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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의 위로 기독교 강화

$30.00 $21.00

저자/역자 : 쇠얀 키르케고르/윤덕영,이창우  |  출판사 : 카리스아카데미
발행일 : 2022-03-14  |  (128*188)mm 328p  |  979-11-971751-9-0
● 누가 배신자인가? 예수를 팔아버린 가롯유다인가?
● 온 인류는 십자가 사건의 공범이다!
● 세상에서 나그네의 길을 홀로 걷다 지친 당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찬대 앞에 나와 위로를 받으십시오!

이 작품은 1848년 출판된 <기독교 강화>에 실린 4부의 강화 중 네 번째에 해당됩니다. 이 작품의 덴마크어 원 제목은 “Taler ved Altergang om Fredagen”으로 우리말로 ‘금요일 성찬식 때의 강화’로 옮길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은 성찬에 대한 탁월한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세상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는 믿는 자를 향한 위로와 권면을 담고 있습니다.

배신자
역자가 볼 때, 이 책의 핵심은 4장에 있습니다. 전체 강화가 성찬을 다루고 있음에도, 성찬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본문은 4장의 강화밖에 없고 4장에서 말하는 인간이 처한 실존 자체가 전체를 해석하는 데에 굉장히 중요한 가이드라인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4장의 성서 본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고전 11:23)
“The Lord Jesus, on the night he was betrayed, took bread”

이 구절을 더 정확히 옮기자면, “예수께서 배신당한 밤에”입니다. 키르케고르는 무엇보다 이 날이 주님께서 “배신당한 밤”이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도대체 누구한테 배신당한 걸까요? 가룟 유다일까요? 가룟 유다는 첫 번째 배신자에 불과합니다.
그날 밤, 배신자인 가룟 유다는 주님을 팔아 넘겼고 베드로를 제외한 나머지 제자들은 전부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성서에 의하면, 마가는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주님을 따라오다 주님께서 잡히시니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쳤다고 합니다.(막 14:51-52) 그렇다면, 주님의 제자라고 했던 자들이 정작 스승이 위험에 처해 있을 때, 도망을 쳤다면 이건 배신이 아니면 무엇입니까? 따라서 이 책의 4장에서는 이 제자들 역시 배신자라는 겁니다. 그럼 베드로는 배신자가 아닐까요?
베드로는 끝까지 절대 주님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했습니다. 하지만 그 역시 주님을 부인하고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의 스승을 부인했을 뿐 아니라 저주까지 했습니다. 결국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보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고 했는데, 첫 번째 예수님의 제자가 된 베드로는 마지막 배신자가 되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열 두 제자는 모두 배신자라는 겁니다.
그럼 이제 그 당시의 군중들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군중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호산나, 찬송하리로다!”라고 말하면서 대환영을 하였습니다. 마치 왕으로 오시는 분인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이 군중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 주님께 돌을 던졌고, 조롱과 핍박을 일삼았으며, 결국 십자가에 달려 죽게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군중들 역시 배신자 아닌가요?
따라서 이 책의 4장은 가룟 유다만 배신자가 아니라, 열두 제자 역시 배신자였고, 동시대를 살아갔던 사람들은 모두 배신자였다는 겁니다.
말구유에 오신 주님, 그분은 비록 천하디 천한 말구유에 오셨지만, 결국 왕이 되신다! 제자들뿐 아니라 그 당시 군중들은 왕으로 오신 주님을 찬양했던 것 같습니다. 점점 더 상승하는 길입니다. 하지만 그분이 오셨던 말구유는 어떤 곳입니까? 천하디 천한 말구유는 낮은 자리 중에 가장 높은 자리였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은 말구유에 오셨고 점점 더 하강하다가 왕이 되기는커녕 결국 십자가에 달려 죽고 말았습니다. 이게 누구 때문입니까? 배신자 때문입니다.
주님은 사랑이셨습니다. 사랑 때문에 온갖 조롱을 당했고, 사랑 때문에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조금이라도 이 사랑을 멈췄더라면, 이런 조롱과 핍박을 받지 않았을 겁니다. 사랑에게 가할 수 있는 가장 큰 타격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배신입니다. 배신은 사랑에게 가할 수 있는 가장 고통스러운 타격입니다.

