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통독과 성서 지리에 관심을 두고 《성경》을 연구하면서 예수의 족보와 성경 지도를 만들 정도로 이스라엘에 특별한 관심을 두었던 저자는 그 후에도 성서 속의 도시 이야기의 내용으로 여러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이러한 결실로 《성지행전》이 출간되게 되었다. 한 분야에 몰입하기는 쉽지 않다. 저자는 이스라엘,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이끄셨던 루트를 연구하고 65회 정도 현지를 찾아 그 길을 찾기 위해 많은 해를 보냈다. 출입이 제한된 금지 구역과 신변의 위험, 불편한 교통을 마다치 않고 다녔다.
《성경》은 기록한 연대와 장소 그리고 당시의 풍습을 생각하며 읽어야 이해하기 쉽고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정확히 알 수 있다. 그런데 《성경》은 사건과 그 사건을 기록한 시기가 달라 이해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다. 이 문제를 《성지행전》이 해결해 주고 있다.
《성지행전》 구약 편에서는 아담과 하와가 살았던 에덴동산으로부터 족장시대, 출애굽과 광야방랑시대, 가나안 정복시대, 사사시대, 통일왕국시대, 분열왕국시대, 포로 · 귀환 · 중간시대의 주요 지역과 장소를 직접 답사하여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성경》을 읽으면서 이해할 수 없었던 부분을 쉽게 알 수 있으며 또한 하나님의 백성의 삶과 하나님의 숨결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 현지에서 말씀을 묵상했을 때 하나님이 저자에게 주신 놀라운 은혜를 읽는 독자는 같이 맘속으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세우시고, 부르시고, 만나신 역사의 땅을 찾아서 가다
하나님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만드셔서 에덴동산에서 살게 하셨다. 그곳은 하나님과 영적 교제가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만든 짐승과도 대화하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하지만 이런 에덴동산은 노아의 홍수 후에 이 땅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이 에덴동산의 위치를 둘러싸고 여러 곳이 제기되고 있다. 이집트의 백나일 강과 청나일 강을 말하지만, 《성경》에서 언급하는 유프라테스 강과는 일치하지 않는 곳이다. 오늘날은 반 호수를 에덴동산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반 호수는 터키 동부 아라랏 산 남쪽에 자리하고 있다. 반 호수는 해발 1,646미터 높이의 고지대에 있는 면적 3,765제곱킬로미터, 호수변 길이가 430킬로미터나 되는 바다 같은 호수이다.
고고학자 론 와이어트와 데이비드 파솔드 교수가 발견하여 주장하는 방주 모양의 화석 자국이 있다. 이는 마샤르 마을에 있다. 조사한 바로는 그 길이가 《성경》에 기록된 방주의 길이 300규빗(약 135미터)과 거의 일치한다. 그러나 넓이는 49미터로 《성경》의 기록의 50규빗(약 22.5미터)과는 차이가 있다.
아브라함이 살았던 우르에서 하란까지는 지금의 도로 기준으로 1,100킬로미터가 넘는다. 이 길을 대가족이 가축을 이끌고 쉬지 않고 하루에 10킬로미터를 간다 해도 110일이나 걸린다. 게다가 가축, 특히 양은 하루에 심하게 몰수가 없고, 장막을 치고 걷었다 하기도 결코 쉽지 않기 때문에 하란까지는 족히 수개월에서 몇 년까지 걸렸을 것이다.
하나님의 손길은 곳곳마다 있었다. 사막, 바다, 광야 등 안 미친 곳이 없다. 그런 곳에서 하나님의 생생한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역사의 땅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보다
하나님 나라로 향해 가는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천국 가는 길은 오직 한 길, 예수 그리스도가 열어 놓은 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가라하시면 가고, 서라 하시면 서야 한다. 아무리 좁고 힘든 길이라 해도 선한 목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가야 한다. 그 길만이 우리가 구원을 얻는 길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을 향해 가는 여정지에 에시온게벨이 있다. 그 길을 찾아가는 것은 쉽지 않다. 허가증을 받고 군 차량으로 유적지로 들어갈 수 있었다. 순간 감격스러운 마음이 요동쳤다. 작은 텔 유적으로 남아 있는 에시온게벨은 안내판과 함께 철조망으로 둘려 있었고, 뒤로는 이스라엘의 에일라트 도시가 가까이 보였다. 지금은 홍해에서 내륙으로 2~3킬로미터 들어와 있지만, 솔로몬 당시에는 두로 왕과 합작해 배를 건조하던 항구였다.
