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믿음은 바르고 건강한가?
부모의 ‘신앙 유전자’부터 검사하라!
자신이 신실한 믿음을 가지는 것도 기적이요 중요하고도 어려운 일이지만,
그 믿음이 후대에 잘 이어지는 것은 더 기적이고 더 중요하고 더 어려운 일이다.
선대(先代)가 홍수 같은 무서운 심판에서 겨우 구원받은 경험을 했다 하더라도,
하나님에 대한 경험과 지식이 자녀들에게 제대로 전수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성경적으로 볼 때, 믿음의 전수는 우선 가정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들을 부르실 때는 ‘대대로’ 믿음의 가정을 이루라는 것이고,
가정을 통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자녀’를 양육하는 것이
그 가정의 가장 막중한 사명이다.
부모가 먼저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고 그것을 다음세대에게 잘 전수하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 가정의 존재 이유다.
이제는 자녀에게 가르치려 들기 전에,
유전하고 싶은 부모의 믿음부터 점검하라!
부모의 믿음이 진정한 믿음이라야
그것을 물려주는 일이 의미 있게 된다.
[이런 분께 추천합니다]
· 다 키워놓았더니 교회 안 가고 싶다는 자녀를 둔 부모
· 신앙의 전수 문제에 답을 찾고 싶었던 독자
· 자녀 교육 주제의 설교 자료를 찾는 설교자
· 바른 믿음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던 독자
대대로 예수를 믿었거나, 자신이 집안에서 처음 예수 믿고 부모가 된 사람이든 간에, 좌우간 자녀를 낳고 부모가 된 크리스천이 공통으로 하는 고민이 있다. ‘내 자식은 왜 믿음이 없어 보일까?(혹은 없을까?)’
‘주일학교, 수련회, 찬양집회 다 보내고 실컷 잘 키워놨더니, 머리 좀 컸다고 교회 안 가고 싶단다. 일주일에 한번, 예배 한 시간 빠진다고 매번 야단치기도 그렇고, 이걸 누구하고 의논하나?’
게다가 코로나로 현장 예배가 사라지자 주일학교도 못 보내게 되면서 자녀의 신앙생활을 확인(?)할 방법조차 없어졌다. 코로나로 장기간 대면예배를 못 드리다가 조금 잠잠해져 다시 교회 오라는데도, 집에서 영상 보는 걸로 ‘예배 보는’ 데 익숙(?)해진 아이들은 “교회 뭐 하러 가요?” 해서 속을 끓인다는 부모들이 많아졌다. “그냥 유튜브 예배는 계속 볼게요” 하기만 해도 고마울 지경이라니, 교회마다, 가정마다 고민은 깊어만 간다.
사실 소위 말하는 다음세대, 즉 자녀세대에게 믿음을 전수하는 일에서 장벽을 느낀 건 최근의 고민만은 아니다. 오히려 코로나로 그 수준과 민낯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을 뿐이다.
교사나 주일학교 사역자들은 직접 만나지 못하는 아이들과 가상공간에서라도 만나려고 ‘메타버스’ 같은 걸 배워보려고 애를 태우지만, 정작 맨날 얼굴을 볼 수 있는 부모들은 자기 자녀에게 신앙을 가르칠 길을 찾지 못해 헤매고 있지는 않은가? 코로나가 있기 전에 가정예배를 드리지 않던 가족이, 코로나로 교회 못 간다고 가정예배 드리는 걸로 신앙 전수 방법(?)을 대체했다는 사례를 솔직히 말하라면 얼마나 될까? 대면 시절에 자주 하지 않던 일이면, 비대면 시대가 됐다고 해서 그 일을 갑자기 잘하게 되긴 어렵다.
이 책의 저자는 결국 신앙의 전수 현장은 일차로 가정이며, 그 책임도 당연히 부모에게 일차로 있다고 강조한다. 교회의 처음부터 신앙 전수의 교실은 가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자는 그 모델을 무려 수천년 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장막에서부터 찾는다. 아예 믿음의 원조에게서 신앙 전수의 비결을 찾아내자는 것이다.
