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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교회 문화권 안에서 축귀 사역은 꽤 익숙한 이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에게 닥치는 일체의 고난의 배후에 사탄(귀신)의 역사가 있다라며-심지어 감기에 걸린 것조차 귀신이 역사해서 그렇다며- 교회의 거의 모든 자원을 오로지 축귀 사역에 쏟아붓는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특정한 도시나 마을마다 ‘지역의 영’이라 불리는 귀신의 세력들이 활동하고 있으므로 이들을 그곳에서 내쫓기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땅 밟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편, 기도원마다 축귀 사역을 빌미로 사람을 감금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불미스러운 경우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이렇듯 많은 교회 현장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축귀 사역이 행해지고 있으며, 축귀 사역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그에 합당한 ‘능력 권위’가 부여되는 것이 현실이다. 아마 이런 현상은 비단 한국교회에서만 유별난 것은 아니고 기독교 역사가 오래된 서구 교회에서도 종종 갈등과 긴장의 빌미를 유발한 것 같다. 그래서 유명한 기독교 변증가인 C. S. 루이스는 “사탄에 대해 무심하지도 말고 지나치게 관심을 기울이지도 말라’는 당부를 한 것이 아닐까.
과연 우리는 축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면 ‘축귀는 기독교의 핵심 요소’인가? 본서는 바로 그런 질문에 답하기 위해 쓰인 책이다. 본서의 저자는 국제적인 축귀 전문가다. 그는 오랫동안 신약성경과 초기 기독교 문헌에 나타난 축귀 사역을 전문적으로 연구하였고, 그 결과를 집대성하여 본서에 담았다. 성경적 축귀 이해를 탐구하기 위해 저자가 섭렵하고 추적한 자료는 실로 방대하다. 그는 신약성경 전체뿐 아니라 유대교 외경과 Q 문헌, 초기 기독교 문헌 일체, 그리고 기독교 세계 외부의 저술까지 폭넓게 살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초기 기독교 세계에서 축귀에 대한 이해가 결코 획일적이거나 단선적이지 않고 오히려 매우 역동적이고 다층적인 양상을 띠었음을 밝힌다.
신약성경 복음서에 따르면 확실히 예수는 위대한 축귀 사역자였음이 분명하다. 그는 종종 귀신의 압제로부터 사람들을 해방하고 치유하였으며, 그의 이런 행위는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성공적으로 침입했음을 알리는 주요한 표징이었다(아마도 오늘날 축귀 사역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서에 나타난 이런 장면으로부터 큰 영감과 동기부여를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신약성경을 조금만 더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축귀를 이해하는 방식은 천편일률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다. 당장에, 초기 기독교의 대표적 신학자이자 선교사인 바울이 쓴 서신서들만 해도 축귀 사역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왜 바울은 축귀 사역에 대해 침묵하는 것일까? 혹시 그는 역사적 예수에 대해 잘 알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혹은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가져왔고, 바울은 기독교를 시작한 것일까? 이런 현상은 신약의 기타 서신서에서도 공통으로 발견된다. 우리는 이런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또한, 예수의 사역을 집약한 네 개의 복음서만 해도 예수가 행한 축귀 사역을 소개하는 방식이나 신학적 강조점이 각기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가령 마가복음의 경우 예수가 행한 축귀 사역에 대해 매우 적극적인 우선권을 부여하지만, 누가는 그것을 예수의 치유 사역과 균형 있게 배치하며, 마태는 축귀자 예수보다는 ‘교사’로서의 예수에 초점을 맞춘다. 제4복음서인 요한복음의 경우 아예 예수의 축귀 사역 자체를 주요 표적에 포함시키지 않을 정도다. 복음서에 나타난 이런 차이점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이는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그러니 복음서의 몇몇 구절과 장면에 기초하여 마치 축귀 사역이 기독교 사역의 핵심인 듯 행동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초기 기독교 지도자들은 예수가 행한 축귀 사역을 액면 그대로, 또는 문자 그대로 반복하지 않았을까? 