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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 현대성서주석 / 목회자와 설교자를 위한 주석 (Interpretation : A Bible Commentary for Teaching and Preaching)

$32.00 $22.40

발행일 : 2000-07-20  |  신국판 (153×225) 양장 288p  |  89-398-0236-5
사도행전 주석은 윌리암 윌리먼은 누가 – 신학 연구에 있어서의 최신 발견들을 지교회의 목회, 교육, 신학적 관심사들과 결합시킴으로써 사도행전의 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한다. 그는 사도행전의 목적이,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하는 데 있지 않고, 그들의 고전문화의 내습(來襲)에 맞설 수 있도록 교회의 정체성을 제공하려는 데 있었다는 관념의 토대 위에서 본서를 주석한다. 그는 해설에 신중을 기한다. 그리고 주석의 통찰력을 오늘의 사회와 지교회의 문제들에 결부시킨다. 교회는 자체의 메시지, 내적 결집, 순전성, 그리고 주변의 사회 및 정치질서와의 상관 관계에 있어 힘겨워할 때가 있다. 윌리먼은 바로 이때 사도행전이 교회를 향하여 말을 걸어 온다는 가정 아래 본서를 쓰고 있다. 윌리먼의 생동감 있고 직설적인 문체는 오늘의 사도행전 설교자들과 해설자들의 혼을 자극하며 그들에게 상념을 제공한다. 그는 사도행전의 본문을 다양한 사고(思考)의 단편들로 나눈다. 그리고 그것들을 간결한 수필형식으로 다룬다. 그의 방법, 구상, 개요, 제안은 사도행전을 최상의 통찰력으로 해설하게 해준다. 이 주석은 교회에서 성경을 해석하는 이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 자료로서, 무엇보다도 성경을 가르치고 설교하는 일에 도움을 주려는 의도에서 집필되었다. 이 탁월하고도 새로운 현대성서주석은 오늘날의 말씀사역에 큰 기여를 하게 될 것이다. 이 주석시리즈는 역사적인 연구와 신학적인 이해를 결합시킴으로써 성경본문에 대한 풍부한 해석을 제공한다. 또한 이 주석은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이해하게 함과 동시에, 그러한 이해를 가지고서 오늘날의 삶과 신앙이 안고 있는 비판적인 문제들과 더불어 대화를 나눌 수 있게 해 준다. 성경을 가르치는 이들과 설교자들, 그리고 성경을 진지하게 연구하는 모든 이들은 여기서 성경본문의 현대적인 의미와 그 중요성을 발견하는 일에 대한 해석학적인 책임성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한 성서 주석을 만나게 될 것이다. 이 시리즈의 각 책들은 본문에 있는 언어의 의미를 문학적이고 역사적인 맥락 안에서 규명함과 동시에, 본문의 의미를 그 본문이 교회의 예전과 신학에서 어떻게 사용되는가에 비추어 이해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또한 각 책들은 본문이 오늘날의 신앙과 삶에 접근하는 다양한 방법들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그리고 이 주석은 설교자나 성경을 가르칠 때 성서의 각 책들을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그 책들의 중심 의도나 예전적이고 신앙고백적인 전승과 성구집 등에서의 용례, 그 책들이 기독교 윤리와 신학에 대하여 갖는 특별한 의미 등을 폭넓게 고찰하였다.

[본문 85-89쪽 ‘제1부 예루살렘, 유다, 사마리아에서의 증언’중에서…]

