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봄
신경숙 씀
작가의 말
나는 다급한 마음에 어두운 가게에 대고 아버지 아버지…… 불렀다.
살아오는 동안 누군가와 헤어지게 될 때 가끔 그때의 내 목소리를 듣는다.
멈춰 서는 버스를 보며 아버지 아버지, 하고 부르던 다급한 내 목소리. 헤어지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갈 길이 없는 관계에 봉착할 때면 그때 그 신작로에서 아버지, 아버지를 부르던 절박한 내 목소리가 북소리처럼 둥둥둥 머릿속에 울린다. 내가 떠난 후에 그 자리엔 무엇이 남을지 생각할 때도 그때 내가 아버지 나 가요, 소리치며 버스에 올라탄 후 차창 밖에 홀로 남겨진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16~17면)
아버지는 어느날의 바람 소리, 어느날의 전쟁, 어느날의 날아가는 새, 어느날의 폭설, 어느날의 살아봐야겠다는 의지,로 겨우 메워져 덩어리진 익명의 존재. 아버지 내면에 억눌려 있는 표현되지 못하고 문드러져 있는 말해지지 않은 것들. (76면)
-너그들이 먹성이 얼매나 좋으냐. 양석 걱정 없이 살게 된 지가 얼마나 되간? 오늘 저녁밥 먹음서 내일 끼니 걱정을 하며 살었는디. 밥 지을라고 광으로 쌀 푸러 갈 때 쌀독 바닥이 보이는 때도 있었는디. 그 가슴 철렁함을 누가 알겄냐. 쌀독은 점점 바닥을 보이는디 먹성 좋은 자식 여섯이 마구 달려들어봐라, 안 무서운가……
아버지가 삼킨 말을 대신하는 동안 무거워진 생각을 털어내듯 엄마는 곧 생기를 되찾곤 했다.
-무섭기만 했시믄 어찌 매일을 살겄냐. 무섭기도 하고 살어갈 힘이 되기도 허고…… (196면)
나는 아버지를 한번도 개별적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는 것도 그제야 깨달았다. 아버지를 농부로, 전쟁을 겪은 세대로, 소를 기르는 사람으로 뭉뚱그려서 생각하는 버릇이 들어서 아버지 개인에 대해서는 정확히 아는 게 없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197면)
살아가는 시간 속엔 기습이 있지. 기습으로만 이루어진 인생도 있어. 왜 이런 일이 내게 생기나 하늘에다 대고 땅에다 대고 가슴을 뜯어 보이며 막말로 외치고 싶은데 말문이 막혀 한마디도 내뱉을 수도 없는…… 그래도 살아내는 게 인간 아닌가. (323면)
나는 아버지의 얘기를 들으려고 한번이라도 노력한 적이 있었던가? 먼 이국의 사람들도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는데 나는 내 아버지의 말도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었다는 생각. 아버지의 슬픔과 고통을 아버지 뇌만 기억하도록 두었구나, 싶은 자각이 들었다. 말수가 적은 아버지라고 해도 허심탄회하게 말할 수 있는 딸이 되어주었으면 수면장애 같은 것은 겪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37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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