과거의 역사적 사건?
그렇다면, 과연 이 사건은 과거에 있었던 역사적인 사실일까요? 성서에 대한 역사성 논쟁은 이 사건을 믿음으로 받는 자에게는 별로 중요한 이슈가 아닙니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다시피, 이 사건은 과거의 몇몇 잘못을 저질렀던 사람들에 의해 발생한 사건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십자가 사건을 “그것은 이미 오래전에 일어난 일입니다.”라고 덮어 버리려 합니다. 하지만 이 책은 이런 자세는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사건을 믿는 자에게는 절대 이 사건이 과거의 사건일 수 없고, 현존하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지만 그분의 죄 없는 희생은 아무리 고난의 잔이 비워졌을지라도, 지나간 일이 아니다. 과거에 지나간 일이더라도, 과거의 사건이 아니다. 1800년 전에 있었을지라도, 끝난 사건도, 완료된 사건도 아니다. 1800년 전에 있었을지라도 그럴 수 없다.”(본문 중에서)
주님은 병상에서 자연적인 죽음을 맞이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우연한 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또한, 그분을 공격하고 죽인 것은 몇몇의 개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그 세대가 저지른 잘못도 아닙니다. 바로 인류가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겁니다!

우리 역시 배신자다!
우리가 사람이라면, 우리 역시 인류에 속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 역시 이 사건의 공범이고, 배신자라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4장에서 밝히려 하는 겁니다. 기독교적으로 말한다면, 인간 실존의 본질은 ‘십자가 사건의 공범’이라는 겁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나’ 역시 배신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동의하십니까? 이 책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우리의 손을 함부로 씻을 수가 없다. 손을 씻는다면, 적어도 빌라도가 손을 씻는 것처럼 씻을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구경꾼도 아니고, 과거 사건의 관찰자도 아니다. 우리는 현재 사건에서의 공범이다.”
하지만 문제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 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자처럼 서 있기를 더 좋아합니다. 나는 절대 그런 배신자 일 수 없다는 겁니다. 내가 그 당시에 있었다면 적극적으로 주님을 변호했을 거라는 겁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그래서 이 책은 그 당시의 현장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고 권면합니다. 군중들 속에 있을 때, 저 위험천만한 군중들 틈에서, “저분은 진리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강력하게 변호할 자신이 있는지를 상상해보라고 합니다. 그럴 용기와 확신이 부족하다면 역시 배신자라는 겁니다.
우리 역시, 배신자임을, 온 인류가 십자가 사건의 공범임을 인정할 때, 바로 이것이 기독교적인 의미에서 인간이 처한 한계 상황입니다. 이것을 인정할 때, 인류가 사라지기를 열망하는 유일한 한 날이 있습니다. 바로 ‘주님이 배신당한 밤’입니다. 이 책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오, 나의 독자, 사람이 때로는 그의 삶에서 없어지기를 원하는 날이나 밤이 있는 것처럼, 인류는 역사에서 이날 밤만은 없어지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분이 태어난 밤이 어두웠다면, 배신당한 이 밤은 더 어두웠다!”
인류가 절대 기억하고 싶지 않은 날, 너와 내가 절대 기억하고 싶지 않은 밤, 바로 이 날 밤입니다. 배신했다는 아픔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그날 밤, 배신당한 밤, 주님은 배신자들을 초청해서 만찬을 베푸시기를 간절히 원하고 또 원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인류가 기억하기 싫은 이 밤을 기념하고,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인류가 사라지기 원하는 이 밤을 기념하라고 성찬식을 제정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4장의 본문이지요.