아마도 그 까닭은 초기 기독교 지도자들의 신학적 유연성과 문화적 변용성에서 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바울의 경우 선교지에서 탄생한 신생교회가 직면한 신학적-교리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더욱 집중했음으로 자연스럽게 축귀에 대한 강조가 덜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바울을 비롯한 신약 저자들은 예수가 유대교나 심지어 기타 종교에서 행하는 축귀 방법과 유사한 방식을 채용하여 귀신을 내쫓은 행위들을 지나치게 강조할 경우 행여 기독교와 이방 종교의 구분이 희미해질 것을 염려했다. 이런 특징은 속사도 시대의 문헌들에서도 대체로 반복된다. 즉 그들은 기독교의 참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한 가지 방편으로 축귀 사역에 대해 덜 강조하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현상적인 측면에서 축귀 사역에 적극적이지 않았다는 것은 심지어 기독교에 적대적인 외부 비판자들의 저술에서도 공통적으로 발견되기까지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초기 기독교에서 축귀 사역 자체가 완전히 제거되거나 사라진 것은 아니다. 교회는 필요할 경우 적극적으로 축귀 사역에 임했다. 하지만 그 정도나 강도는 현대의 우리가 생각하는 것에 비해 상당히 미미했다는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한편으로 요한복음에서는 예수의 축귀 사역 자체가 아예 소개되지 않는다. 그 대신 요한복음의 저자는 사탄을 거짓의 아버지로 규정하면서, 사탄을 포박하고 내쫓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교회가 ‘진리’를 올바로 깨달아 그 진리 위에서 바르게 행하며, 바르게 선포하는 것임을 천명한다. 그리고 이런 요한복음의 특징은 향후 기독교 전반의 공통적인 특징으로 자리한다. 이는 초기 기독교가 마치 일종의 마술 사역처럼 비칠 수도 있는 축귀 사역을 공공연히 행함으로써 비기독교인들을 혼란스럽게 하기보다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간교해지는 사탄의 사역에 맞서 복음의 정수를 파수하기 위해서는 ‘진리 싸움’이 훨씬 더 근본적인 과제라고 인식했음을 알려준다. 즉 초기 기독교의 지도자들은 교회가 사탄의 왕국과 싸워 이기기 위해서는 진리를 바로 세우고 전파하는 것이야말로 교회의 성패가 달린 문제로 간주한 것이다.
우리가 이런 결론에 동의한다면 어떤 교회와 그리스도인 사역자들이 마치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축귀 사역을 잘 분별하고 경계해야 함이 마땅하다. 다시 한번 루이스의 말을 빌자면, 우리는 너무 지나치게 사탄의 존재와 영향력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오히려 신약의 저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이 가져오신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현실에 집중했던 것처럼 우리 역시 그래야 한다. 특히 신약성경과 초기 기독교 지도자들 상당수가 축귀 행위 그 자체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그 대신 ‘진리 전쟁’을 통한 사탄의 세력과의 전쟁에 집중했던 것처럼, 오늘 한국교회 역시 이 점을 가슴 깊이 새겨야 한다. 만약 교회 안에 주술적 행위만 있고 진리에 대한 열정과 책임감이 부재하다면 그런 교회야말로 사탄의 수중에 포획된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특히 유독 가짜뉴스에 취약한 한국교회가 이 소중한 가르침을 놓치면 안 될 것이다.
본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져오신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현실이 어떻게 진리 전쟁을 통해 교회와 신자의 삶에서 구현될 수 있는지에 관심 있는 독자들이라면 반드시 정독해야 할 책이다.
예수의 첫 제자들은 예수가 부활하기 전에는 하나님 나라가 왔음을 선포하도록 임무를 부여받은 것 외에는 축귀에 관한 어떤 구체적인 지시도 받지 않은 것이 거의 확실하다. 그러나 예수가 축귀와 하나님 나라의 도래 사이에 확립한 연결 관계를 고려하면 예수가 부활 전에 제자들을 파송했던 선교에 축귀가 포함된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 축귀자들이 의존한 방법은 그들이 예수를 통해 친숙해져 있었던 마술적·카리스마적인 관행이 아니었다. 그 대신 그들은 다소 더 마술적인 방법을 채택했는데, 이 방법은 그들의 개인적인 힘보다는 외부의 능력-권위를 결부시키는 데 더 의존했다. 그러나 예수의 첫 제자들의 방법과 그 당시에 알려진 마술적인 축귀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예수의 제자들이 고도의 확신을 지니고 있었다고 보고된다는 점 및 그들의 방법이 매우 간결하다는 점인데, 이 두 가지 모두 마술 문헌에서는 일반적으로 발견되지 않는다.
