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은 사람을 두 종류로 나눕니다. 죄의 종과 의의 종. 악한 자에게 속한 죄의 종, 그리고 하나님께 속한 의의 종, 이렇게 둘로 구분합니다. 그리고 그걸로 끝입니다. 제3지대를 소개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없기 때문입니다. 중립지대는 없어요. 하나님을 모시지 않은 인생은 반드시 어둠을 모시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자기도 모른 채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지금 그런 현실을 많이 봅니다. 나는 중립이라고 생각하는데 실상은 어둠을 택한 경우가 많아요. 인간의 자유를 누린다고 하면서 실상은 어둠으로 빠져드는 일들이 많아요. 인간의 자기 결정권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이 주신 존귀한 형상을 일그러뜨리는 일들이 많아요. 그 이면에 드러나지 않은 주인이 있습니다. 어둠의 주인입니다. 하나님을 모시지 않은 인생은 불가피하게 어둠을 모시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경고입니다. 중립지대는 없습니다.
우리 시대 신앙의 문제가, 탄식이 없어요. 가슴을 치는 탄식이 없어요. 심지어 탄식을 터부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탄식은 반신앙적 언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탄식은 신앙이 아니야. 신앙은 해피한 거고, 신앙은 발랄한 거지, 신앙은 인상 찌푸리고 탄식하고, 그런 거 아니야.” 맞는 말일까요? 말은 그럴싸해도 너무 피상적이고 너무 가벼운 신앙입니다. 물론 신앙에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신앙은 죄와의 투쟁이고, 그래서 때로 신앙은 탄식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구약 시편에 보면 탄식의 노래가 많습니다. 깊은 탄식을 노래하는 시들이 많이 나옵니다. 눈물로 침상을 띄운다는 표현도 나옵니다. 그만큼 성경이 탄식을 사랑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 시대 신앙의 언어에는 탄식이 잘 없어요. 탄식이 어색한 시대요, 탄식이 홀대 받는 시대입니다. 왜냐? 승리해서 그럴까요? 믿음의 싸움에서 늘 승리해서 탄식이 없는 걸까요? 아닙니다. 탄식이 없는 이유는, 투쟁이 없기 때문입니다. 투쟁이 없어요. 내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데, 정말 주의 자녀로 살아보겠다는 투쟁이 없어요. 투쟁이 없으면 탄식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