이 밤의 고백
무엇보다 4장의 핵심적인 부분 중의 하나는 키르케고르의 개인적인 고백입니다. 무엇보다 갑자기 1인칭으로 ‘나’가 등장합니다. 역자는 이 부분의 일부를 소개하고 싶군요.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만으로도, 경험 없는 젊은이가 행복하듯, 순진한 아이가 행복하듯, 일반 사람들이 행복하듯 경박하고 세속적인 방식으로 더 이상 행복할 수 없다. 세상에서 아무리 더 끔찍한 일이 일어난다 해도, 아마도 우리의 감각을 두려워 떨게 하는 것이기에, 마음을 두려워 떨게 하는 일이 일어난다 해도, 나는 더 이상 그런 것을 볼 필요가 없으리라.
나에게 더 이상 어떤 끔찍한 일이 일어날 필요가 없다. 나에게는 이것으로 충분하다. 즉, 나는 사랑이 배신당한 것을 보았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무언가를 이해했다. 나 역시 사람임을, 사람이 된다는 것은 죄 많은 인간이 되는 것임을, 나는 이런 것을 이해했다.
하지만 나는 이로 인해 사람을 싫어하지 않는다. 적어도 나는 다른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다. 다만 나는 그날 밤을 절대 잊지 않을 것이고, 나 자신에 대해 이해했던 것을 잊지 않을 것이다. 인류가 십자가에 못 박은 분은 속죄자이셨다. 인류에 속한 자로서, 나는 바로 이런 이유로 속죄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인류가 속죄자를 십자가에 못 박았을 때보다 속죄자에 대한 필요가 더욱 분명한 적은 없었다.”

성찬이 필요한 이유
결국, 우리가 그분의 성찬에 참여해야 하는 이유는 배신자이기 때문입니다. 인류가 배신자가 아니라면, 성찬은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성찬의 가장 큰 의미는 ‘용서’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책의 주제 중에 하나는 용서입니다. 이 사랑의 크기를 얼마나 경험하셨나요? 키르케고르는 이 사랑의 크기를 설명하기 위해 1장에서 누가복음 22장 15절을 인용합니다.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주님은 모든 것을 아셨습니다. 이미 자신이 배신자에 의해 죽음에 이를 것도 아셨습니다. 여러분은 배신자에 의해 죽게 될 것을 알았을 때, 배신자를 초대하여 만찬을 대접하기를 간절히 원하고 원할 수 있습니까?

누가 누구를 기념해야 합니까? 왕이 어느 작은 시골 마을을 방문했다면, 농부에게 간절히 부탁하며 제발 나를 좀 기억해달라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까? 오히려 농부가 왕께 매달리며 나를 좀 기억해 달라고 하는 경우가 맞는 것은 아닌가요? 그런데 주님은 왕보다 더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그분께서 지금 사랑의 만찬을 제정하시고, 제발 나를 좀 기억하달라는 겁니다. 그것도 배신자들에게 말입니다. 여러분은 이 상황이 이해가 되십니까?
이 말도 안되는 사랑이야기! 배신자가 쉴 수 있는 곳은 이 세상에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 주님의 사랑은 배신자가 쉴 수 있는 주막집과 같다는 것이지요. 나그네가 여행을 하다가 지치면 주막집에서 쉼을 얻듯, 주님의 성찬은 바로 그런 위로요, 쉼입니다.
제가 다 설명을 드리지는 못했으나, 결론적으로 모든 사람은 화해의 성찬에 참여할 필요가 있습니다. 4장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습니다.

“보라, 이제 모든 것은 준비되었다. 또한 자신을 위해 준비된 자에게 복이 있을지라! 보라, 거룩한 식탁에서 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신다. 그분을 기념하기 위해, 당신 자신에게 복이 되기 위해 이 성찬을 받으라.”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주님의 성찬을 통해 큰 위로를 얻기를 축복합니다. 이처럼 키르케고르의 이 작품은 4장을 구심점으로 하여 나머지 작품을 해석하면 좋습니다.

