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에 출간되어 독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아온 [영성에의 길]의 개정증보판! 기다림, 평안, 능력, 삶과 죽음이라는 네 주제에 대하여 저자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쓰인 글들로서 더욱 호소력을 지닌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익숙한 어휘이지만 내 것으로 주장하기에는 낯선 이 네 가지 하나님의 선물을 다시금 소망하게 한다.
기다림
능동적인 기다림은 삶에 대한 아주 적극적인 자세이다. 그것은 우리가 미래를 통제하는 것은 포기하고 하나님이 삶을 주관하시도록 하는 것이다.
평안
우리가 가장 연약한 자가 되는 바로 그 곳에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평안이 숨겨져 있다. 우리가 가장 심한 상처를 느끼고, 가장 불안하고, 가장 심한 고통을 느끼며, 가장 두려움을 느끼는 우리의 마음의 그 장소에.
능력
이 세상의 악마적인 권력에 대해 하나님은 무력함을 선택하셨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기 원한다면 연약함으로 점철된 인생을 사신 예수님을 살펴보아야 한다. 그분의 연약함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마음으로 가는 길을 열어 주었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
죽음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로서 우리의 정체성을 온전히 실현하며 사랑의 하나님과 온전한 교제를 나누게 되는 우리의 마지막 통로이자 우리의 출애굽이다. 예수님은 우리 앞서 그 길을 가셨고, 우리도 일생 동안 그 동일한 길을 가도록 우리를 초청하신다.
2. 특징
■ 일상에서 끌어낸 영성에 관한 기본서
■ 능동적인 기다림, 평안, 능력, 삶과 죽음에 관한 탁월한 통찰
3. 독자 대상
■ 너무나 바빠서 자신을 돌아볼 시간이 없는 현대의 그리스도인들
■ 기다림, 평안, 능력,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통찰을 원하는 자들
나우웬은, 이 땅에서 보내는 시간은 아주 짧지만 우리는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고, 죽은 후에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나우웬은 이렇게 쓴다. “이 짧은 일생은 내가 사랑을 받고, 사랑을 깊게 하고, 사랑 가운데 자라나고, 사랑을 줄 수 있는 기회이다.” 본서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란 세상적인 성공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변화시키는 사랑의 능력’과 풍성한 열매 맺음과 관련된 것임을 발견한다. 사랑의 능력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때, 우리는 두려움으로부터 더 자유로워진다. 본향으로 가는 우리의 최후의 여행은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과의 온전한 사귐을 향해 가는 출애굽’이 된다.
헨리 나우웬은 풍성한 유산을 남긴 채 4년 전 본향을 향한 마지막 여행을 떠났다. 그는 눈과 마음을 예수님께 고정하고 살았으며, 예수님처럼 신실하게, 열정적으로, 그리고 진정함으로 살았고, 죽음을 통해 자신의 삶이 풍성한 열매를 맺도록 했다. 이 놀라운 책은 우리 또한 본향을 향한 길을 찾아갈 때 확신 가운데 그와 같은 길을 걸어가도록 우리를 격려한다.
– p.10 서언 중에서
기다림의 훈련
우리는 어떻게 기다리는가? 가족과 친구들과 함께 기다리는 것은 홀로 기다리는 것보다 훨씬 낫다. 함께 기다리는 것은 좀 더 인간적이고 좀더 신적인 것이다.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구절 가운데 하나는 이렇게 시작한다. “그 무렵에 마리아가 일어나, 유대 산골에 있는 한 동네로 서둘러 가서,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였다.” (눅 1:39-56).
이것은 마리아가 아들을 잉태할 것이라는 약속을 받은 직후 엘리사벳을 방문한 이야기이다. 마리아가 약속의 말씀을 받았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녀는 엘리사벳에게로 갔다. 마리아에게뿐 아니라 엘리사벳에게도 어떤 일이 일어났다. 그런데 그들은 이 시기를 어떻게 견디어 낼 수 있었을까?
