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완전해서
너무 애쓰는 당신을 향한
주님의 한마디,
“완벽은 네 몫이 아니란다”
“불완전하십시오
인생의 행복은 완벽에 있지 않습니다”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완벽한 모습을 꿈꾸며 애쓰다 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지금 잘하고 있나?’, ‘나는 왜 이것밖에 안될까’, ‘왜 생각만큼 나아지지 않을까.’ 만족스럽지 못한 나에게 던지는 질문들과 거기서 오는 불안한 마음들…. 완벽하기 위해 노력할 뿐인데, 그곳에는 좀처럼 기쁨이 보이지 않는다.
불완전해서 너무 애쓰는 이들에게 완벽한 삶이 아닌 불완전한 삶을 추구하라고 말하는 이 책은 김경진 목사가 소망교회 3대 목사로 부임 후 “불완전하라”는 주제로 전한 메시지를 엮은 것이다. 이 주제는 저자가 오랫동안 예배학자로 신학교와 교단에서 성경을 묵상하고 질문하고 연구하며 쌓아온 신학적 사유의 결정체이기도 하다. 저자가 불완전한 삶을 추구하라고 말하는 것은 삶의 아름다움을 완벽이 아닌 불완전함에서 발견했기 때문이다. 누구나 불완전하고 완벽해질 수 없지만 불완전하기 때문에 누리는 삶의 충만함과 기쁨이 있다는 것을 깨우쳐 준다.
성경 핵심을 관통하는 메시지와 조화를 이루는 풍성한 신학적 해석,
불완전한 삶을 긍정하는 저자의 따뜻한 시선이 담긴 책
이 책은 어떻게 하면 더 완벽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지금의 불완전한 삶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책이다. 이 책에는 참으로 불완전하게 살았던 성경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나 하나 살아가는 데 연연하며, 내가 가진 것을 하나라도 잃어버릴까 움켜쥐기도 하고, 때로는 주님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려 절망하고 염려하는, 너무도 불완전한 삶을 살았던 그들의 이야기는 곧 오늘 나의 이야기다. 그러나 이 책이 “불완전한 인생에게 함께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묵상이자, 그와 함께 일하시는 하나님의 온전하심에 대한 선포”라는 저자의 말처럼, 이 책을 읽다 보면 우리의 시선은 불완전한 나 자신이 아니라 불완전한 나를 사랑으로 용납하시고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주님을 찾는 자와 일하시는 하나님께 향하게 된다.
완벽하려 애쓸수록 불완전한 삶(불완전한 내 마음), 절망의 무덤에서(불완전한 내 자리), 완전하신 주님을 따라(불완전하지만 나아가기), 더 깊은 은혜의 자리로(불완전한 자를 향한 소명)의 4부 구성은, 여전히 불완전한 모습으로 살아가지만 주님과 함께 걸어가는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운 삶을 반영한다. 성경의 핵심을 관통하는 메시지와 조화를 이루는 풍성한 신학적 해석, 삶을 긍정하는 저자의 따뜻한 시선이 어우러져 불완전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을 두려움이 아닌 자유와 기쁨으로 바꾸어 줄 것이다. 그리고 불완전한 우리의 실존과 완전하신 주님의 일하심이 조화되는 진정한 완벽한 삶을 살도록 이끌어 줄 것이다.
<독자의 needs>
– 불완전함에 대한 시각을 은혜의 관점으로 새롭게 보도록 돕는다.
– 불완전한 내 모습을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이끈다.
– 현재의 모습에 만족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보게 한다.