_ 2장 예수와 그 외의 축귀자들
우리가 아마도 축귀를 포함했을 것이라고 논증한 “표적과 기사”라는 표현을 사용한 데서 우리는 축귀의 기능에 대한 바울의 관점의 일면을 본다. 즉 축귀는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자유를 가져다주는 구원의 사건이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의 관점과 비슷한 관점을 발견한다. 사람들을 하나님에게서 떼어놓을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사악한 권세에 대한 바울의 논의에서 이 관점의 또 다른 면이 나타난다(롬 8:38-39). 갈라디아서 3:5을 통해 우리는 바울이 자신의 교회의 교인들이 계속해서 기적을 행할 것을 기대했음을 알 수 있었다. 바울의 사역의 성격을 고려하면 – 비록 그가 교회 안에서 사용될 은사에 대해 논의하는 곳에서는 축귀에 대한 언급이 없지만 – 이러한 기적에는 아마도 축귀가 포함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축귀를 포함해서 기적을 행하는 일을 바울의 사역에서 중요한 것으로 본다면, 바울 서신에서 이 주제에 대한 명백한 관심이 나타나지 않는 데 대한 설명은 아마도 특별한 필요에 따라 쓰인 편지라는 바울 문헌의 특성과 그의 논의의 목적상 그가 은사의 내적인 초점 또는 용도가 무엇이라고 보았는지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즉 (교회와 외부 세계의 관계에 대해서 자주 언급하지 않는) 바울 서신에서 교회 내부의 문제를 다룰 때 축귀에 대한 바울의 언급이, 바울의 사역을 경험하고 세상 안에서 말과 행동으로 하는 사역에 관여했던 이들에게는 아마도 분명하게 이해되었겠지만, 우리에게는 수수께끼 같이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_ 3장 바울 서신
결국 Q는 주로 예수를 하나의 모델로 제시하는 데 중점을 둔 전도에 대한 격려와 설명으로 읽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Q가 예수의 사역에서 축귀를 비교적 적게 보여주고, 그것을 결코 예수의 제자들의 사역의 명시적인 부분으로 묘사하지 않음으로써 예수 운동에서 축귀가 지닌 가치가 낮았음을 반영하고 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Q는 그들이 축귀에 관해 지니고 있던 어려움을 극복하고서, 축귀와 관련해서 축귀의 실제를 보여주고 축귀의 사명을 묘사하는 종말론적 전투에서 축귀의 중요성과 의미를 단언하는 여러 요점을 전달한다.
Q의 독자들은 예수가 사탄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을 통해 능력을 부여받았으며, 그가 이 성령으로 다른 이들에게 세례를 베풀 것이고, 또한 예수와 – 암시 또는 연상에 의해 – 예수의 제자들은 기적적인 능력을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축귀를 포함한 기적을 행할 때 자기들이 하나님께 의존함을 인식해야 한다는 점을 배운다. Q는 축귀를 하나님 나라와 연결하고 하나님 나라를 예수의 제자들의 메시지로 삼을 뿐만 아니라, 추수 비유를 예수의 제자들의 전도와 특히 축귀 모두에 대해 사용함으로써, 축귀의 중요성과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와 함께 종말론적 전투에 참여할 때 축귀도 그들의 사명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바알세불 논쟁에서 독자들은 예수의 축귀(그리고 우리는 예수의 제자들의 축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영에 의해 능력을 부여받은 것만이 아니라는 얘기를 듣는다. 예수와 예수의 제자들의 축귀는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음에 대한 가시적인 표현이기도 하다. 하나님 나라에서 사람들은 마치 적이 지키는 성에서 탈취한 전리품처럼 구원받아서, Q의 또 다른 비유를 사용하자면, 예수의 제자로 수확되거나 모아진다. 실제로 집 없는 귀신 이야기에서 독자들은 축귀가 종말론적인 치유 과정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과정에는 “모으기”가 포함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와 관련된 사람은 전보다 훨씬 더 나빠질 것이다. 축귀의 종말론적 의미는 추수와 모으기라는 전도 비유를 통해서만 전달되는 것이 아니다. 매우 짧은 한 이야기를 통해서 축귀는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귀신을 – 마치 하나님의 적을 쫓아내듯이 – “쫓아내는 것”으로도 묘사된다.