이 두 여인의 만남은 내게 아주 감동적이었다. 엘리사벳과 마리아는 함께 거하면서 서로 기다릴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마리아의 방문으로 인해 엘리사벳은 그녀가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마리아가 방문하였을 때 그 아이가 태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던 것이다.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기다림을 확인해 주었다.
그러자 그 때 엘리사벳은 마리아에게 “주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질 줄 믿은 여자는 행복합니다.”(눅 1:45)라고 말했고, 마리아는 “내 마음이 주님을 찬양하며”(눅 1:46)라고 화답했다. 그녀는 기뻐 어쩔 줄 몰랐다. 이 두 여인은 서로 함께함으로써 서로에게 기다릴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그들은 서로에게 기다릴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확인해 주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 가정과 기독교 공동체의 모델을 보게 된다. 가정과 공동체란, 이미 우리 안에서 시작된 일을 소리 높여 지지하고, 축하하고, 확인해 주는 곳이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은, 우리 가운데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확인해 주며,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 함께하는 것, 약속을 근거로 모이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인지를 알려 주는,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표현 가운데 하나이다.
이것이 바로 기도가 의미하는 바이다. 기도란 약속 주변으로 함께 모이는 것이다.
축하가 의미하는 바도 바로 이것이다. 그것은, 이미 그 곳에 있는 것을 소리 높여 기뻐하는 것이다. 성찬식이 의미하는 바가 이것이다. 그것은 심긴 씨앗에 대해 “감사해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는 주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미 오신 그분을!”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가정의 온전한 의미는 서로 우리가 이미 본 것을 기다리도록 돕고 기다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는 데 있다. 기독교 공동체란 우리 가운데서 소망의 불꽃이 살아 있도록 하고,
그 불꽃이 자라서 우리 안에서 더욱 강해질 수 있도록 그것을 소중하게 여기는 장소이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용기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 우리가 함께 할 때 우리 안에 끊임없는 절망의 유혹에 굴복하지 않고 이 세상에서 살아가게 하는 영적 능력이 있음을 확신하면서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증오를 볼 때조차도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 말할 수 있다. 또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죽음과 파괴와 고통을 볼 때 조차도 하나님은 생명의 하나님이라 주장할 수 있다. 우리는 함께 그렇게 말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그 사실을 확인해 준다. 함께 기다리는 것, 이미 시작된 일에 영양분을 공급하는 것, 그것의 완성을 기대하는 것, 이것이 결혼, 우정, 공동체, 그리스도인의 삶의 의미이다.
우리의 기다림은 항상 그러한 신비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깨어 있음으로 이루어진다. 그것은 누군가가 우리에게 알려 주고 싶어하는 지식 가운데서 기다리는 것이다.그렇다면 문제는, 우리가 집에 거하고 있느냐이다. 우리는 과연 초인종 소리에 달려나갈 준비를 갖춘 채 우리집에 머물러 있는가?
우리는 서로 영적인 가정에 머무르도록 함께 기다려야 한다. 그래야 말씀이 오실 때 말씀이 우리 안에서 육신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항상 모여 있는 사람들 가운데 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서 온전한 새 생명을 갖게 하기 위해 우리는 말씀을 읽는다.
유대인 저술가 시몬느 베이유(Simone Weil)는 “기대감을 갖고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이 영적 삶의 기초이다”라고 말했다. 예수님은 세상 끝날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기다림의 중요성에 대해 정확하게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싸우고, 전쟁과 지진과 재난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사람들은 고통을 겪을 것이며, “그리스도가 저기 있다! 아니다, 여기 있다” 할 것이다. 많은 사람이 혼란스러워할 것이고, 많은 사람이 속임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너희는 준비해야 하며, 깨어 기다려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한 채 머물러 있어야 한다고, 그래야 앞으로 닥칠 모든 일 가운데서 살아 남을 수 있고, 공동체 가운데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안에 확신(con-fide)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참고 마 24장). 이것이 우리로 너무나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 영적으로 살아 남을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는 기다림의 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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