역자 해제: 약속과 실천의 변증법 「성찬의 위로」·15

Chapter 1 누가복음 22장 15절·41

Chapter 2 마태복음 11장 28절·81

Chapter 3 요한복음 10장 27절·99

Chapter 4 고린도전서 11장 23절·127

Chapter 5 디모데후서 2장 12-13절·155

Chapter 6 요한일서 3장 20절·179

Chapter 7 누가복음 24장 51절·205

부록
위기와 여배우의 삶에서의 한 위기·223
대장 스키피오 역의 피스터·285

대부분의 목사는 성경의 가르침을 바로 전달하고 있는지 점검합니다. 키르케고르의 글은 홍수가 나서 마실 물이 없는 곳에 오염되지 않은 샘과 같습니다. 「성찬의 위로」는 성찬의 의미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게 합니다. 성찬식은 단순히 종교 행위가 아니라 살아계신 예수님을 기억하는 시간입니다. 성찬식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죽음의 의미를 기억하는 사람은 죄 용서 받았으니 부담없이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게 살려고 몸부림을 치는 사람이라는 키르케고르의 가르침이 가슴을 울립니다. 성찬의 참 의미를 이해하고 삶 속에서 적용하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 권합니다.
이영호 목사_부천침례교회 담임목사

오늘날 철학자들은 물론하고 성서학자들도 관심두지 않는 이 많은 성경에 대한 키르케고르의 저작들을 오래전부터 외롭게 천착해온 한국의 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제가 사랑하고 아끼는 이창우 목사입니다.
이 목사는, 덴마크어를 배우고, 영어와 덴마크어로 키르케고르를 독해하고 나서 번역하고, 이를 온라인에 게시하고, 종국에는 종이책으로 출판하는 지난한 작업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는 또한 각 책마다 해제를 달고 있습니다. 그는 이 모든 작업을 지금까지 10년 넘게 혼자서 합니다.
독자제위께서는 이러한 몇 가지 배경을 염두에 두고 본 번역서를 읽는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자신의 믿음을 점검해보는데 지대한 감동을 받으실 것으로 확신하여 일독만 아니라 숙독을 권합니다.
장동수 교수_한국침례신학대학교 신약학 교수

