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한복음 14:15-21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시간은 흘러간다”고 말을 합니다. 과거에서 현재로, 그리고 현재에서 미래로 시간은 끊임없이 흘러갑니다. 그 흐름은 사람에 의해 멈추지 않습니다. 시간 스스로 정지하는 법도 없습니다. 사람이 의식하든 않든 상관없이 시간은 흘러갑니다. 봄.여름.가을.겨울할 것 없이 밤이고 낮이고 시간은 흘러갑니다. 이런 의미에서 시간이 흘러간다는 표현은 참으로 적절합니다. 이 표현은 시간이란 인간의 통제력밖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반대로 생각했습니다. 시간은 일반이들이 생각하듯이 과거에서 현재로 그리고 현재에서 그리고 현재에서 미래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서 현재로 다가오는 것이요, 그렇기에 현재에서 과거로 역류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이와 같은 생각은 시간이 흘러가는 것이라는 생각보다 시간에 대해 훨씬 적극성을 갖게 합니다. 시간을 흘러가는 것으로 판단할 때 사람들은 자기도 몰래 그 흘러가는 시간을 방관하거나 아니면 그 흐름을 타고 같이 흘러가는 소극성을 탈피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시간을 미래에서 현재의 나를 향해 다가오는 것으로 받아들일 때에는, 그 다가오는 시간에 정면으로 맞서든지 또는 껴안든지 아니면 그것을 이용하든지 하는 적극성을 나타내게 됩니다.
흘러가는 강물은 강둑에 앉아 여유 있게 감상할 수 있지만, 나를 향해 밀려오는 강물을 보고서는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따라서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다가오는 것이란 시간관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훨씬 더 적극적인 삶을 사는 것은 결코 우연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전혀 상이한 이 두 시간관 사이에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시간이 과거에서 미래로 흘러가는 것이든 아니면 미래에서 현재를 향해 다가오는 것이든 상관없이, 나를 중심으로 놓고 볼 때, 그것은 모두 나를 스쳐 지나갈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흘러가는 시간도, 다가오는 시간도 내 앞에서 멈추어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전혀 새로운 제3의 시간관이 필요하게 됩니다.
제3의 시간관이란, 시간은 흘러가거나 또는 다가오면서 나를 스쳐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고스란히 내 마음속에 담긴다는 것입니다.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의 시간들은 기억의 형태로 고스란히 내 마음속에 담겨 있습니다. 지금 내가 직면하고 있는 현재의 시간들은, 내가 인식함으로 계속 마음속에 새겨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 미래의 시간들 역시 비전, 꿈, 소망, 계획의 형태로 이미 우리 마음속에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시간은 절대로 우리를 스쳐 지나가 버리지 않습니다.
시간은 고스란히 우리의 마음속에 담기고 저장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3의 시간관을 갖고 있는 자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소유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초월하여 시간의 객체가 아닌 주체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가져야 할 시간관이 바로 이 제3의 시간관임은 두말 할 나위가 없습니다.
소설가 박경리 선생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나간 시간은 절대로 되돌아오지 않는다. 확실하게 돌아오는 것은 결과뿐이다.”
시간이란 흘러가는 것이라거나 다가오는 것이란 관점에서 본다면 이 말은 너무나 타당한 진실입니다. 한 번 스쳐 지나가 버린 시간은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고, 그 자리에 남는 것은 언제나 수정 불가능한 결과뿐입니다. 그러나 제3의 시간관 속에서는 이것은 더 이상 진실일 수가 없습니다. 제3의 시간관 속에서는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의 시간까지도 고스란히 마음 속에 담겨져서 현재와 미래를 위한 새로운 발판, 새로운 징검다리로 언제든지 재활용되는 까닭입니다. 그 좋은 예를 구약의 삼손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삼손은 이스라엘의 사사로 선택된 자로서 일찍부터 용맹과 명성을 떨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인생의 정상에 섰을 때 그만 교만에 빠져 하나님을 망각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20년 동안이나 오직 쾌락만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방탕한 삶을 살았습니다. 결국 인생 말년에 들릴라라는 여인의 간계에 빠져 적국 블레셋의 포로가 되었고, 두 눈이 뽑힌 채 쇠사슬에 묶여 짐승이 돌리는 맷돌을 돌리며 죽을 날만 기다리는 비참한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의 처참한 말년은 그가 잘못 살았던 시간에 대한 냉엄한 결과였습니다. 그것은 그야마로 요지부도의 결과처럼 보였습니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지나간 시간은 절대로 되돌아오지 않는다. 확실하게 돌아오는 것은 결과뿐이다” 라는 박경리 선생의 말을 그대로 삼손에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습니다. 없어져 버린 것만 같았던 삼손은 과거는, 즉 지나가 버린 그의 시간들은 고스란히 삼손의 마음속에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을 외면하고 떠났던 그 과거의 시간들이 허망하고 시리고 아픈 자국으로 그의 마음속에 새겨져 있는 것을 삼손은 똑똑히 보았습니다. 마침내 삼손은 그처럼 이지러지고 얼룩진 그의 과거를 발판으로 삼아 그 위에서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었을 때에, 두 눈이 뽑히고 손발이 쇠사슬에 묶인 그 모습 그대로 다곤 신전의 기둥을 쓰러뜨려 그 곳에 있던 적군 3,000명을 일거에 괴멸시키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삼손이 일평생 동안 죽인 적군의 숫자보다는 죽는 순간에 죽인 적군의 숫자가 더 많았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삼손의 제3의 시간관 속에 거한 사람이었습니다. 지나간 시간은 그의 속에 저장되어 있었고, 그 지나간 시간을 현재와 미래를 위한 발판으로 재활용했을 때, 절대로 수정 불가능한 것 같았던 그 인생이 마지막 순간 전혀 새로운 양상으로 나타났고, 그래서 그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신앙인으로서의 명예를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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