 살아가는 불편한 시대다. 희망이란 문자에서도 기다림을 기약할 수 없다는 판단을 하면서도 수세적 문자인 ‘기다림’을 굳이 설정했고, 설정한 마당이니 기다리기도 했으며, 거기에 다가가려고 나름 애는 썼다.

*
모태에서 받은 목숨의 경외심 때문에 삶을 이으려다가 상처 입고도 이름을 남기지 못한 인간이 아닌 사람에게(이 말은 ‘이 인간아, 사람값을 좀 해라’에서 근거했다) 이 글을 바친다. 바탕 슬픔을 적확하게 전달하지 못한 재주가 그저 부끄러울 뿐이다.
– <작가의 말> 중에서

이 장편소설의 전개 구조는 사람 심성의 선과 악을 대척점에 놓고 갈등을 고조화하면서 사건을 굴절시켜 탄력을 얻는다. 이를테면 두 주인공인 합죽할미와 이동우는 산판 화물차 운전기사, 방호식, 최 영감, 식당 안주인, 서재숙, 구두닦이, 백상호, 홍은희, 사출기사, 윤대현, 심영달 내외, 트럭운전사, 간이주점 쥔 여자, 양미자 등 가진 건 없으나 부지런히 사는 선한 인간들의 도움을 받지만, 암캐 주인, 민기준, 봉제 공장 사장, 서봉태, 외사촌 누이들, 양길구, 안보웅, 김광원, 남준만, 추심원, 감포 출신 배꾼, 약재상 영월 엄가 등 조그마한 이권이라도 쥔 자들이 휘두르는 폭력에 삶이 왜곡되고 상처를 받는 구조로 짜여 있다.
장편소설 『토렴』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거의가 사회에서 행복하고 성공한 사람들이 아니라 불우하게 살다가 실패한 루저의 군상들로 그려져 있다. 위에서 든 이동우=서성표=이희구를 흔히 크게 성공한 인물로 부르는 주인공이라 하지 않고 중심인물로, 합죽할미를 부차적인 인물로 지칭한 이유이다. 그들은 숙명처럼 주어진 열악한 환경에서 잘 견뎌온 선의의 피해자들이긴 해도 여느 양달에서 빛나는 존재이기보다 응달에 가려진 인간상이다. 그러기에 이렇게 인간 사회의 뒤안길에 가려 있는 여리되 따스하고 진실된 인간의 모습을 소설로 조명해 낸 김익하 작가의 노고를 높이 산다. 이런 접근은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자세가 아닐 수 없다.

(중략)

김익하 작가의 『토렴』은 적어도 갸륵한 주제 의식이나 귀한 제재에다 다채로운 문체 면에서 한국 서사 미학에 바람직한 의미를 지녔다. 워낙 취약한 주동 인물들은 사무친 사회생활의 외로움 속에서도 나름대로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다. 작가 또한 선의의 일부 작중 인물들과 더불어 사회의 약자층에 따스한 인정과 위안을 주는 휴머니티를 보여주었다. 어릴 적부터 너무나 외로운 결손가족 식구들의 불우한 삶에 사랑하는 마음으로 속 깊은 자기 추스르기를 통한 생명 중시의 메시지와 구원 의식을 곁들여서 따스한 인간의 정을 나눌 기회를 제공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해서 가뜩이나 여리고 어두운 고아와 결손가족에 해를 입히는 비정한 인간들의 무관심과 횡포 처지를 역지사지易地思之로 반성하고 배려하는 자세를 가다듬어야 할 것 같다.
– 이명재(평론가, 중앙대 명예교수)