_ 4장 Q
마가의 내러티브를 – 마가가 축귀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을 포함하여 – 그의 독자들에게 해명해줄 해석상의 열쇠는 제자와 제자도라는 주제임을 고려하면, 초기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의 축귀와 관련하여 마가의 메시지가 지닌 여러 측면이 두드러진다. 첫째, 우리의 연구에서 가장 놀라운 결과는 마가가 그의 독자들의 사역에서 축귀를 중요하게 여겼다는 점을 확인한 것이었다. 마가는 주로 축귀를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주님이 재림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행하는 – 심지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사역에서 지배적인 – 중요한 사역으로 묘사함으로써 이 점을 전달한다. 축귀가 그처럼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죽은 자들을 다시 살리는 일보다 덜 중요하거나 덜 기적적이지 않은, 하나님이 말세에 사람들을 구원하겠다고 약속한 그 구원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자면 그들의 축귀를 통해 그들의 자비로운 하나님이 사람들을 종말론적으로 강한 원수에게서 활발하게 구원하고 있다.
둘째, 마가의 관점에서 보면 기독교의 축귀는 성령을 통해 능력을 부여받는다. 비록 적대적인 관찰자들에게는 그것이 항상 명확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실제로 바알세불 논쟁은 축귀 능력-권위의 원천에 대해 길게 논의하면서 마가의 독자들이 성령이 아닌 사탄에게 능력을 부여받았다는 비난에 직면했음을 암시한다. 따라서 우리는 축귀 사역이 교회 안의 두려움과 결부되거나 교회에 동요를 초래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축귀의 실패는 (그들이 받은) 권위의 부재 때문이 아니라 믿음의 부족이나 “예수와 함께” 있지 않음으로 인해 초래된다.
셋째, 마가의 독자들은 귀신을 쫓아낼 때 언제나 예수와 똑같은 기법을 사용할 것으로 기대되지는 않았겠지만, 그들은 예수처럼 신적인 능력으로 귀신의 영향과 대면했을 것이다. 귀신을 쫓아낼 때 그들은 때때로 예수처럼 귀신들에게 밖으로 나오라고 명령할 뿐만 아니라 귀신들을 꾸짖고 그 입을 막기도 했을 것이다. 그들은 필요하면 문제가 되는 귀신의 이름을 사용해서 축귀의 통제력을 얻었을 것이다. 그들은 귀신들을 다른 거주지로 옮기기도 하고, 격지에서 귀신을 쫓아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가는 두 곳에서 예수의 방법을 본받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암시한다. 아마도 마가는 자기 독자들이 항상 축귀에 성공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기도를 옹호하는데(막 9:28-29), 기도는 마가가 기도에 대해 다른 곳에서 한 말에 비춰볼 때 귀신을 향한 – 성령에게 의존하는 – 믿음이 충만한 진술이다. 이어서 미지의 축귀자에 대한 이야기에서 마가는 “예수의 이름으로”(9:38) 귀신을 쫓는 방법을 지지하는데, 이는 축귀를 마치 예수 자신이 행하는 것처럼 수행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서로 달라 보이는 세 가지 축귀 방법 – 예수를 따라 하기, 기도, 예수의 이름을 사용하기 – 은 똑같은 접근법의 여러 측면으로, 즉 마치 예수가 축귀를 행하는 것처럼 귀신들에게 믿음이 충만한 말을 발하는 것으로 밝혀진다.
_ 5장 마가복음
사도행전의 다른 이야기들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누가의 서술상의 결정을 통해 볼 때에도 누가의 관점에서 초기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축귀의 가장 중요한 측면은 그들이 축귀를 시행할 때 예수를 본받거나 예수의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과 축귀는 종말론적인 구원 또는 추수를 가져다주는 예수 자신의 계속되는 활동 – 하나님 자신의 사역 – 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마가복음에서와는 달리 그렇다고 해서 축귀가 기독교 사역의 가장 중요한 측면이 되는 것은 아니다. 축귀는 말씀과 행동을 포함하는 균형 잡힌 접근법의 한 부분이다. 그러나 귀신의 영향은 귀신 들림보다 더 광범위하고 귀신의 영향력에 대한 정복은 단순한 축귀보다 더 광범위하다. 즉 모든 치유는 귀신의 영향력의 패배다.
