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는 생산을 욕망의 내재적 원리라고 부른다. 이것은 욕망이 근본적으로 창조력임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의 욕망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바 얻지 못한 것에 대한 욕망이 아니다. 들뢰즈에게 욕망은 그런 것이 아니다. 실재가 지닌 운동력은 부족, 부재, 결핍이 아니며, 갖지 못한 것에 대한 갈망에서 발생하는 욕망이 아니다. 따라서 욕망은 소유 혹은 소유하려는 충동과 관련된 것이 아니다. 욕망은 또한 결핍을 채우거나 쾌락을 추구하는 문제도 아니다.
p.60
푸코는 어떻게 자본주의가 국가의 규율 능력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사회적, 시민적 삶에서 개인적, 가족적 삶에 이르는 삶의 모든 차원에서 작동하는 사목 권력을 통해서 욕망을 규율하여 시장을 위한 생산의 공리계에 종속시키는지를 해명해 준다. 그 결과로, 우리는 자유를 통해 통치된다. 자본주의는 욕망을 탈영토화하면서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나는 때는 바로 자본주의가 욕망을 재영토화하고 우리의 욕망을 시장의 필요에 순응하도록 조치할 때이다.
p.105
대안의 문제는 경제 이론과 인간 상상력의 문제가 아니라 고백의 문제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짓는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받는 어떤 것이다. 신성한 경제는 우리 노동의 산물이 아니라 그 대신에 선물이다. 이 모두가 말해 주는 것은 자본주의의 대안은 우리가 건설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이 지금 여기서 행하고 있다고 고백하는 어떤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논변은 고려할 가치가 없다. 관심을 끌었던 문제는 결코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가 아니었다. 오히려 하나님은 무엇을 하는지였다.
p.169
기독교의 베풂은 선물을 교환하는 순환의 일부이다. 결국, 그것은 친교를 갱신하도록 의도된 실천이다. 따라서 물질적 수단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없는 사람들에게 줄지라도 없는 사람들은 그런데도 줄 게 많이 있는 셈이다. 이런 경우에 빈궁한 사람들은 부유한 이를 위해 기도할지도 모른다. 이것은 실로 아주 큰 선물이다. 왜냐하면, 성경이 지적하는 대로 하나님은 가련하고 궁핍한 사람들의 외침을 들어주기 때문이다(사 41:17). 빈궁한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은 진정한 부를 받을 기회가 된다(눅 16:11).
p.207
자비 사역이 경제의 체계적 생산적 차원을 설명하는 방식은 육체적 사역으로 다해지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그 방식은 역시 영성적 자비 사역에서도 명백하다. 영성적 자비 사역은 비록 육체적 사역처럼 사사화된다는 의혹을 받지만, 지식 없는 사람들을 가르치고 죄수들을 교정하는 것과 같은 실천들은 확실히 경제 체제의 형태에 영향을 주는 사람들을 다루는 기독교인을 필요로 할 수 있고 또한 필요로 해야 한다.
p.2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