이 책은 기존의 부모역할 지침서나 자녀교육서처럼 ‘자녀에게 뭘 어쩌자’는 식의 방법론은 상대적으로 많이 다루지 않는다. 오히려 부모가 가져야 할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지, 예컨대 아브라함이 어떻게 그런 믿음을 가지게 됐는지부터 살핀다. “아브라함의 신앙은 어떻게 형성되었고 어떻게 계승되었는가? 오늘날 우리는 믿음을 유산으로 남겨주기 위해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가 이 책의 주제이다. 나아가, 저자는 독자에게 “자녀에게 가르치려 들기 전에, 유전하고 싶은 부모의 믿음부터 점검하라! 부모의 믿음이 진정한 믿음이라야 그것을 물려주는 일이 의미 있게 된다”라고 일침을 가한다. 저자는 이런 신앙 전수 과정에 초점을 두고, 창세기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이야기를 탐구하여 <신앙 유전자> 책에 눌러 담았다.
부모의 신체 특성과 성격이 유전자를 통해 자녀에게 복사기처럼 전해지듯, 믿음이 전수되는 일차 통로는 가정이며, 그 원리도 신체의 유전자가 전달되는 방식과 같다. 그러므로 부모의 신앙 유전자가 어떤지부터 점검하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부모가 바른 믿음을 가지고 있고 그 믿음대로 세상에서, 교회에서, 가정에서 크리스천답게 살아가는 삶을 보여주고 있다면, 자녀가 그 믿음을 유전받는 건 당연하다는 지적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기존의 자녀교육서들처럼 성경 읽기와 암송과 기도를 가르치라는 식의 지침이나 방법론은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부모에게 “자녀에게 신앙을 전수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물려주고 싶은 당신의 믿음은 올바른가?”라고 당혹스럽게 묻는다.
그렇다고 저자가 교회의 기능을 부인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저자는 교계에서 손꼽는 다음세대 전문사역자이자, 기독교 대안학교의 설립을 준비중인 기독교 교육 전문가이다. 다만, 기독교 대안학교나 교회학교는 학부모인 크리스천 부모가 바른 신앙을 자녀에게 전수할 수 있도록 돕는 방향으로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고 언급한다. 교회학교가 신앙교육을 전문적으로 할 뿐 아니라, 가정에서 그 교육이 잘 이뤄지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부모가 바른 신앙을 가짐으로써 자녀에게 믿음이 전수되게 하는 ‘신앙 유전자’는 코로나 이전부터 중요한 주제였으나, 코로나 이후 달라질 세상에서는 더욱 중요한 신앙교육의 주제가 될 것이다. 이 책은 ‘바른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은 어떻게 생기며 어떻게 성장하는가? 전수한 믿음은 어떻게 심겨지고 자라나게 되는가?’ 하는 신앙 유전의 다양한 과정을 추적한다. 따라서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모든 크리스천에게도 유익한 내용이다.
[저자 서문 중에서]
성경적으로 볼 때, 믿음의 전수는 우선 가정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일주일에 한두 시간 하는 주일학교 교육보다 더 확실하고도 강력한 신앙교육의 장은 가정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자녀들에게 믿음을 물려주어 그들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것, 이것이 아브라함의 사명이었다. 창세기 12장 이후는 이것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믿음을 잘 물려주게 하려고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이었다. 이 사명은 아브라함 이후 후손들에게 대대로 주어진 임무였다.
이같이 믿음을 물려주는 일은 일차적으로 가정에 주어진 책무이다.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들을 부르실 때는 ‘대대로’ 믿음의 가정을 이루라는 것이고, 가정을 통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자녀’를 만들어내는 것이 그 가정의 가장 막중한 사명이었다(말 2:15).
신약시대에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리스도인 가정에는 자녀를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해야 하는 명령이 주어졌다(엡 6:40). 바울은 자신의 수제자 디모데가 그의 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로부터 거짓 없는 믿음을 유산으로 잘 물려받은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칭찬하며, 많은 사람들의 본으로 삼았다(딤후 1:5). 이같이 하나님은 가정을 믿음 전수의 중심 통로로 설계하셨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거니와, 좋은 주일학교 시스템과 기독교 학교가 잘못되었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교회 공동체가 확장된 가족이라고 말할 때, 교회의 다음세대 사역은 정당성을 갖는다. 그러나 그것이 믿음을 물려주어야 하는 개별 가정의 책무를 대체하지 않는다. 부모와 자녀가 같이 성경을 읽는 것, 가정예배를 드리는 것, 부모가 경험한 하나님에 대해 들려주는 것, 이런 이야기가 진부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가정의 신앙교육은 주일학교의 어떤 프로그램보다 강력한 믿음 전수의 방법이다. 부모가 먼저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고 그것을 다음세대에 잘 물려주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 가정의 존재 이유이며 사명이다.