우리가 방금 논의한 두 이야기 – 바울의 옷과 스게와의 아들들 – 에서 우리는 누가가 예수의 제자들이 그러한 능력을 사용할 수 있었고 그들의 존재만으로도 축귀를 행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우리는 또한 누가가 옷을 – 최소한 거기에 성령이 스며들어 있다면 – 부적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는 사실도 살펴보았다. 이 개념이 21세기의 몇몇 독자에게는 난해할 수도 있겠지만, 이 개념은 귀신의 영향을 강력하고 손쉽게 물리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말하거나 행하는 어떤 것보다도 바로 성령의 임재라는 점을 명백히 보여준다. 동시에 누가는 텍스트를 바탕으로 한 축귀를 책망한다. 누가는 또한 이러한 구원의 표현 또는 구원의 수단을 가져다주는 것과 비용의 지불이 관련이 있었음을 증언한다. 누가는 다양한 종류의 그리스도인 축귀자를 기꺼이 수용하지만 (참조. 눅 9:49-50) 하나님이나 성령에 의해 능력을 부여받지 않은 축귀는 책망한다.
우리는 또한 바울의 “이례적인 기적들” 이야기는 누가가 “사기꾼들과 거짓 예언자들/사도들의 상투적인 수단에 더 가까운 극적인 마술”이자 “초기 교회를 위한 광고로서 ‘기사와 표적’의 무비판적인 과시”로 받아들인 하나의 예로 여겨져왔다는 점도 언급할 수 있다. 우리는 이것이 단지 부분적으로만 사실임을 발견했다. 왜냐하면 스게와의 아들들에 대한 이야기의 문맥에 위치한 바울의 축귀는 그것이 텍스트에 바탕을 두거나 재정적 이익과 관련될 수도 있는 제3자를 통한 능력-권위에 의존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또는 성령으로부터 능력을 부여받았으므로 그 횟수와 성공 및 외견상의 수월함으로 인해 다른 축귀와 구별되기 때문이다.
요컨대 누가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능력-권위에 의해 귀신을 쫓아내는 이교적인 방법을 받아들인 것으로 묘사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들은 예수와 함께 귀신들과 대면했다. 그들은 예수를 그 상황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러나 축귀의 기법이 성공적인 축귀의 열쇠는 아니었다. 성공은 축귀자, 곧 성령으로 충만하고 성령에 의해 능력을 부여받은 사람에게 달려 있었다. 누가에게는 예수의 축귀만이 아니라 교회의 축귀도 사탄과 그의 왕국의 (비록 지속적이지만) 예비적인 패배와 관련이 있었다.
_ 6장 누가-행전
a. 마태복음에 대한 우리의 고찰에서 가장 흥미로운 결과는 1세기의 마지막 수십 년 동안 아마도 안디옥에는 예언 및 기적 행하기와 더불어 축귀를 포함하는 사역을 한 그리스도인 순회 사역자들이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최소한 마태의 관점에서는 그들은 방탕하다고 인식된 삶의 방식으로, 특히 아마도 그들이 제공한 서비스에 대해 돈을 받으면서 공동체를“노략질”하고 있었다.
b. 아마도 이 경험 때문에 다른 두 공관복음 저자들과 비교할 때 초기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축귀에 대한 마태의 견해 중 가장 눈에 띄는 측면은 축귀의 우선순위가 낮다는 점이다. 그러나 우리는 헐처럼 마태가 축귀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축귀가 기독교 전도에서 여전히 중요하기는 하지만 마태복음에서는 축귀가 마가복음에서 차지했던 두드러진 위치를 점하지는 않으며, 누가복음에서와 같이 복음 전파와 균형을 이루지도 않는다. 대신 마태복음에서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사역에서 선포된 말씀이 최고 자리를 차지한다. 그렇기는 하지만 독자들은 마태복음의 끝에서 명령된 가르침에 마태복음에서 그전에 나온 모든 내용이 포함된 것으로 이해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내용에는 축귀가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사역의 일부로 포함되었다.