제1부 예루살렘, 유다, 사마리아에서의 증언

3:111-26
사람들 앞에서 증언

예루살렘에 있는 거대한 성전의 현관은 사도행전에 있는 베드로의 주요 연설 중 두 번째의 배경이 되고 있다. 고침을 받은 사람이 아직도 베드로를 붙잡고 있는데, 베드로는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지를 설명한다. 무슨 일이 있어났든 그것은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3:12)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 치유는 예수의 이름에 의하여 이루어졌다(3:16). 예수는 로마의 관헌에서 넘겨졌으며 살인자를 대신하여 죽음을 당하셨다고 했다. 우리는 누가에게서 대속(代贖)을 전혀 발견하지 못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어떤 공의(公)義)의 요청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죽으셔야 한다는 그 어떤 관념도 찾을 수 없다. 사도행전에서 예수의 죽으심에 대한 설명은 단순히 인간의 패역에 의함이다. “너희가… 죽였도다…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3:14-15) 라는 식의 어투는 누가의 특징이다. 누가에게는 우리가 바울의 저작들에서 볼 수 있는 십자가의 신학이 거의 없다. 십자가는 인간이 구원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권세를 감추심의 표현이라는 바울 신학이 주장이 여기서는 보이지 않는다. 누가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 받은 분이 배척을 당하는 불명예스러운 표적(sign)이다. 사람들을 구하기 위하여 오신 그가 그 사람들에 의하여 배척을 당하셨다. 그리고 그 십자가는 비극적인 인간의 “아니요.”인데, 하나님은 이를 부활의 권능인 “예.”로 극복해 주셨다. 하나님이 메시야를 만나게 되자 인간들은 함께, 진리 앞에서 종종 그렇게 하듯이 폭력과 십자가에 못박는 일을 자행했다. 다행스럽게도 하나님은 자신의 행위 – 부활 – 로 인간들의 행위에 반응을 보이셨다. 예수를 따르는 자가 된다는 것은, 인간의 배척(3:15)에 대한 반응으로 보여 주신 하나님의 권세 있는 행위를 증언하는 증인이 됨을 의미한다. 17절에서 베드로는 그의 청중을 “형제들아”라고 부르고 있다. 그들이 “알지 못하여서” 저지른 어떤 행동이라도 그들이 배척했던 구주를 영접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음을 확신시키면서 그렇게 부르고 있다. 이 그리스도는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분이시다(3:20). 지금 할 일은 오직 하나, 회개이다. 단호한 방향전환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회개하지 않으면 형벌은 무섭다. 이전에는 그 백성이 알지 못하는 중에 행동했다. 그러나 지금은, 베드로의 연설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주되심(Lordship)이 모세뿐 아니라(3:22)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3:21)에 의하여 예고되었음이 분명하다. 사무엘로부터 모든 선지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체화된 그 진리를 줄곧 선포해 왔다. “…땅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3:25)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의 약속은 성취되었다. 예수에 관하여 선지자들이 예언한 그 진리를 인정하지 않는 자들은 “…백성 중에서 멸망 받으리라.”(3:23)는 말씀대로 무서운 운명을 만날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로 돌아오지 않는 유대인은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오직 누가적 주장의 기초 위에서 이렇게 주장할 수 있었다. 누가적 주장이란, 참이스라엘은 조상들과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에게 신실한 자들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어느 시대에나 이스라엘 중 어떤 이들은 순종했고 다른 이들은 불순종했다. 하나님의 약속에 신실한 자들은 참이스라엘이라는 칭호를 받을 만하며, 순종치 않는 자들은 이스라엘 밖의 사람들이다.
냉혹하고 가혹한 논쟁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논쟁, 교회에 관한 한 누가가 사도행전을 쓰기 오래전에 끝내 버린 논쟁이지만,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계속되고 있었던 그 논쟁을 듣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 논쟁은 누가 참이스라엘인가로 다툰다. 이 논쟁은 앞으로 몇 장에 걸쳐서 계속될 것이다. 지금 베드로는 경직된 태도로 그 문제를 제시하고 있다. 그 경직된 태도로 보아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누가 참후가 인가를 놓고 생과 사를 다투는 논쟁을 하고 있음을 주시하자.
사도행전의 현시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들만을 위하여 오셨다. 이는 역사의 여명기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해주신 약속의 성취이다. 하나님은 “그를 우리에게 먼저 보내셨다”(3:26). 그러나 이 선물은 단순히 생물학적 상속의 문제가 아니다. 선택받은 이스라엘이라도 이 좋은 소식의 참여자가 되려면 회개하고 그들의 길에서 돌이켜야 한다. 제2대 이스라엘이란 있을 수가 없고, 하나님께는 손자란 없다. 오직 회개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돌아서는 자들만이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다. 선택을 받은 자들, 이스라엘 안에 있는 자들이라도 지금 회개해야 하고 이 새로운 질서를 향하여 그들이 스스로 갖는 허망한 보장으로부터 비켜서야 한다. 회개하라는 베드로의 권유는 누가복음 시초에 있는 세례 요한의 설교를 생각나게 한다 :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눅 3:8-9). 오늘날 생물학적, 타고난 권리에 의해 구원을 받았다고 잘난 척 자신(自信)하도록 유혹을 받을 수도 있는 현대의 교회는 하나님의 결의(決意)에 대한 베드로의 설명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하나님의 결의는 약속에 충실한 자들을 자기 백성으로 하신다는 것이다. 말씀을 듣고 회개한, 어찌할 바를 몰랐던 군중으로 구성된 사람들이거나 요단강에 있는 돌멩이들로 만들어 낸 백성이거나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소유하실 것이다. 우리들은 어느 편에 서게 될 자들인가?