합죽할미는 화들짝 놀라며 이희구 발에서 신발을 강제로 벗기고 몸을 방 안으로 밀어 넣은 뒤 부엌으로 서둘러 들어섰다. 주변을 한 번 삥 휘둘러보던 눈길이 무쇠솥에 멈췄다. 시집온 뒤부터 여태까지 그녀의 손길이 멈추지 않던 무쇠솥인데 늙어도 들기름에 무쇠가 아니라 검은 플라스틱으로 보일 만큼 빤질빤질 빛났다. 그녀는 그것을 볼 때마다 무쇠솥을 물려주고 죽은 시어머니 언사가 내처 떠올랐다. ‘어미야, 얼른 상 봐라. 일하고 온 아비 배고프것다. 허기진 사람이 시장기를 참다가 밥 잦아드는 새를 못 기다리고 솥전을 잡은 채 쓰러져 죽는다는 옛말도 있다. 그러니 날래 서둘러라.’ 저녁 끼니때면 재촉을 잊지 않던, 죽은 시어머니 목소리가 때를 기다린 듯 지금 새삼 귓가에서 귀울음처럼 살아 올랐다.
지금 시각에선 평소 하던 대로 밥 짓기는 늦었어도 한참 늦었다. 솥을 달궈 덥히자면 시간이 터무니없게 지체될 게 빤했다. 일찍 산으로 간다는 사람을 중죄인처럼 오래 잡아둘 순 없었다. 그녀는 잠깐 망설이며 대책을 궁리했다. 겨울철, 급히 요기할 만한 먹을거리가 있다면 엊저녁에 먹다 남긴 식은 밥 덩이뿐이다. 부엌으로 선뜻 내려선 합죽할미는 찬장에서 식은밥이 담긴 사발을 찾아냈다. 일상 버릇대로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으로 식은밥 알갱이를 집어 입 안으로 넣어 앞니로 깨물어 상태를 확인했다. 찬장 안에 있었지만, 얼어붙은 냇가 모래알처럼 입 안에서 서걱서걱 씹히는데 잇몸뿐 아니라 이뿌리까지 시릴 만큼 찼다.
그거나마 먹여 보내려고 합죽할미는 얼른 프로판가스 레인지에다 양은 냄비를 얹은 뒤 물동이에서 살얼음을 깨고 찬물을 퍼 담았다. 이내 붙은 불이 얼음물을 덥히며 김을 올렸다. 식은 밥 덩이를 토렴할 요량이었다. 물이 양은 냄비 속에서 이내 굽이쳐 끓어올랐다. 백비탕으로 식은 밥을 두어 번 덥힌 뒤 나머지 물에다 된장과 고추장을 푼 다음 간장으로 간 맛을 가늠해가며 장국을 만들었다.
그리고 덥힌 밥 덩이가 담긴 사발에다 끓는 장국을 부었다. 밥이 담긴 사발에서도 김이 올랐다. 뜨거운 물로 덥힌 식은 밥 덩이가 목구멍으로 편안하게 넘길 만한 음식으로 돌아왔다. 토렴이 제대로 된 듯했다. 힘든 일하는 날, 끼니때가 어정쩡해서 허기를 채울 때, 시어머니가 식은 밥 덩이를 찾아내 임시변통으로 급히 만들던 먹을거리였다. 시어머니는 토렴 음식을 만들면서 며느리에게 새겨듣도록 일렀다.
“옛적에는 그랬다. 굶은 사람이 대문 안으로 깡통을 내밀고 끼니를 요구할 때, 집 안에 새로 지은 밥이 남은 게 없고 딱하게도 묵은 보리밥을 줄 때가 있는데, 그땐 반드시 맑은 물에 깨끗하게 헹군 다음 뜨거운 장국으로 토렴해 주는 게 없는 사람에게 베풀 최소한 도리였다.”
합죽할미는 쥐코밥상에다 토렴한 밥그릇과 김치 사발까지 곁들여 방 안으로 들어와 이희구 앞에다 내려놓았다. 불빛에 합죽할미의 물 묻었던 손이 그날따라 눈에 띄게 번들거려 이희구를 미안케 했다. 급히 서두르다 보니 젖은 손에서 물기를 닦아낼 겨를이 없었던 모양이다. 뼈 마디마디 쑤시지 않은 데가 없는 육신이지만, 오늘은 그런 느낌이 들지 않을 만큼 행동이 민첩하도록 빨랐다. 이희구는 황망히 상을 맞받으며 황송함을 감추지 못했다.
“할머니, 이른 아침부터 괜한 고생을 시켜드려 죄송하구먼유. 자던 댓바람으로 일찍 갔다가 점심때쯤 돌아오려고 했는디…….”
“하, 시방 뭔 소리 하누 이 사람아. 내가 자네 빈속을 아는데 어떻게 맨입으로 산으로 그냥 보내? 그리 보낸 뒤 내 속은 과연 편할까. 밥을 덥힌 김에 아예 주먹밥이나 두어 개 만들어 드릴까나? 혹 늦을지도 모르는데…….”
(19∼22쪽)

작가의 말

기다림
응달진 밭 쭉정이들
빈 둥우리기
이름을 또, 얻다
인간 면허가 필요한 까닭
고향을 등지다
깨진 자갈끼리
낯설게 다가온 동료들
또 다른 그들
볕을 가진 사람
얕게 흘러 깊어진 강
부추 끝 이슬
회음벽回音壁
너와 너의 교집합
빈손 사냥꾼의 귀환

평설/이명재

김익하

강원도 삼척에서 태어났다. 전기공학을 공부하여 회사생활을 오래 했다. 엔지니어링 회사를 설립했으나 IMF로 사업이란 걸 접었다. 1980년 『현대문학』에 단편소설 「설해묵」, 「부황의 땅」 추천 완료로 등단했다.
작품집으로 『33년 만의 해후』, 『개미지옥』이 있고, 장편소설 『소설 이승휴』가 ‘2017년 세종도서 문학 나눔’으로 선정되었다. 구로문인협회장으로 봉사했고, 현재 한국문인협회 지회·지부 위원장을 맡고 있다.
단편소설 「탱자나무집 현자」로 제20회 최인희 문학상을 수상했다.
sanjung0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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