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추구하는 것은 과거와 동일합니다. 시편 1편의 시인이 살던 시대에 사람들이 무엇을 찾고 있었는지 아시나요? 바로 “행복happy”입니다. “이런 사람은 행복하다.” 그렇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복이 있다, 즉 행복하다는 말이지요. 그들은 행복을 찾고 있었고, 시인은 그것을 알았습니다. 시인도 행복을 찾고 있었으니까요.
오늘날 사람들의 근본적인 필요도 여전히 행복입니다. 우리는 행복하기를 원하는 인류 역사상 첫 번째 사람들이 아닙니다. 인류는 언제나 행복을 추구했습니다. 인생, 역사, 문명의 이야기 전체가 거대한 행복 추구의 과정입니다. 누구도 비참해지기를 원하지 않고, 누구도 불행해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모 두가 기쁨과 행복과 즐거움을 추구합니다. 즉 인간의 상태는 정확히 동일하고, 새로운 것이 전혀 없습니다.
여러분은 “하지만 세상을 보세요”라고 말하지만 세상은 언제나 지금과 같았습니다. 세상은 전쟁과 질투의 장소, 시기, 악의, 원한과 실망의 장소였습니다. 언제나 그랬습니다. 형태가 다를 수는 있지만, 본질 자체는 전혀 달라지지 않습니다. 옛날에는 대포가 무시무시했다면 오늘날에는 폭탄이 무섭다 정도의 차이입니다. 형태만 바뀌었을 뿐입니다. 이 세상의 본질적 조건, 이 세상 삶의 위태로운 형편은 새롭지 않습니다. 해 아래 새것은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오래된 가르침에서 떠날 필요가 없습니다. 동일한 문제를 직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가 여러분께 시편 1편에 관심을 기울이라고 말씀드리는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가르침God’s teaching”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모든 책은 인간의 가르침입니다. 저는 철학자들 이 행복의 문제를 탐구했다는 것을 압니다. 그들 중에는 유토피아에 대해 쓴 사람들도 있습니다. 철학의 본질은 행복 추구, 복의 추구였습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철학은 모두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하지 만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행복 처방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처방! 그래서 저는 성경으로 돌아갑니다. _본문 중에서
행복의 비결
지금까지 부정적인 사실을 말했습니다. 긍정적인 사실에 대해서 간단히 소개하겠습니다. 이것은 제가 서두에서 소개한 이론이 행동으로 옮겨진 것일 뿐입니다.
행복의 비결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철학자들의 영리함이나 소위 사상가들의 추측이 아니라, 불경건한 자들의 도모와 생각이 아니라, 주님의 법, 즉 성경, 하나님의 통치, 신구약성경, 율법과 복음을 즐거워하는 일입니다. 제게 필요한 일들이 이 안에 다 있습니다. 행복으로 가는 하나님의 길이 제 앞에 온전히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복 있는 사람들은 율법을 즐거워합니다. 그들은 율법에 지적인 관심만 갖지 않습니다. 율법대로 행하지 않는 것이 두렵고 죄의 결과가 두렵다는 이유에서만 율법을 읽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단순히 실용주의자들이라서 유용성을 기대하고 율법을 들여다보는 것이 아닙니다. “정직이 최선의 방책이야. 나는 성공하고 싶어. 그래서 나는 어떤 일들은 하지 않아.” 이것은 그들의 태도가 아닙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합니다. 그것을 아는 데서 큰 즐거움을 느낍니다. 그들은 “이거 멋지지 않아?”라고 말합니다. “율법을 주야로 묵상”합니다. 그들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이와 같은 것은 없습니다. 다른 모든 것은 헛되고 엉터리고 도깨비불과 같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리,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참으로 경이롭게도! 율법은 효과가 있습니다. 율법은 내가 원하는 것을 줍니다.” 그들은 율법을 즐거워합니다. 이들이 행복한 남자, 행복한 여자입니다.
시편 기자의 방식대로 표현해 보겠습니다. 한글 번역에는 약간의 아쉬움이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 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시편 기자가 쓴 내용은 이렇습니다. “오 이런 사람의 복됨이여!”
왜 이렇게 썼을까요? 시편 기자는 복의 온전함, 다양성, 광범위함을 드러내기 위해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이루 다 묘사할 수가 없다. 오 복됨이여. …… 얼마나 멋진가!” _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