4:1-22
관원들 앞에서 증언

부활에 대한 사도들의 증거로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당국자들은 곧 자기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하여 행동에 들어갔다. 기성 권력집단은 사람들 사이에서 일고 있는 골치 아픈 동요(動搖)와 전통적인 자기네 풍습을 교란하는 이 새로운 사상을 향하여 반응을 보였다 – 당국자들이 베들와 요한을 체포한 것이다. 그들은 재빠르게 행동하는 것이 좋다고 여겼다. 왜냐하면 지난번 오순절날에는 베드로가 말하자 삼천 명이나 개종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은 성전 앞에서, 바로 그 기성종교의 중심부에서 오천 명이 회개를 했다. 이 예수 소동은 대중운동으로 번질 위험이 컸다. 누가는 이 장면을 아름답게 극적 어조로 그려내고 있다. 한쪽에는 관원들, 장로들, 이 수도(首都)의 서기관들, “대제사장의 문중”(4:6) 사람들이 서 있다. 그리고 다른 쪽에는 “학문 없는 범인”(4:13)들인 베드로와 요한이 서 있다고 했다. 관원들의 심문은 일반적인 질서파괴자들에게 통상적으로 하는 그것이었다 – 이 모든 행동을 하도록 누가 너희에게 권한을 주었는가? 관원들은 일반적으로 자기들이 권세와 권력의 사람들과 기관들을 적절히 좌우할 수 있다고 자처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권력의 힘이 베드로와 요한 같은 비천한 사람들에게 작용하지 않게 될 때 충격을 받는다.
베드로와 같은 사람이 그러한 권력의 집단 앞에서 항변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오직 성령에 의함이었다. 그리고 그가 말할 때 서두에 어떤 풍자적인 자극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베드로와 요한은 일반 범죄자들처럼 당국자들 앞에 끌려갔다. 그들의 범행은 무엇이었는가? 병인(病人)에게 행한 착한 일(4:9) 때문에 혐의를 받고 있지 않았는가!
그 민족의 건축자들이 민족의 열망에 가치 없는 초석이라 하여 배척했던 그 돌은 미래 소망의 머릿돌이 되었다(4:11). 이제 당국자들은 어려운 문제에 부딪쳤다. 그들은 두 사람의 교육받지 못한 자들에 의하여 구석으로 밀렸다. 기적의 치유는 나타나 있었다. 만약 그들이 이 두 명의 성가신 보통 사람들을 압박한다면 군중 사이에서 문제가 생겨날 수 있었다. 결국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백성의 유익을 위하여 존재하는 척해야 했다.
그리하여 당국자들은 모든 권력자들이 언제나 그렇게 하듯이 첫 단계 조처를 취했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으로 하여금 침묵하도록 명령했다 – 출판 금지, 보도매체 억제, 서책 판매금지 – 관리들은 사람들이 그 보도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방안으로 이와 같은 방법들이 있다고 언제나 기대한다. 불행하게도 관원들이 성령 충만한 사도들을 침묵하게 하려던 시도는 부서지는 파도를 밀어내려는 시도와 같았다. 이들 증인은 기본적으로 말썽을 일으키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보고 들은 것을 말하는(4:20) 자유를 원했다.
이 순간에 그 당국자들이 할 수 있는 전부는 그들을 위협하고 놓아주는 것이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예수에 관한 누가의 기록 중에서 이와 유사한 것들을 생각해 낸다. 예수께서도 권력자들과의 충돌을 향하여 나가셨는데, 예수를 따르던 자들도 그렇게 하고 있다. 권세자들이 예수의 입을 막으려는 시도에 처음부터 실패했었던 것처럼, 당국자들도 베드로와 요한이 말을 못하도록 하는 일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뿐만 아니라 누가복음 안에서도 당국자들의 반대와 결의는 점차 굳어져 갔는데, 우리는 지금 그 반발의 시작을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반발은 하루 만에라도 그 어린 교회에 큰 상처를 줄 만한 충분한 세력을 갖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께 가해졌던 모든 것이 그를 따르던 자들에게도 가해지고 있는 것 같다.
베드로와 요한이 교우들에게로 돌아옴에 있어서, 우리는 베드로가 백성 앞에서 말했을 때 오천 명이 회개하고 이 운동의 한 부분이 되었음을 중시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매우 동일한 증언을 당국자들 앞에서 했을 때에는 베드로와 요한은 쫓겨났고, 그 누구도 구원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상이 교육도 못 받고 무지하다고 여겼던 사람이 권력을 가진 일단(一團)의 사람들을 무력하고 혼란에 빠진 것처럼 보이게 한다.