_ 7장 마태복음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주의 이름으로 병을 고치는 일이 행해졌지만 우리는 야고보가 축귀를 교회 안에 있는 이들을 위한 일로 여겼는지, 교회 밖에 있는 이들을 위한 일로 여겼는지 알 수 없다. 베드로전서에서 우리는 부활한 그리스도를 영들에게 권위를 행사하는 존재로 본다. 히브리서에서 우리는 기적(축귀가 기적에 포함될 가능성이 있다)이 구원의 메시지의 일부로 이해되었다는 사실을 배운다
_ 8장 베드로전서, 히브리서, 야고보서
이 장에서 우리는 요한복음에서는 예수의 사역 전체가 사탄과의 전투라는 특징을 지닌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 전투는 철저하게 재해석된다. 요한복음에서 전투가 벌어질 때 예수는 사탄을 실성했거나 미친 소수의 사람 안에 있는 귀신의 형태로 대면하지 않는다. 그 대신 예수는 거짓의 아비의 부추김을 받아(요 8:44) 예수의 가르침에서 계시된 진리와 예수의 기적에서 계시된 그의 영광을 보기를 거부하는 모든 이들의 불신에 직면한다. 그들은 예수를 영접하는 순간 진리를 알고 거짓의 아비에게서 해방된다(참조. 8:31-32, 44). 사탄과 싸우고 사탄을 물리치는 법에 대한 이와 같은 재해석으로 미루어볼 때 마가복음과 친숙한 독자들이 요한복음이나 다른 어떤 요한 문헌이 축귀를 격려하는 것으로 볼 가능성은 별로 없다. 사실 예수의 사역에 대한 요한의 관점과 그에 수반되는 세계관도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축귀의 부재와 관련해서 다른 기독교 문헌의 관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 주제는 이 연구의 제3부에서 탐구할 것이다.
_ 9장 요한의 기독교
축귀에 대한 관심의 결여에 비추어 「클레멘스 1서」 저자가 공관복음 전승을 알고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이 서신이 공관복음 전승을 여러 번 넌지시 언급하고 아마도 이를 두 번 인용하는 것으로 보아 그가 현재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에서 발견되는 전승을 알았을 가능성이 있다. 요한복음에 대한 암시 – (모두 언어적으로 일치되지 않는다) – 는 아마도 클레멘스가 요한복음을 알지 못했음을 의미할 것이다. 그 대신 요한 문헌의 일부가 된 개념들과 표현들은 클레멘스의 신학에 영향을 끼쳤다. 따라서 우리는 클레멘스가 정경의 일부가 된 전승은 알고 있었지만 축귀에 대한 강조를 포함하여 전해 내려온 이런 전승들이 기독교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고 추정할 수 있다. 특히 클레멘스는 공관복음 전승에서 발견되는 전도와 축귀 사이의 관련성을 완전히 무시했다. 대신 그는 전도를 설교와 가르침으로 보는 기독교를 반영한다. 환자 치유를 격려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전도의 맥락에서 일어나지는 않는다.
_ 10장 교부들, 변증가들 및 2세기 초반의 문헌들
마가복음의 더 긴 결말에 대한 우리의 논의가 증거를 합리적으로 반영하고 있다면 우리는 이 자료에서 2세기 전반에 로마의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축귀가 차지한 중요한 위치를 엿볼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행한 축귀는 마치 예수가 친히 – 아마도 그의 성령을 통해 이루어지는 일로 이해되는 – 축귀를 행하는 것과 같다는 견해를 유지했다(참조. 막 9:37-41). 우리는 이러한 성령론적인 기독교는 그 “일” 또는 “은사”에 축귀를 포함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더 넓게 말하자면 그들이 축귀를 행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 들의 (“정통적인”?) 믿음에 대한 증거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메시지에 수반하는 기적을 통해 그들의 메시지가 하나님께 인정받은 진실한 것이었음을 보여주었다.
_ 11장 마가복음의 더 긴 결말과 2세기 후반의 문헌들
우리가 초기 비판자들에게서 얻은 단편적인 정보들을 가지고 판단하자면 기독교는 축귀를 포함한 기적이라는 측면에서 언급할 만한 충분한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좀 더 중요한 이후의 비판자 세 명은 2세기 말의 기독교가 축귀와 관련해서 어떻게 인식되었는지를 파악하는 데 특히 도움이 된다. 알렉산드리아에서의 경험에 큰 영향을 받은 듯한 정보를 지닌 켈수스에게서 알 수 있는 내용에 비춰보면 우리는 2세기 말에 그 도시의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축귀가 주술서, 야만인의 이름들, 이익을 위해 축귀를 행하면서 최소한 입김을 불어 넣는 행위를 포함한 의식 등 다른 사람들의 축귀와 구별할 수 없었다는 점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루키아노스에게서 우리는 그가 그리스도인들을 아마도 축귀를 포함하는 기적들에 특별한 관심을 가진 사람들로 간주했을 것이라는 점을 알게 되었는데, 우리는 그가 알았던 이집트의 기독교는 축귀에 관여함으로써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인상을 남겼을 것이라는 점만 알 수 있다. 우리는 또한 조금 전에 갈레노스의 관점에서 볼 때 기독교 – 최소한 상류 사회에 속한 이들 – 는 기적이나 축귀에 명백한 관심이 없었을 것이라는 점을 살펴보았다.