광야생활을 마치고 20세 이상의 이스라엘 백성이 출발한 세렛 시내를 찾았다. 세렛 시내는 동쪽에서 사해 최남단으로 이어지는 긴 계곡으로 사해와 가까울수록 계곡은 깊어진다. 버드나무 시내로도 불린 이 계곡은 예부터 남쪽의 에돔과 북쪽 모압과 자연 경계를 이룬 곳이다. 40년 광야생활 동안 훈련을 이기지 못하고 오직 여호수와 갈렘 그리고 광야에서 자라난 새 세대만이 이곳 세렛 시내에서 가나안을 향해 북진하지 않았던가.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행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본다.
훗날 여호수아는 죽음을 앞두고 저주와 축복의 두 산 사이에 있는 세겜에서 언약의 돌비를 세우고 이렇게 부탁했다.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여호수아 24:14~15) 오늘도 우리 앞에는 축복과 저주가 놓여 있다. 그 갈림길에서 방황하는 자를 향해 저주를 끊고 축복의 자리에 서게 하는 것이 이 성지에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아닌가.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변치 않으며, 하나님과 함께하는 자는 하나님의 기적을 본다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마음에 합한 자라는 칭찬을 받았다. 사무엘에게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으며, 골리앗을 죽이고 이스라엘을 구한 이스라엘의 영웅으로 불렸다. 그러나 그 일 때문에 그는 사울에게 쫓겨 이방 땅 블레셋으로 와서 미치광이 흉내까지 내야 했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도피했던 아둘람 굴이 있다. 아둘람 공원에서 약간 경사진 곳을 보니 굴이 하나보였다. 과거의 다윗이 숨었던 굴은 아니지만 약 10명 정도 간신히 몸을 숨길 수 있는 굴속에 사울을 피해 머물렀던 다윗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하지만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다”(시편 57편) 이처럼 하나님이 숨겨 주시는 자는 결코 사람이 찾을 수 없다. 이는 의로운 자를 하나님이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다니엘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왔을 때 말씀을 내려놓지 않았다. 그런 그를 하나님은 느부갓네살 왕 때 총리가 되게 하셨고, 다리오가 62세에 왕위에 올랐을 때 고관 120명 위에서 나라를 다스리는 총리 중 한 명으로 여전히 그 자리를 유지했다. 그는 포로 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을 잊지 않았으며, 죽을 수 있는 위험한 자리에서도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신앙을 유지했다. 다니엘의 무덤은 수산에 있다. 오늘날 《성경》에서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이란 지역의 성지는 수산과 악메다 두 곳 뿐이다. 수산은 선사시대에서 페르시아 제국에 이르기까지 이란 문명의 정치 · 경제 중심이었던 고대 도시이다. 그의 무덤에서 생각하게 하는 것은 나라를 잃고 왕족 소년으로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가 죽을 때까지 하나님을 향한 사랑, 정권이 바뀌는 가운데서도 변함없는 신앙을 유지한 사실, 죽을 줄 알면서도 하나님에게만 기도하고 고국에 돌아올 수 있었음에도 바벨론에 남아 동족을 격려했던 그의 모습은 정말로 아름다웠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사랑하신다. 그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나아갈 때 하나님은 반드시 기적을 베푸신다. 이것을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에서 볼 수 있다.
세상의 모든 좋은 조건은 오히려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반면 세상의 조건이 더 좋지 못한 상황에 부딪힐수록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절대적인 믿음으로 이끈다.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했다. 더욱이 그들은 하늘 꼭대기에 닿기까지 탑을 쌓으려 했다. 이는 자신들을 위해 이름을 내고 땅에서 흩어지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 지역은 지금도 땅 표면 곳곳에 역청 덩어리가 남아 있다. 조금이라도 더 높이 탑을 쌓으려는 그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오늘 우리 삶 속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세상의 권력, 물질, 명예와 같은 욕심의 탑을 더 높이 쌓으려고 하지는 않는지 생각해 보았다.
– <믿음의 탑을 쌓는 마음으로> 중에서 p. 33~41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할 것을 축복해 주셨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100세 때 실질적인 약속의 아들 이삭을 주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삭이 청소년기에 접어들었을 즈음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드리라는 명령을 내리셨다. 왜 하나님은 그토록 어려운 시험을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셨을까? 이 질문에 해답을 준 것은 하나의 부조 그림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많은 화가와 조각가는 아브라함이 손에 칼을 들고 이삭을 바치는 모습을 천사가 그 칼끝을 붙잡고 있는 모습으로 조각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그의 전부였다. 그렇기에 그를 번제로 드리는 것은 모든 희망이 사라지는 것이며 동시에 절대 절망이었다. 그런데 그 절대 절망이라고 생각했던 손에 들린 칼끝을 하나님이 붙잡고 계셨던 것이다.