<타깃 독자>
– 완벽한 모습을 꿈꾸며 애쓰는 그리스도인
– 불완전한 내 모습에 만족하지 못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 그리스도인의 기쁨과 자유를 잃은 평신도
■ 목차
1부 완벽하려 애쓸수록 불완전한 삶 _불완전한 내 마음
1장 누구나 불완전하다
2장 움켜쥘수록 불안한 마음
3장 자신을 위해 사는 인생
4장 누추한 모습을 숨기고 싶을 때
2부 절망의 무덤에서 _불완전한 내 자리
5장 “마리아야, 나오라” _마리아의 원망
6장 “믿기만 하라” _야이로의 절망
7장 “형통한 자가 되어” _요셉의 고난
8장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_우리의 염려
3부 완전하신 주님을 따라 _불완전하지만 나아가기
9장 성령이 광야로 이끄시더라도 _신뢰
10장 다시 가나안으로 _머묾
11장 ‘어떤 곳’이 아니라 ‘바로 그곳’으로 _알아봄
12장 값없는 은혜 안에서 _누림
4부 더 깊은 은혜의 자리로 _불완전한 자를 향한 소명
13장 겉옷 하나면 충분하다
14장 포도원지기가 되라는 부르심
15장 화목과 평화를 일구는 사람
16장 생명으로 이끄는 삶
■ 서문에서
강단에서 내려올 때면 저는 이렇게 고백하곤 했습니다. “완전하신 하나님이 부족한 사람의 입술에서 나온 설교를 성령을 통해 온전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되게 하셨다”라고 말입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이 사도 바울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 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 12:9) 하심과 같았습니다. 기도하며 바라는 것은,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성령님이 이 책을 읽는 모든 분에게 능력으로 다가가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배 현장에서처럼, 이 말씀을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 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 책은 불완전한 인생에게 함께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묵상이자, 그와 함께 일하시는 하나님의 온전하심에 대한 선포입니다. 이 책을 읽는 모두에게 글자가 아닌, 문장이 아닌,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가 닿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본문에서
하나님은 너무 완벽한 사람, 너무 의로운 사람을 찾으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의로움을 신으로 숭배하고 있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들어서실 자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며 빈 공간을 두고 하나님을 부르는 사람입니다. 너무 의롭게 살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인간은 그저 그런 존재입니다. 불완전합니다. 다만 하나님의 공간, 하나님이 계실 자리를 마련하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살아갑시다. _1장
야곱은 태어나면서 한 번도 빈손인 적이 없었습니다. 항상 무언가를 잡으려고, 얻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빈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얍복 강가에서 야곱은 한 분을 만났습니다. 예사롭지 않은 분이셨습니다. 그는 또다시 그분을 붙잡았습니다. 그러고는 절대로 놓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그때 하나님이 빙그레 웃고 계셨을 것 같습니다. “그래, 너 그럴 줄 알았다. 너는 무조건 잡지. 빈손이 되자마자 너는 또다시 잡는구나. 그런데 이번에는 나다. 이제 네가 나를 붙잡았구나.”
지금 야곱은 얼떨결에 하나님을 붙잡았습니다. 하나님‘만’을 붙잡았습니다. 그의 빈손이 드디어 하나님을 붙잡은 것입니다. 늘 그래 온 것처럼, 그의 본성이 그런 것처럼 야곱은 한 번 잡으면 놓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의 손에 잡힌 것은 재물이 아니고, 권력이나 명예도 아니며, 자녀도 아니었습니다. 그가 붙잡은 것은 영원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이셨습니다. _2장
나병 환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모든 감각이 무뎌지고 결국 사라지고 마는 사람입니다. 뜨거운 불에 몸이 닿아도 고통을 느낄 수 없으며, 몸이 썩어 들어가는데도 알지 못합니다. 죽어 가고 있으나 고통을 느끼지 못합니다. 이 모습이 마치 영적 감각을 잃어버리고, 도덕적 감각마저 사라지고, 삶의 방향성도 잃어버린 채 무감각하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그런데 주님은 우리의 몸을 만져 주십니다. 우리의 더러운 곳에 손을 대십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다가오셔서 우리에게 손을 대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_4장