_ 12장 기독교 비판자들
이 연구는 역사 연구 – 신약성경 문헌에 의해 대변된 초기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의 축귀의 위상과 관행에 관해 명백히 상충하는 자료를 이해하려는 시도 – 였다. 내가 독자들로 하여금 외관상 무질서해 보이는 자료를 적절한 관점에서 볼 수 있게 하는 데 성공했다면 마가복음에 반영된 이들과 같은 몇몇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축귀를 예수뿐만 아니라 예수와 그들 자신의 전도에 대한 이해에 매우 중요한 요소로 받아들였다는 점이 분명해질 것이다. 요한복음에 반영된 이들과 같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요한복음에서는 귀신 들림을 한 사람 안에 있는 악의 존재를 묘사하기 위한 하나의 범주로 유지하기는 했지만 축귀를 그것에 대한 적절한 반응으로 보지는 않았다. 2세기 문헌이라는 렌즈는 몇몇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 훗날 신약 정경에서 공관복음에 주어진 지위로 인해 특권을 부여받은 – 마가복음과 같은 관점을 제쳐두었다는 사실을 더 예리하게 부각시켰다. 그들은 예수의 최초 제자들 및 최초의 해석자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귀신의 세력 및 예수에 대한 전승에 반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개괄적으로 말해서 그들은 예수를 본받아 예수가 행한 대로 또는 (마치 예수가 축귀자인 것처럼)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의 세력과 대결하는 대신 진리로써 (오류로 이해된) 귀신의 세력에 맞섰다. 마태가 대변한 이들과 같이 이 두 극단 사이에 있었던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좀 더 신중했다.
우리는 신약성경 자료에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광기(狂氣)나 기만으로 표현된 악이 신과 대면하게 된다는 데 동의하리라는 점을 관찰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오늘날의 교회는 초기 교회의 예를 따라 귀신을 무시하지 말고 귀신을 물리친 예수께 주의를 집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귀신에 대한 지나친 관심과 관여는 종종 스스로를 귀신의 영향에 노출시키는 것으로 여겨져왔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The Screwtape Letters) 서문에 나오는 C. S. 루이스의 유
명한 구절은 여기서 다시 음미해볼 만하다.
우리 인류가 귀신에 관해서 빠질 수 있는 동등하면서도 상반되는 두 가지 오류가 있다. 하나는 그들의 존재를 불신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귀신들의 존재를 믿고, 그것들에 대해 과도하고 불건전한 흥미를 느끼는 것이다. 귀신들은 이 두 가지 오류에 똑같이 즐거워하며 유물론자든 마술사든 똑같이 기뻐하며 환영한다.
칼 바르트도 그리스도인과 신학자는 “[귀신에] 많은 시간을 소비하거나 너무 깊이 몰두하지 말아야 한다.…그렇게 하다가 우리 자신이 다소간 귀신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위험이 임박해지기 때문이다”라는 비슷한 경고를 했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는 목회적으로 가능하면 귀신의 영향에 관심을 덜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목회적으로 필요할 경우 귀신의 영향과 가급적 많이 대결해야 한다.
_ 13장 결론과 우리 시대를 위한 결말
1부_ 예수와 축귀 문제
1. 축귀 문제
2. 예수와 그 외의 축귀자들
2부_ 1세기
3. 바울 서신
4. Q
5. 마가복음
6. 누가-행전
7. 마태복음
8. 베드로전서, 히브리서 그리고 야고보서
9. 요한의 기독교
3부_ 2세기
10. 교부, 변증가 그리고 2세기 전반의 문헌들
11. 마가복음의 더 긴 결말과 2세기 후반의 문헌들
12. 기독교 비판자들
4부_ 초기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의 축귀
13. 결론과 우리 시대를 위한 결말
참고문헌
고대 문헌 색인
저자는 축귀가 시대별로 다양하게 – 긍정적으로, 부정적으로, 또는 무관심하게 – 받아들여져왔음을 발견하고 우리 시대를 위해 조심스럽게 신학적·목회적 제안을 한다. 귀신론에 대한 과도한 집중을 경계하고 귀신을 물리친 예수께 주의를 집중하라는 저자의 권고를 귀담아들어야 하리라. 꼼꼼한 독서를 요구하는 학문적 연구서일 뿐 아니라 이른바 영적 문제에 편향된 시각을 지닌 일부 한국 교회의 목회자들과 신학생들에게 일침을 가하는 매우 시의적절한 도전이다.