– <하나님의 시험장으로 가는 길> 중에서 p. 81~87
아브로나를 떠나 다음으로 진을 친 곳은 에시온게벨이었다. 에시온게벨은 오늘날 아카바 만 위쪽에 자리한 요르단 쪽 항구로 구약시대에는 제련소가 있던 곳이다. 요르단과 이스라엘 국경선에 있어서 일반인은 방문 전에 허락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허락을 받고 타바 국경을 통해 이스라엘을 거쳐 오르단에 들어갔다. 답사 허가증을 보여 주자 기관단총을 장착한 군 차량은 우리를 앞서 유적지로 안내했다. 순간 감격스러운 마음이 요동쳤다. 얼마나 오고 싶어했던 곳인가. 마치 보물을 찾은 기분이었다.
– <약속의 땅을 코앞에 두고> 중에서 p. 206~215
텔 베이트 미르심은 발굴 결과 BC 23~21세기에 처음으로 주민이 거주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중기 청동기시대 1기에는 인구 밀도가 낮은 한적한 지역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이때 아브라함이 이 지역에 들어왔을 가능성이 있다. 특히 BC 13세기 말 이스라엘의 가나안 점령 때 이 땅을 정복한 것으로 추정되며, 당시 재가 90센티미터 쌓였던 것으로 보아 무서운 재난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재난 직후 이스라엘이 재건했지만 BC 12세기에는 블레셋의 영향권에 들어갔다. 이 땅은 유다와 시므온 두 지파의 연합으로 정복한 땅이다. 그들에게 이 땅은 생명과 같은 곳이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는 말씀처럼 우리는 무엇을 위해 생명을 건 싸움을 할 것인가? 영원한 생명을 위해 서라면 어차피 죽어야 할 생명을 기꺼이 주를 위해 바칠 수 있을 것이다.
– <생명을 건 품앗이> 중에서 p. 325~329
엔게디는 성지 순례 시 빠지지 않고 들르는 곳이다. 그러나 보통은 일정상 폭포가 있는 계곡까지는 가지 못하고 전망대에서 전경을 보는 것으로 그친다. 엔게디는 BC 3000년 전부터 사람이 살았던 유적이 남아 있고, 실제로는 그보다 이전인 청동기시대(BC 5000)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의 신전과 제단 유적이 엔게디 샘 위에 세워졌으며 물과 관련된 의식이 이 신전에서 행해진 증거가 있다. 엔게디를 자세히 보기 위해 엔게디 국립공원 주차장에 차를 세워 놓고 표를 구입해 들어갔다. 유대 광야에 어떻게 이런 곳이 있을까 할 정도로 나무 숲이 주위를 두르고 있었다. 오른쪽 계곡으로는 여름철에도 유대 광야에서 솟아나온 물이 흘러 산양이 자유롭게 풀을 뜯고 물을 마시고 있었다.
– <하나님이 숨기시면> 중에서 p. 366~380
여로보암이 세웠다는 단에 있는 산당 터를 찾았다. 단의 본래 이름은 레셈 또는 라이스였는데 남쪽 소라 근방에 살던 단 지파가 북으로 올라와 이곳을 점령하고 단이라고 개명했다. 이곳은 예루살렘 북쪽 약 223킬로미터 지점에 있다. 입구로 들어가자마자 엄청난 양의 물이 계곡으로 흘러내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은 반 이상이 광야와 사막으로 이루어진 나라인데도 단 지역은 온통 숲과 나무로 덮여 있어 많은 유대인이 휴양지로 즐겨 찾는다. 더구나 이스라엘서는 상상하지도 못할 만큼 많은 양의 물이 흘러내리는 모습을 보면 모두가 탄성을 자아낸다. 그러나 여로보암은 정치적 권력만 유지하기 위한 삶을 살았다.
