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체스코 레포레는 대략 열두 번의 인터뷰를 통해 바티칸의 게이 열풍에 대해 말해 주었다. 그의 증언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그의 연인들은 대주교들과 고위 성직자 중에 있었다. 그는 우리가 이미 논한 여러 추기경으로부터 성관계 제의를 받았다. 물론 그 목록은 끝이 없다. 나는 꼼꼼하게 그 이야기들을 전부 확인하였고, 관련 추기경들과 대주교들, 몬시뇰들, 교황 대사들, 부제들, 그리고 성 베드로대성당(St. Peter’s)의 일반 사제들과 고해 신부들을 다 만나보았는데 전부 실제로 동성애자들이었다. -p.48
그의 공적인 말은 때때로 그의 사적인 행동과 상충한다. 따라서 프란치스코는 끊임없이 이주민들을 보호하지만, 게이 결혼을 반대하기 때문에 밀입국 게 이 이주민들이 고정 파트너가 생겼을지라도 합법적으로 영주하지 못한다. 프란치스코는 또한 자신을 ‘여성주의자’라고 부르지만, 아기를 갖지 못하는 여성들의 의학적인 불임 치료 선택권을 거부함으로써 여성들의 선택을 박탈한다. 몬시뇰 비가노는 그의 2018년 『증언』에서 교황이 동성애자들에게 둘러싸여 있고 또한 지나치게 게이 우호적으로 보이면서도 동시에 젊은 동성애자들에게 ‘정신병 치료’(비가노는 교황이 이 말을 한 후 후회했다고 말한다)를 받을 것을 제안했다고 비난했다.-p.100
바오로 6세에게 비밀이 있었을까?
1963년에서 1978년 사이에 15년 동안 교황이었던 그 남자의 동성애에 대한 소문은 셀 수 없이 많고, 나는 여러 추기경과 아주 자유롭게 그 소문들에 관해 대화해 왔다. 국무원의 비밀 기록 보관소에 접근할 수 있었던 사람은 그 주제에 관한 여러 파일이 있다고 확신시켜 준다. 하지만 그것들은 공개되어 있지 않고 우리는 그 파일들이 무엇을 담고 있는지 모른다.
그 모든 복잡함 가운데 이 교황을 둘러싼 비밀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와 관련된 상황을 그대로 보아서는 안 된다. 증거가 부족하므로 한꺼번에 증거 전체를 훑어보는 것이 중요하다.-p.232
그러나 가톨릭의 공적인 강화(講話)는 1970년대 후반에 강경해졌다. 가톨릭교회는 1960년대에 기대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했던 도덕 혁명이 발생하자 곤경에 빠졌다. 이 문제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취하지 않았던 교황 바오로 6세는 1975년에 그 유명한 ‘선언문’인 페르소나 휴마나(Persona Humana, 개인생활)를 선포했다.
이는 회칙(回勅) 『휴마네 비테』(Humanae vitae, 인간의 생명)의 핵심 내용 중 일부다. 그 선포는 사제의 독신과 정절에 대한 가치를 분명하게 하였고, 성관계를 금지하였으며 동성애를 격렬하게 거부했다.-p.348
하지만 베네딕토 16세는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교황 교서, 브리핑, 연설, 편지, 메시지 등, 게이 결혼에 반대하는 그의 싸움은 끝이 없다. 그는 교회와 국가 사이의 분리를 공개적으로 경멸하면서 공개 토론에 자주 개입했고, 그의 배후에서는 교황청이 모든 게이 결혼 반대 시위를 조작했다.
하지만 매번 똑같은 실패를 했다. 그러나 여기서 다시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그 전투에 참여한 사람 중 많은 사람이 동성애 애호가들이거나, ‘밀실에 있는 동성애자들’ 또는 동성애 행위를 하는 자들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종 종 ‘그 교구에’ 속하여있었다. -p.58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