한국어판 발간사
한국어판 기획, 편집에 즈음하여
한국어판을 위한 서문 / 제임스 L. 메이스
시리즈 서문
저자 서문 / 윌리암 H. 윌리먼

서론
사도행전이란?
사도행전의 목적
데오빌로 각하
사도행전의 그리스도
사도행전의 위치
사도행전의 설교들

▶ 주석
머리말
사도행전 1:1-26

1:1-14 회복을 기대하며 기도
1:15-26 공동체의 지도자 보완

제1부 예루살렘, 유다, 사마리아에서의 증언
사도행전 2:1-9:43

공동체의 탄생 : 오순절날의 사건 2:1-47
2:1-13 강력한 바람소리 : 오순절
2:14-41 사건의 의미 : 오순절날의 설교
2:42-47 공동체 안에서의 복음의 실현
복음의 역할 3:1-4:31
3:1-10 성전에서의 신유와 증언
3:11-26 사람들 앞에서의 증언
4:1-22 관원들 앞에서의 증언
4:23-31 담대한 증언을 위한 기도
안과 밖에서의 도전 4:32-6:7
4:32-5:11 재물이 연관된 도전
5:12-42 다시 병고침과 다시 일어난 반대
6:1-7 공동체 내부의 지도력
스데반이 사건 6:8-8:3
6:8-7:53 체포와 증언
7:54-8:3 스데반의 순교와 교회에 대한 핍박
예루살렘 밖에서의 전도 8:4-9:43
8:4-25 복음은 마술이 아니며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것
8:26-40 방해받지 않은 복음
9:1-19a 방해받지 않은 복음
9:19b-31 핍박자가 핍박받는 자 되다
9:32-43 베드로가 애니아를 치료하고 다비다를 살려내다
특주(特註) : 누가와 동료 유대인들

제2부 이방인 전도
사도행전 10:1-19:20

이방인 선교 시작 10:1-14:28
10:1-11:18 이방인에게도 전도
특주(特註) : 사도행전에 나타난 개종
11:19-30 두 회중 : 안디옥과 예루살렘
12:1-25 핍박과 구출 : 왕들을 경계하다
특주(特註) : 누가의 정치론
13:1-14:28 이방인 선교를 확정 : 바울과 바나바의 사역
선교에 성공, 교회에는 문제 15:1-35
여러 교회에서 사역 15:36-19:20

15:36-16:10 계속된 이방인 선교 : 마게도냐로
16:11-40 빌립보에서의 투옥과 석방
17:1-15 소란해진 제국 : 데살로니가와 베뢰아
17:16-34 아덴에서의 바울, 문명인들의 우상숭배
18:1-19:20 바울이 얻은 성공과 기회

제3부 마지막 선교 여행
사도행전 19:21-28:31

교우들을 격려 19:21-21:16
19:23-41 에베소의 소요
20:1-12 위로의 복음
20:13-38 교회의 지도력 : 바울이 에베소의 장로들에게 당부하다
21:1-16 제자됨의 대가
바울이 붙잡혀 로마로 가다 21:17-28:28(29)
21:17-26 예루살렘으로 돌아옴
21:27-22:21 하나님을 향한 열심 – 바울이 성전 뜰에서 연설하다
22:22-23:11 공회 앞에서 답변
23:12-25:12 너희 안에 있는 소망을 인하여!
25:13-26:32 아그립바 앞에서 답변
27:1-28:16 위험한 항해
28:17-28(29) 하나님의 구원
방해 없이 설교하고 가르치다 28:30-31

참고문헌

윌리엄 윌리먼

Duck University에서 기독교 선교분야의 교수로 재임하고 있다. 또한 그는 Georgia South Carolina의 United Methodist의 목회사역을 지원하고 있으며, 그의저서로는 Integrative Preaching, Preaching and Leading Worship and Peculiar Speech을 포함하여 다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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