「성찬의 위로」는 7개의 장으로 구성되었다. 1장 누가복음 22:15는 제자들과 유월절 음식을 먹자는 말씀이다. 마지막 식사를 하자는 말씀이다. 이 마지막 식사가 예수의 죽음을 의미하는 성찬이 되었다.
2장 마태복음 11:28은 잘 알고 있는 무거운 짐진 자들을 쉬게 하시겠다는 말씀이다. 이 말씀이 성찬과 어떤 상관성이 있는가? 무거운 짐은 우리의 죄책과 죄의식이다. 회개함으로 용서를 받고 속죄가 이루어짐을 통해 쉼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 일을 위해 내게로 오라는 초대는 구원자만이 하실 수 있다. 성찬은 주님의 초대에 응하여 죄의식의 짐을 지고 주님 앞으로 나가는 일이다. 그리고 은밀히 죄책을 고백함으로 영혼의 쉼을 얻게 되는 일이다. 여기에서는 성찬이라는 초대에 응하는 사람의 자세가 강조된다.
3장 요한복음 10:27은 양은 그분의 음성을 들으며 그분은 양을 아신다는 말씀이다. 성찬대에서 주님의 종을 통해 주시는 말씀을 통해 그분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면 그 성찬은 헛될 수 있다. 그분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면 그분도 나를 모를 것이고 나는 그분께 속한 사람이 아닌 것이다. 성찬에 참여하여 떡과 포도주를 받았을 지라도 그분이 나를 모르면 내가 받은 성찬은 무의미하게 된다. 여기에서는 그분의 음성을 듣는 일과 그분이 나를 아시는 일이 강조된다.
4장 고린도전서 11:23은 성찬식때 많이 사용되는 말씀이다. 이 부분에는 키르케고르의 역설적 표현이 많이 나온다. ‘그분은 왕으로 대환영을 받지만 조롱을 받는다.’ ‘자색옷을 입었으나 모욕으로 입게 된다.’ ‘사람들이 그분을 왕으로 선포하려고 했을 때 도망치셨다.’ ‘그분을 체포하러 왔을 때 파수병을 만나러 가셨다.’ ‘유다의 배신의 입맞춤을 거절하지 않으셨다.’ 키르케고르는 인류가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결과적으로 우리는 현재 사건에서의 공범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인류가 속죄자를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에 현재 속죄자가 더욱 필요하다는 점을 말한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배신했지만 그분은 화해의 성찬을 제정하셨다. 따라서 우리는 화해의 성찬에 참여해야 한다.
5장 디모데후서 2:12-13에는 ‘부인’과 ‘성실’이라는 용어가 나온다.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다. 우리가 성실하지 않더라도 주는 항상 성실하신 분이다. 우리의 불성실함을 성찬대 앞에서 고백함으로 짐을 내려놓고 주의 성실하심으로 위로함을 받아 영혼의 쉼을 찾으라고 말한다. 그것이 성찬이 주는 의미이다.
6장 요한일서 3:20에는 우리가 마음에 가책을 받는 일과 하나님의 크신 마음이 언급된다. 우리가 스스로를 고발할 때 하나님의 긍휼이 나타난다. 그때 하나님의 크심이 믿는 자에게 존재하게 되는데 이 표적이 성찬식이다.
7장 누가복음 24:51은 승천에 관한 말씀이다. 그분은 하늘로 올라가실 때 축복하며 떠나셨다. 축복은 우리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동의이다. 기도는 경건한 일이고, 하나님의 집에 가는 것도 경건한 일이다. 더욱 경건한 것은 성찬식에 참여하는 일이다. 성찬식에 참여함으로 주님을 만나게 된다. 성찬대 앞에서 우리의 죄와 죄책에 대한 속죄가 이루어진다. 그것이 주님의 축복이다. 성찬 자체가 복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글은 성찬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주고, 진지한 마음으로 성찬에 참여하게 해준다. 성찬을 통해 주님을 만나고 용서와 속죄의 기쁨을 갖는 복된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성찬은 이렇게 우리에게 위로를 준다. 이것이 키르케고르가 오늘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이다. 이 귀한 책을 번역한 이창우 목사님의 노고에 감사하며 일독을 권한다.
조은식 교수_키르케고르 학회 회장·숭실대 교수

쇠얀 키르케고르

19세기 기독교 사상사의 가장 뛰어난 신학자. 실존주의의 선구자. 헤겔과 함께 종교 철학자로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1813년, 덴마크 코펜하겐의 기독교 가정에서 7형제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강권으로 신학을 하는데 반감이 컸던 그는 방황하다가 1840년 <아이러니의 개념에 대하여>로 코펜하겐대학에서 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1841년, 철학 박사학위 논문 <소크라테스와의 지속적 관계를 통해 본 아이러니의 개념>을 발표하고, 연인 레기네 올젠과 파혼한다. 그 영향으로 1843년『이것이냐 저것이냐』를 썼으며, 그후『반복』,『 두려움과 떨림』 등을 출간한다.
1844년에 발표한 심리학을 다룬『불안의 개념』, 소크라테스와 역설적 그리스도에 관한『 철학적 단편』이 있다. 이 과정에 ‘하나님의 스파이’라고 고백한 그는 기독교 정신에 귀기울이면서 실존하는 주체로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몰두하였으며,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단독자’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1846년, 가명의 저서『철학의 부스러기』 또『철학적 부스러기에 대한 결론의 비학문적 후서』가 있으며, 그밖에 기독교의 본질을 각인시키는『사랑의 역사(役事)』,『그리스도교 훈련』,『 죽음에 이르는 병』, 『 자기 시험을 위하여』와 함께 읽어야 할 유고집『스스로 판단하라』 등이 있다. 그는 1855년 42살의 나이로 프레데릭 병원에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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