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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1월 26일 출간
ISBN | 9788954675987(89546759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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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 236쪽 |
크기 | 135 * 197 * 24 mm /320g |
이 책의 원서/번역서 | 一人稱單數/村上春樹/著 |
첫 장편소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부터 최근작 《기사단장 죽이기》까지,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세계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일인칭 화자의 정체성과 그 역할이다. 일정한 세계관을 공유하는 하루키 월드 속의 ‘나’는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며 다양한 인간관계를 맺는 한편으로 비현실적인 매개체를 통해 저도 모르는 사이 미지의 세계에 발을 들이고, 그와 함께 읽는 이들을 깊은 우물과도 같은 내면으로 끌어들인다. 학생운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대학 생활을 보내고 재즈와 클래식을 영감의 원천으로 삼아온 작가의 라이프스타일을 익히 알고 있는 독자들에게 몇몇 작품은 자전적인 이야기로 보이기도 하고, 취미생활에 대한 애정을 담담하게 서술하는 글은 단편소설이라기보다 에세이에 가깝게 읽힌다. 《여자 없는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비슷한 듯 다른 소재의 이야기를 아우르며 책을 끝맺는 표제작은 짧고도 강렬하다.
우리의 육체는 돌이킬 수 없이 시시각각 소멸을 향해 나아간다.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떠보면 많은 것이 이미 사라져버렸음을 깨닫는다. 강한 밤바람에 휩쓸려, 그것들은-확실한 이름이 있는 것이나 그렇지 않은 것이나-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어딘가로 날아가버렸다. 뒤에 남는 것은 사소한 기억뿐이다. _「돌베개에」, 24쪽
“우리 인생에는 가끔 그런 일이 일어나. 설명이 안 되고 이치에도 맞지 않는, 그렇지만 마음만은 지독히 흐트러지는 사건이. 그런 때는 아무 생각 말고, 고민도 하지 말고, 그저 눈을 감고 지나가게 두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커다란 파도 밑을 빠져나갈 때처럼.” _「크림」, 48~49쪽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이 영혼 깊숙한 곳의 핵심까지 가닿는 음악이었다는 것이다. 듣기 전과 들은 후에 몸의 구조가 조금은 달라진 듯 느껴지는 음악-그런 음악이 세상에는 분명히 존재하는 법이다. _「찰리 파커 플레이즈 보사노바」, 67쪽
팝송이 가장 깊숙이, 착실하고 자연스럽게 마음에 스미는 시절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정말로 그런지도 모른다. 혹은 그렇지 않은지도 모른다. 팝송은 그래봐야 그저 팝송일 뿐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은 결국, 그저 요란하게 꾸민 소모품일 뿐인지도 모른다. _「위드 더 비틀스」, 87쪽
그렇다, 인생은 이기는 때보다 지는 때가 더 많다. 그리고 인생의 진정한 지혜는 ‘어떻게 상대를 이기는가’가 아니라 오히려 ‘어떻게 잘 지는가’하는 데서 나온다. _「『야쿠르트 스왈로즈 시집』」, 131쪽
그것들은 사사로운 내 인생에서 일어난 한 쌍의 작은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 와서 보면 약간 길을 돌아간 정도의 에피소드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해도 내 인생은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기억들은 어느 날, 아마도 멀고 긴 통로를 지나, 내가 있는 곳을 찾아온다. 그리고 내 마음을 신기할 정도로 강하게 뒤흔든다. 숲의 나뭇잎을 휘감아올리고, 억새밭을 한꺼번에 눕혀버리고, 집집의 문을 거세게 두드리고 지나가는 가을 끄트머리의 밤바람처럼. _「사육제」, 181쪽
“하지만 설령 사랑이 사라져도, 사랑을 이루지 못한다 해도, 내가 누군가를 사랑했다, 연모했다는 기억은 변함없이 간직할 수 있습니다. 그것 또한 우리에게 귀중한 열원이 됩니다. 만약 그런 열원이 없다면 사람의 마음은-그리고 원숭이의 마음도-풀 한 포기 없는 혹한의 황야가 되고 말겠지요. 그 대지에는 온종일 해가 비치지 않고, 안녕安寧이라는 풀꽃도, 희망이라는 수목도 자라지 않겠지요.” _「시나가와 원숭이의 고백」, 203쪽
지금까지 내 인생에는-아마 대개의 인생이 그러하듯이-중요한 분기점이 몇 곳 있었다. 오른쪽이나 왼쪽, 어느 쪽으로든 갈 수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오른쪽을 선택하거나 왼쪽을 선택했다. (……) 그렇게 나는 지금 여기 있다. 여기 이렇게, 일인칭 단수의 나로서 실재한다. 만약 한 번이라도 다른 방향을 선택했더라면 지금의 나는 아마 여기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거울에 비친 사람은 대체 누구일까? _「일인칭 단수」, 223~2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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