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힘들게 하는 강박에 대한 교회 언니들의 솔직한 수다
[머리말]
2017년 설 즈음, 셋째 자녀 출산 이후 약 6년간 ‘경단녀’로 지내다 재취업에 성공했다. 세상으로 복귀하는 기쁨을 나누고 싶어서 한동네 사는 교회 동생을 불러냈다. 언니 취직했어. 우리 맛있는 거 먹자!
비록 시간강사 계약서에 사인을 했지만 취직을 하지 못한 동생에게 삼계탕을 사주고 싶었다. 우리는 뽀얀 국물 속 두 다리 모은 닭과 마주했다. 입천장 델라 조심 조심, 뜨끈한 국물을 후후 불어 마시며 하얀 살을 조금씩 뜯어먹었다. 그렇게하면 이 한 그릇의 삼계탕이 지친 몸에 피와 살이 될 것 같았다. 6년 만에 세상으로다시 나가는 나의 감사와 두려움, 미래를 알 수 없는 동생의 기대와 절망이 낮게 깔린 식탁이었다.
세상살이가 힘들어도 그나마 사람을 사랑하는 맛으로 살아가는 동생과 나는, 사랑으로 시작해서 사랑으로 끝나는 수다를 떨곤 한다. 사랑하고 싶은 본능, 사랑받고 싶은 욕망, 사랑해야 한다는 당위가 닭 뱃속에 차곡차곡 들어있는 찹쌀, 대추, 은행처럼 우리 이야기 안에 담겼다. 그 사랑의 이야기가 깊어지다 보니 ‘그리스도인 여성은 이렇게 해야 한다’는 지점에 닿게 되었다. 우연히 우리의 강박을 발견했다.
표준국어대사전은 강박을 ‘어떤 생각이나 감정에 사로잡혀 심리적으로 심하게 압박을 느낌’이라고 풀이 한다. 연관된 단어인 강박관념의 뜻은 ‘마음속에서 떨쳐 버리려 해도 떠나지 아니하는 억눌린 생각’이다. 두 단어의 뜻으로 강박의 속성을 알 수 있다. 강박은 내 마음대로 떨쳐 버릴 수 없고, 나를 불편하게 한다. 내 마음대로 떨쳐 버릴 수는 없지만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강박이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자꾸 떠올라 가만히 있다가도 슬금슬금 웃는 것은 강박이 아니다. 불편하게 하는 생각 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면 그것도 강박은 아니다.
강박은 약점과 콤플렉스에 붙어 있다.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고 스스로도 모른 척하고 싶다.나를 지키고 남에게 멋지게 보이고 싶어서 그런다. 이렇게 성을 만들어서 그 속에서 안전하게 머물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렇게 쌓은 성벽이 강박이다. 그런데 성벽은 생각과 달리 안전하지 않고 오히려 불편하다. 성벽이 단단해질수록 병적인 강박장애가 될 가능성이 높아지기도 한다. 성벽이 아니라 담장이 필요하다. 성벽을 담장으로 낮추려면 상대가 약점을 비난하거나 평가하지 않고 나를 사랑해 주리라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나와 동생은 서로 사랑과 믿음을 나누는 관계였다. 우리는 용감하게 자기 이야기를 꺼내고 조심스럽게 상 대방의 이야기를 들었다. 나를 불편하게 하는 반복되는 생각이나 행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나 자신을 좀 더 사랑할 수 있었다. 이 과정이 강박증의 치료에 활용되는 인지행동치료와 유사하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나의 인생에서 혹독하게 추웠던 겨울에 몸과 마음을 따끈하게 데워주었던 삼계탕의 기운으로 수다의 서문을 쓴다. 온기가 아직 남아있는 그릇에 두 ‘자매님’들 의 사랑과 강박을 담았다. 우리의 이야기가 강박으로 힘겨워하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응원이 되길 바란다.
이 글은 두 사람의 강박 – 자신을 불편하게 하는 반복되는 생각이나 행동 – 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 강박들은 성장 과정의 콤플렉스에서 비롯되기도 했지만 ‘기독교인 여성’이라는 정체성과 부담감에서 기인된 것도 상당했습니다. 두 사람은 그 강박을 들여다보고 글을 쓰며 조금 자유로워졌고, 자신을 좀 더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독자들에게 그 자유와 사랑을 드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