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논문들을 통해 한국에 있는 독자들에게 인사드린다. 이곳에 실린 논문들은 신약성경을 역사적이고 종교적인 문맥에서 이해하고 이로부터 그 메시지의 특별한 점을 인식하고자 노력해 온 한 ‘신약학과 고대 유대교’ 교수의 연구들이다. 이러한 작업은 두 가지 중점을 가지고 진행되는데, 한편으로는 대학에서 행한 학술적인 연구와 수업의 형태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와 그 교회의 선포를 위함이다. 그래서 필자는 국립대학교 개신교 신학부의 교수인 동시에 독일 감리교회에서 임직 받은 설교자이기도 하다.
– p. 12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세례자 상(像)으로부터 본다면, 세례자 요한을 쉽게 초기 기독교의 한 인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원시 기독교적 전승이 요한을 선구자이자 선행자로서 예수에게 부속시키면서도 그를 서열과 역할을 따라 예수에게 종속시키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세례자 요한의 역할이 예수와 원시 기독교와의 관계로 국한된다는, 역사적으로 부적절한 관점이 생겨났다.
– p. 32
성만찬 말씀은 신약성경에서 두 가지 기본 형태로 나타나는데, 곧 마태(마 26:26-29)가 광범위하게 따르고 있는 마가(막 14:22-25)의 버전, 그리고 바울의 것(고전 11:23-25)과 유사한 누가(눅 22:19-20)의 버전이다. 유대적 만찬의 전형적인 특징들은 네 가지의 만찬 묘사들에서 모두 나타난다. 하지만 고린도전서 본문과 관련해서는 람페(P. Lampe)가 클라우크(H.-J. Klauck)를 넘어서 그 진행 과정을 헬레니즘적이고 로마적인 만찬들과도 일치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 p. 101
구약성경과 초기 유대교 시편들 그리고 유대교의 기도 실천에서 마주치게 되듯이, 신약성경에서 기도를 위한 전제 조건과 토대는 이스라엘의 기도다. 이때 한편으로는 성전 예배에서 사용되는 시편 기도들(시편을 가리킴-역주)의 역할에, 다른 한편으로는 회당들에서의 기도들에 주목해야 한다. 눈에 띄는 것은 이집트에 있는 회당들이 기도처(proseucai,)라 불린다는 사실이다.
– p. 120
다른 사람들이 한 사람을 보듯이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일은 이 ‘(바라)봄’이 진리에 상응할 때에만 받아들여진다. 그것이 악의나 무지에 의해 변질되었다면, 적절하게 바라보는 방식이 가르침과 정보를 통해서 복원돼야 한다. 바로 이것을 요세푸스는 『유대교의 근원들(또는 근원성』(뮌스터의 요세푸스연구회가 번역한 책의 제목)에 대한 자신의 책에서 의도하고 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진실된 것’(tavlhqe,j)이며, 그는 진실된 것/진리를 알기 원하는 이들에게 시선을 돌린다.
자기 작품의 마지막에서 요세푸스는 “우리에 대하여 부당하게 썼던” 이들을 언급하며, 이제 “그들이 뻔뻔스럽게 진리에 반대하여 스스로 싸움을 시작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고 할 때, 다시 한 번 ‘진리’(avlh,qeia)에 대하여 말하게 될 것이다.
– p. 230
축복의 약속은 미래를 열어 놓는다. 더 정확히 말해 미래는 하나님과 함께하고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것에 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으로서 임마누엘은 항상 동시에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와 함께 이해돼야만 한다(마 1:23).
우리의 신약성경은 마태복음과 계시록의 임마누엘을 통해 – 우연에 의해? – 둘러싸여 있다. 그렇지만 그것이 뜻하는 것에 따르면, 아직 여전히 오는 것이 지체되지만 그 주는 현재의 주다. 그것은 거꾸로도 통한다. 현재의 주는 미래의 주와 동일하다. 그래서 현재의 주는 미래의 주고 또 미래의주는 현재의 주다. 현재에 있고 또 미래에 있을 그분은 동일한 주다.
-p. 4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