그러면 교회의 역할은 무엇일까? 믿음의 부모들로 하여금 믿음을 잘 전수하도록 그 부모를 구비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다소 혁명적인 이야기이다. 기존의 다음세대 사역의 기본 틀은, 주로 주일학교를 잘 구비하여 좋은 목회자나 교사가 그것을 감당하고, 부모는 그 주일학교를 위해 기도하고 후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성경은 반대로 말하고 있다. 부모가 신앙 전수 책임의 주체이며, 교회의 주된 역할은 그런 부모들을 돕는 것이다.
당장 오늘부터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믿음 전수의 책임은 다른 데 떠넘길 수 없는 것이다. 바울은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 10:14)라고 했다. 믿음은 누군가 전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창세기 11장에서 묵상하는 바는, 신앙을 일차적으로 전하는 사람은 주일학교 선생님이나 기독교 교사가 아닌 부모라는 것이다. 가정에서 믿음을 성실하게 물려줄 때, 자녀들의 입에서 “나의 부모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이 나온다. 이것이 오늘의 가정에게 주어진 과제요 미션이다.
그렇게 믿음의 결단을 해도 우리 인생이 항상 형통하는 것은 아니다. 믿음으로 산다고 다 복을 받지도 않는다. 우리가 자녀들을 믿음으로 키우려고 기도를 하고 좋은 환경을 마련해주고 하나님의 뜻대로 양육하려고 최선을 다해도 반드시 잘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고난이 오기도 하고 시험이 닥치기도 하며 유혹을 당하기도 한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하면 시험이 없을 것인가에 집중하기보다 ‘시험이 왔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백성답게 시험을 잘 극복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된다.
_p 43
자녀가 자라나면서는 부모의 선택이 정말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선택인지, 우리 좋으려고 하는 것인지 금방 알아챈다. 전에는 그럴싸한 명분을 내세우면 됐지만, 자녀가 자라면서 판단력도 자랐기 때문에 옳고 그름 정도는 넉넉히 판단할 수 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우리는 물론 자녀들은 그동안 작은 부분을 타협해온 것이 몸에 밴다. 그래서 결국 나중에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는 하나님이 ‘덜’ 기뻐하시는 선택을 하게 된다. 하나님이 ‘덜’ 기뻐하시는 선택은 곧 하나님이 ‘확’ 싫어하시는 선택으로 발전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방법으로 일관해야 한다.
_p 48
우리 인생에 시행착오가 있을 수 있지만, 그때마다 예배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상책이다. 우리는 완벽하지 않다. 우리가 믿음 생활을 할 때도 실수와 실패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럴 때에 우리는 예배의 자리로 다시 나아가야 한다. 부모로서 자녀들을 양육하면서 실수와 실패를 거듭할 수 있다. 그럴 때에도 부모는 처음 그 자리, 하나님을 예배하며 은혜를 받았던 그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
_p 57
재촉이나 강요는 주로 갑이 을에게 하는 행동이다. 재촉을 당하면, 그것이 당연할지라도 기분은 좋지 않다. 조급함이란 내가 갑이 되어 하나님을 을로 취급하고 재촉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조급함이란 내가 하나님의 일을 빨리 이루려는 순수한 열심이라기보다, 하나님을 재촉하여 내 기대를 이루려는 측면이 강하다. 그 이면에는 하나님보다 내가 판단을 더 잘한다는 교만이 깔려 있기도 하다.
우리는 하나님한테만이 아니라 자녀에게도 조급함을 종종 보인다. 솔직히 말하자면, 종종이 아니라 꽤 자주 보인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않고 재촉하는 교만함이, 자녀에게는 최소 하나님을 대하는 것보다는 강하게 발동할 가능성이 높다. 내 자녀에게는 그만의 시간과 때가 있다. 하나님이 그에게 부여하신 권리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녀를 소유물로 여길 뿐 아니라 자녀의 시간까지 좌지우지할 권능이라도 부여받은 듯이, 자녀를 기다려주기보다는 재촉한다.
_p 93
우리는 기도할 수밖에 없는 낮은 존재들이다. 하나님은 그런 낮은 자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다.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신실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다만 겸손하게 기도할 뿐이다. 세상에 기도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은 없다. 아니, 그런 존재는 없다. 자연은 자연대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한다. 오직 인간만이 교만하여 기도하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많은 부모가 자녀를 위해 희생하고 뒷받침하면서 교만함도 같이 키워주는 경우를 종종 본다. 그러나 정말 자녀를 위한다면, 자녀가 믿음의 유산을 물려받아 신앙 가운데 살아가기를 바란다면, 반드시 기도하되 가난하고 낮은 마음으로 기도하도록 훈련시켜야 한다. 그렇게 기도하는 부모의 모습을, 자녀는 그대로 따라할 것이다.
