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두 번 묻지 않는다. 나를 따르라는 부름에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목숨을 예수께 걸었던 사람은 성경에 이름이 기록된다. 그런데 주저하고 망설이고 핑계 댔던 사람들은 그들이 주저했던 그것이 이름으로 대체된다. / 프롤로그 중에서 p. 12
그런데 만약 사명 없이 목사로 산다면 두려움에 휩싸여 버리고 걱정 속에 파묻혀 사는 종교 회사원이 될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은퇴를 걱정하는 ‘부장’과 갈 곳 없어 걱정하는 ‘부목사’는 글자 외에 차이점을 찾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이 책은 사명에 대한 것으로 채워질 것이다. ‘하나님과 존재’라 는 구도 속에서 사명이 무엇인지 성경에서 찾아내는 작업을 끊임없이 할 것이다. 대형교회 부목사라도 사명이 없이 살면 그건 연명(延命)이고 월급쟁이일 뿐이다. / p. 31
태어나기 전부터 예레미야를 아신 하나님이 예레미야만을 위한 사명을 준비하신 것처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는 각기 다른 사명이 있다. 그래서 이것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만약에 생업이 사명인 줄 착각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돌이킬 수 없는 길로 걸어가게 된다. / p. 59
만약 예수 옆에 착 붙어서 ‘좌우 자리’에 앉기를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사업을 하면 된다. 예수님 왕궁 입성하실 때 일등 공신이 되고 싶으면 다음 대선 때에 대선후보 옆에서 몸과 영혼을 불사르면 된다. 정말 그것이 목적이라면 위의 두 예시가 더 적절하고 더 빠를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그것을 줄 수가 없다. 그리고 이점이 아쉽지만 목사에게도 갈 곳을 제공할 수 없다. 미안하지만, 예수님이 능력이 없는 게 아니다. 백번 말해주고 제자들 이 글로 적어가며 증언까지 해줬는데 못 알다 먹은 당신이 바보이다. / p. 83
사명이란 그런 것이다. 비밀스럽게 하나님께 받고 그것을 스스로 묵묵히 지고 가야 하는 것. 마치 예수가 십자가를 지셨던 것처럼 말이다. 어차피 사명은 인간적이 아니기에 이해시킬 수 없고 배울 수 없으니 전수할 수가 없다. 오직 하나님과 나만이 이해하는 비밀스러운 영역이다. / p.145
‘예수-X가 0이라면 여기서 x의 값을 구하라’ 문뜩 생각이 나서 조그마한 포스트잇에 끄적인 글이었다. 하도 이상한 생각을 많이 하니 하다 하다 산수까지 하냐고 누가 그럴까 봐 다들 자는 시간에 홀로 책상에 앉아서 이 공식을 끄적이기 시작했다. 세상에 도대체 어떤 X가 예수를 0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을까? 0 자체가 무의미함을 뜻한다면, 0이란 수가 실패를 표현한다면, 0이란 숫자가 별 볼 일 없는 꼬라지의 대명사라면, 도대체 어떤 X값이 예수를 0으로 만들어버릴까? / p. 149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의 합리적인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고 싶다. 페르시아 서열 2위 다니엘이 올해를 마지막으로 은퇴한다. 그런데 자신이 더는 총리 자리에 없을 다음 해에 하나님의 백성이 1차로 예루살렘으로 귀환하게 된다. 만약 당신이 다니엘이라면 당신은 그 순간 무엇을 하겠는가? 지금 당신이 생각하는 그것이 다니엘의 사명이다. / p. 170
그러나 중요한 것은 타이틀이 아니다. 타이틀이란 말이 어려우면 ‘감투’란 말은 어떤가? 당신 머리에 씌워진 감투가 아니라 그감투를 벗고 난 당신이 중요한 것이다. 담임이란 감투? 부목사란 감투?, 아니면 박사라는 감투를 다 벗고 난 뒤에 당신. 그것을 벗고 난 뒤 당신은 무엇인가? / p. 209
그렇게 쌓아나가던 것들이 『어쩌다 쿠팡으로 출근하는 목사』에서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솔직히 내가 읽고 소장하려고 쓴 자서전 같은 책이라 누가 읽겠냐고 생각했는데 지금까지도 SNS 후기가 올라오는 것을 보면 신기하기도 하다. 그리고 미안했다. 내가 그렇게 교회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말이다. 그러나 적어도 내 안의 하나님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 책을 쓰고 있다. (중략) 그러나 내 뒤에 시퍼렇게 눈을 뜨시고 나를 재촉하시는 그분의 마음은 아직 그곳에 남아계신 것 같다. 그래서 쓴 책, 사명이다. / 에필로그 중에서 p. 2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