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대학교 입학이 1973년도이니, 벌써 40년이 넘었다. 이제야 소명이 무엇인지가 손에 잡히는 것 같다. 무슨 말인가? 소명은 한순간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라 그의 삶 전체로 완성된다. 한순간의 소명의식을 짜릿하게 경험하는 것보다는 전체 삶의 과정에서 소명의식의 깊이로 시나브로 들어가는 게 더 중요하다. 더 중요한 정도가 아니라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모세가 호렙 산에서 경험한 소명이 옳은 이유는 그의 전체 삶이 그걸 보증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소명은 목사만이 아니라 모든 기독교인의 삶과 관련된다. 그걸 평생 인식하고 사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다. 거칠게 표현하면, 전자에 속한 사람은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사람이고, 후자는 잠들어 있는 사람이다. (“목사란 누구인가?” 중에서)
나는 수도원 전통의 수행이 모든 기독교인에게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수도원 전통에서의 수행은 크게 봐서 기도와 노동이다. Ora et labora! 기도하라, 그리고 노동하라! 기도는 영혼의 활성화이며, 노동은 몸의 활성화다. 기도에는 단순히 기도만이 아니라 말씀 읽기와 명상과 깊은 대화가 다 포함된다. 기도와 노동은 어원적으로도 뿌리가 같다. lab-ora! 유감스럽게도 오늘 한국교회는 기도마저 종교적 여흥의 수준으로 떨어뜨렸다. 기도의 영성에 침잠하기보다는 기도의 방법론에 심취해 있다. 그런 방식으로는 수행이 일어날 수 없다. 수도원에서는 노동도 수행이다. 수도사들은 모두 각자 맡은 노동의 역할이 있다. 청소, 식사 준비와 설거지, 공구 제작, 텃밭 가꾸기, 소나 양 키우기 등등이다. 규모가 어느 정도 되는 수도원에는 자체 출판사나 학교도 있다. 노동이 수행인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의 몸을 만들었다는 사실에 놓여 있다.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면 우리의 몸은 신성과 연결된 것이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롬 12:1)는 바울의 충고도 이런 신앙에 근거한다. 동양의 스승들도 몸의 수행을 중요한 공부로 여겼다. 제자가 오면 그에게 도량(道場) 청소를 맡긴다. 물을 긷고, 밥을 짓고, 나무를 해오게 한다. 그게 다 그들에게 수행이다. (“목사란 누구인가?” 중에서)
헌금 행위에는 교회의 살림살이에 실존적으로 참여하는 것만이 아니라 더 근원적인 차원이 포함되어 있다. 신구약성서가 줄기차게 외치고 있는 물신주의에 대한 항거가 그것이다. 모세오경을 비롯해서 구약 예언자들의 예언은 가나안 원주민의 신앙인 바알 숭배와의 투쟁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바알은 풍요의 신이었다. 바알을 섬긴다는 것은 풍요를 통해서 생명을 경험하자는 것이다. 그것은 곧 물신주의다. 실제로 가나안 사람들은 광야 40년 생활을 통해서 생존에 급급해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볼 때 화려한 문명을 구가했다. 자연히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알에 호기심을 보일 만했다. 이에 맞서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바알 숭배의 유혹을 단호히 거부하라고 외쳤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정확한 지적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충고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예배” 중에서)
천민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공고화된 한국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이런 영혼의 풍요와는 담을 쌓고 살아간다. 재물이 신이 되었다. 이런 데 대해 문제의식이 있는 사람도 여기서 벗어날 길이 없다. 그런 구조와 함께 그냥 굴러간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해서 섬길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고 있는 교회도 세상과 다를 게 하나도 없다. 오히려 세상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사업을 확장하고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 골몰하는 기업처럼 교회도 외형적 성장에 매진한다. 영혼의 안식과 영혼의 풍요와 자유에는 아예 관심이 없다. 이런 데 대해 문제의식이 있는 목사도 이런 구조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다른 이들도 동의하겠지만 한국교회는 영혼의 풍요와는 거리가 멀다. 실제로 교회생활을 하는 많은 신자가 영혼의 만족을 모른다. 영혼이 빈곤하다고 말하는 게 옳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어떤 사태인지조차 느끼지도 못하고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다. (“하나님 경험과 시 경험”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