_p 136
주일에 학원에 가느라 예배를 빠진 자녀들을 다시 예로 들면, 좋은 성적을 얻기 위해서 예배를 포기하고 얻은 성과가 과연 가치 있는 일일까? 좀더 노골적으로 이야기해보자. 주일에 예배 시간이라야 한 시간 남짓이다. 그 시간과 맞바꾼 공부가 얼마만큼의 성취를 얻었는지는 모르지만, 대개는 약간의 불안감을 덜 뿐이다. 그 작은 안도감을 예배와 맞바꾼 것이다.
이 땅에서 천국을 산다는 것은 곧 천국을, 하나님을 우선순위에 두는 삶을 사는 것이다. 단지 예배 시간 한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_p 162
부모의 순종이 자손들을 복되게 한다. 부모의 기도가, 부모의 헌신이 자녀들을 복되게 한다. 물론 부모의 믿음 덕분에 자녀들이 무조건, 저절로 잘될 것이라는 말은 아니다. 믿음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 나는 것이 아니다(요 1:13). 개개인의 결단이 있어야 한다. 자녀들 역시 그들 자신이 믿음과 성장에의 결단을 해야 한다. 그러나 자녀들이 순종함으로 받는 축복은 부모의 순종으로 더 풍성해진다. 예컨대, 혹 우리 자녀가 시험에 직면했을 때에 결국 그들 스스로의 믿음으로도 이겨나가야 하지만, 부모의 기도와 헌신과 순종으로 힘을 받을 수도 있다.
_p 188
야곱이 바로 그랬다. 비로소 그가 하나님을 직접 만난 것이다. 야곱은 깨어난 후 두려움 마음으로 단을 쌓았다. 그리고 예배를 드렸다. 그의 생애 가운데 처음이었다. 그동안에는 아버지가 단을 쌓고 예배드리는 데 참여했지만, 이제는 야곱 스스로 단을 쌓고 예배드리게 되었다.
우리 자녀들도 언젠가 이 순간을 만날 것이다. 기독 가정의 자녀라면 대개 어릴 때부터 부모의 손을 잡고 교회에 다니고, 교회학교를 거치며 신앙인의 길에 들어선다. 신앙생활의 계기가 부모였기 때문에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신앙인의 길에 서 있는 것이다. 그 믿음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부모님의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할 때 비로소 신앙의 독립체가 된다. 그 순간이 평온한 가운데 올 수도 있고 야곱처럼 고난의 시기에 올 수도 있다. 언제든 늘 깨어 있어 그 순간에 진실한 고백을 할 수 있도록 믿음의 토양을 마련해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다.
_p 217
부모가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할 때 자녀가 그것을 보고 배운다. 특히 요즘은 신앙생활에도 성실을 보기가 쉽지 않아서, 예배에 성실하고 기도에 성실하고 교회 봉사에 성실한 사람은 한 교회 안에서도 적은 숫자이다. 때로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데 왜 혼자 힘들게 일하며 애쓰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내가 걸어간 성실의 발걸음을 자녀들도 밟아갈 것이며, 우리 머리털도 세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성실과 수고를 기억하고 계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식으로 사는 것이다.
_p 226
1부 물려줄 만한 믿음이란 무엇인가?
1장 갈 바를 알지 못할 때의 믿음
2장 뜻밖의 시험이 찾아올 때의 믿음
3장 시험이 지속적으로 올 때의 믿음
4장 드려야 할 때와 줘버려야 할 때의 믿음
5장 기다리는 훈련을 할 때의 믿음
2부 살아있을 때 믿음을 물려주는 법
6장 세상에서 믿음으로 사는 법을 알자
7장 사람을 소중히 여기시는 하나님을 알자
8장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경험하자
9장 진정으로 나그네 인생을 살아가자
10장 믿음의 홈스쿨을 만들어가자
3부 물려준 믿음이 심기고 자라는 원리
11장 축복의 유산이 대물림되는 원리
12장 예언을 살아가는 올바른 원리
13장 야곱이 이스라엘로 자라간 원리
14장 진짜 복을 받고 복이 되는 원리
15장 두려울 때 필요한 영성의 원리
나가는 글 당신의 벧엘로 돌아가야 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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