– 류호준, 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 은퇴 교수
공관복음서와 바울 서신을 포함한 관련 텍스트와 함께 교부들과 이교의 저술가들까지 면밀하게 조명하는 본서는 축귀 연구의 나침반이자 최고의 교본으로 적격이다. ‘예수 이름으로’ 귀신과 맞선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실천처럼 ‘예수께 집중하라’는 저자의 논평을 독자들은 가볍게 봐선 안 될 것이다. 본서는 영적 전쟁과 귀신 축출에 관심을 가진 독자들에게 유용하며, 특히 설교자들과 신학대학원생의 필독서로 적합하다.
– 윤철원, 서울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신약학 교수
트웰프트리 박사는 신학적인 측면에서 신약의 축귀 사역에 관한 한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학자다. 예수님을 따라한 초기 교회는 과연 어떤 방식으로 축귀사역을 했을까? 본서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토론으로 독자를 초대한다.
– 이민규, 한국성서대학교 신학대학원 신약학 교수
본서는 예수의 축귀에서 시작하여 Q 자료, 바울, 마가복음, 누가복음-사도행전, 마태복음, 그 밖에 일반 서신과 요한계시록 등의 해당 자료를 포함할 뿐 아니라, 2세기 교부 시대 자료까지 섭렵하면서 그 연대기적 궤적 가운데 축귀 활동이 수행되거나 신학화되어간 전승사를 광범위하게 추적하고 밀도있게 분석한다. 본서의 최대 장점과 최고 미덕은 그 일련의 전개 과정에서 축귀에 대한 관심 정도와 이해 방식이 단일하기보다 다양하며 역동적이었다는 점을 밝혀낸 것이고, 이로써 신약성서 및 관련 문헌의 낱개 텍스트에 드러난 축귀 인식의 개별적 고유성을 포착해낸 점이다.
– 차정식, 한일장신대학교 신약학 교수, 한국신약학회 회장
박사학위 과정 때부터 20년 넘게 줄곧 이 주제 연구에 천착해 온 트웰프트리는 단연 ‘축귀 연구 분야의 챔피언’이다. 신약성서적 토대 위에서 역사상황적 문맥을 섬세하게 헤아린 저자의 읽기는 분석적 논증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정직한 해석에 따른 이해와 적용은 악한 영(들)에 대한 양 극단의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겸손의 허리띠를 한 번 더 동이도록 요청한다. 축귀라는 렌즈를 통해 역사적 예수 또는 기독론 이해로까지 신학적 지평이 넓혀질 수 있음은 이 책에 감춰진 또 하나의 보화와도 같다.
– 허주,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신약학 교수
지난 20년 동안 그레이엄 트웰프트리는 축귀라는 문제를 면밀히 연구해왔다. 영감을 자극하고 은혜로운 도전을 주는 본서는 이 분야를 연구하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필독서다.
– 리키 와츠, 리젠트 칼리지
그레이엄 트웰프트리는 축귀자이자 기적을 일으키는 자로서의 예수에 대한 그의 신중하고 까다로울 만큼 상세한 연구로 당대 최고 수준의 몇 편의 논문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입증했다. 이보다 나은 연구는 없으며 심지어 이와 필적할 만한 연구도 없다. 이 연구는 앞으로 한 세대 동안 이와 관련된 연구를 지배할 것이다.
– 막스 터너, 런던 신학교
이례적일 만큼 충분한 연구를 바탕으로 쓰인 본서는 영적 전쟁이라는 주제에 관심이 있는 이들뿐만 아니라 성서학자들에게도 필수불가결한 자료가 될 것이다.
– 클린턴 E. 아놀드, 탤보트 신학교
이 탁월한 문헌에서 그레이엄 트웰프트리는 초기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축귀의 위상과 실제를 묘사한다. 그의 균형 있고 통찰력 있는 연구는 학자들과 학생들에게 엄청난 가치가 있을 것이다.
– 폴 트레빌코, 오타고 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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