예수님을 만난 마르다는 가만히 마리아를 불러서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요 11:28)라고 말했습니다. 마리아를 부르고 계시는 예수님이 보입니까? 예수님이 실망하고 절망한 마리아, 그래서 더는 예수님을 찾지 않는 마리아, 집 안에 갇혀 있는 그 마리아를 향해 서 계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눈빛에서 이러한 음성을 읽을 수 있습니다. “마리아야, 나오라. 그 절망의 방에서 나오라. 불신의 방에서 나오라. 실망의 방에서 나오라. 마리아야, 나오너라.” 마르다의 말을 전해 들은 마리아는 그제야 급히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 왜 예수님은 마리아를 부르셨을까요? 예수님은 죽은 오라비로 인해 인해 상처받은 마리아가 스스로 만든 ‘실망 무덤’에서 나오기를 원하셨습니다. 절망의 자리, 낙망의 자리, 고립의 자리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셨습니다. _5장
염려의 반대가 무엇입니까? 바로 ‘감탄’입니다. 예수님은 들의 백합화를 보시며 감탄이라는 또 하나의 관점을 우리에게 제시하셨습니다. 우리도 들판의 백합화를 보면서 얼마든지 염려해 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저 아름다운 백합화를 밟고 지나가면 어떻게 하지? 홍수가 나서 백합화가 물에 차 죽으면 어떻게 하지? 백합화가 왜 하필이면 저 큰 나무 아래서 피었을까? 큰 나무 그늘 때문에 햇빛을 받지 못해 시들면 어떻게 하지?’ 그러나 예수님은 들에 핀 백합화를 보며 염려하시는 대신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 자체로 얼마나 존귀한가!” 하고 감탄하셨습니다. _8장
우리도 때때로 야곱처럼 ‘어떤 곳’을 지날 때가 있습니다.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보이는 어떤 곳, 그저 지나쳐 가는 곳일 뿐 인 어떤 곳, 그래서 별 가치가 없어 보이는 어떤 곳이라고 느껴 지는 장소 혹은 시간이 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기에 그 어떤 곳에서 우리를 만나 주십니다. …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불안한 자리에도 우리 주님이 계십니다. 야곱이 바로 그 경험을 한 것입니다. ‘바로 이곳이 하나님의 집이구나. 내가 생각했던 어떤 곳이, 그냥 지나쳐 가는 그곳이 바로 하늘의 문이구나’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이후에도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그 자리’ 로 돌아왔습니다. 야곱에게 벧엘은 ‘그 자리’, ‘바로 그곳’이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 자리’가 있습니까? 바로 그 자리, 내가 하나님을 만났던 그 자리, 내가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던 바로 그 시간이 있습니까? _11장
누구도 완벽할 수 없습니다. 당대에 완전한 자요, 의인인 노아도 그러했듯이, 우리 모두는 ‘어떤 상황에서’, ‘언젠가는’ 불완전한 존재가 되고 맙니다. 우리는 그 자체로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실수하는 인간, 허물 많은 인간, 죄 속에 빠져 있는 인간, 그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실수를 저질렀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입니다. 공동체를 이 땅에 세워야 하는 노아의 아들들이 아버지의 실수를 통해 배워야 하는 한 가지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겉옷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 이 땅에 수많은 사람이 죄로 죽어 가고 있습니다. 부끄러운 모습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겉옷을 준비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허물을 덮고 아름답게 하신 주님을 따라 우리도 겉옷 하나는 준비합시다.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가려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들고 세상으로 향합시다. _13장
하나님이 왜 내 질서정연한 포도 농장에 무화과나무를 심어 놓으셨을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 무화과나무가 계속 거슬리고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혹시 내 삶에 그런 무화과나무가 있습니까? 열매 없는 나무, 가지런한 나의 농장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좋았을 나무,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망가진 듯 보이는 나무. 무화과나무가 왜 포도원에 심겨야 했는지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주인만이 그 용도를 알 것입니다. … 포도원지기는 무화과나무에서 열매가 맺히기 전까지 그 나무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다졌습니다. 이 모습은 분명 우리를 향해 오래 참으시고 기다리시는 주님의 너그러운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 포도원지기가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이 맞다면, 동시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우리 또한 예수님처럼 포도원지기가 되어 보는 것은 어떨까요? 하나님은 우리의 자리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씩을 심어 두셨습니다. _15장
Weight | 1.5 lb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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