– <여로보암의 길> 중에서 p. 404~410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이 강이 되어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물 치는 곳이 되리라는 말은 물고기가 살지 못하는 죽은 바다가 성전에서 나온 물을 통해 물고기가 사는 살아 있는 바다가 된다는 말이다. 여기서 물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풍성한 영적 출복을 상징하며, 그 물이 닿는 곳마다 생명력이 넘침을 말한다. 오늘날 사해는 물고기가 살지 못하는 바다이다. 그러나 사해 옆에인 파스카는 최근 이스라엘 정부에서 지하에서 솟아나는 민물을 이용해 에덴동산의 꿈을 가지고 개발하고 있다. 이제는 기초적인 개발이 끝나 많은 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고 물고기가 살고 새가 날아드는 곳이 되었다. 그리고 2006년부터는 민물 수영장을 개장해 운영하는 곳이 있다. 우리나라를 생각하면 아주 작고 초라한 수영장이지만 물이 귀한 이스라엘에서 야외 민물 수영장은 어린이나 어른 모두에게 아주 귀한 것이다.
– <죽은 바다가 살아나듯이> 중에서 p. 444~449
1장 약속의 땅을 찾아가는 길
에덴동산을 꿈꾸며 _ 반 호수
파괴된 삶의 현장 _ 에덴의 동쪽
배는 물 위에 떠 있어야 _ 아라랏 산
믿음의 탑을 쌓는 마음으로 _ 바벨탑 건설지
약속의 땅을 찾아가는 길 _ 우르
약속의 땅에도 기근이 _ 세겜과 하란
하나님인가, 세상 땅인가 _ 소돔과 소알
미래를 심는 자 _ 브엘세바의 에셀나무 아래에서
하나님의 시험장으로 가는 길 _ 모리아 산
양보는 축복의 지경을 넓힌다 _ 그랄
이곳에도 하나님이 _ 벧엘
2장 고난은 축복을 담는 그릇
아들과 아버지의 싸움 _ 얍복 강과 브니엘
다시 가나안 땅을 향해 _ 아담읍, 세겜, 라헬의 무덤
꿈은 이루어진다 _ 도단
고난은 축복을 담는 그릇 _ 고센
바다 밑에 길을 준비한 하나님 _ 마라
광야에도 오아시는 있다 _ 신 광야 엘림
손을 들면 이기는 싸움 _ 르비딤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길 _ 시내 산
탐욕의 끝은 죽음 _ 다베라와 기브롯 핫다아와
비방은 신앙의 성장을 멈추게 한다 _ 하세롯
3장 새 부대로 정복에 나서며
약속의 땅을 코앞에 두고 _ 하세롯 이후 여정지
차라리 그 땅을 안 보았더라면 _ 가데스 바네아
금한 길은 가지 말아야 _ 아랏과 호르마
새 부대로 정복에 나서며 _ 세렛 시내
하나님이 축복하면 누가 저주하랴 _ 브돌
마지막 실패자 _ 모압 평지의 아벨싯딤
여기가 좋사오니 _ 르우벤과 갓 지파
영적 시야를 넓혀라 _ 느보 산과 벧브올
마지막 열한 번째 시험 _ 요르단 강과 아담읍
전쟁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니 _ 여리고와 아이
축복과 저주의 갈림길 _ 그리심 산과 에발 산
4장 광야를 지나 약속의 땅으로
지혜로운 속임수 _ 기브온
누가 나를 위해 싸우나 _ 벧호론과 아얄론
제비는 사람이, 결과는 하나님에게 _ 실로
여호와만이 참된 피난처 _ 도피성
지도자의 마지막 부탁 _ 언약의 돌비
생명을 건 품앗이 _ 유다와 시므온의 동맹
광야의 때를 잊지 마라 _ 하롯 샘
믿음의 자리를 지켜야 _ 나오미의 들판
자신을 드리는 제사 _ 법궤의 이동로
여기까지 도우신 하나님 _ 에벤에셀
하나님의 뜻대로 구해야 _ 기브아
5장 주님 가신 그 길을 따라
하나님이 숨기시면 _ 다윗의 도피처
아들의 반역에 우는 아버지 _ 마하나임
인생은 마지막이 승부수 _ 솔로몬의 후궁 터
여로보암의 길 _ 단과 산당 터
마중물의 기적 _ 디셉, 사르밧, 갈멜 산
로뎀나무 아래서 _ 브엘세바와 호렙 산
길이 험할수록 정산은 가깝다 _ 엘리야 승천 여정
니느웨냐, 다시스냐 _ 욥바와 니느웨
죽은 바다가 살아나듯이 _ 에네글라임
시대를 초월한 신앙 _ 다니엘 무덤
죽으면 죽으리라 _ 악메다와 에스더 무덤
Weight | 2 lb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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