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영적 스승 헨리 나우웬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우리 일상에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을 소개한다. 현대인을 위한 ‘영성 훈련’의 핵심을 압축해 담은 시리즈, 《헨리 나우웬의 일상의 예배》. 통찰력과 깊이를 겸비한 내용을 저자 특유의 간결하고 쉬운 문장으로 표현해냈다. ‘영성’이나 ‘헨리 나우웬’에 막연히 거리감을 느꼈던 이들이라면, 이 책을 통해 영성 도서 분야에 입문해도 좋을 것이다. 각 권은 휴대하기 편한 작은 사이즈에 가볍게 읽을 수 있는 분량이다. 또한 곳곳에 일러스트를 배치해 헨리 나우웬의 글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소장용 도서, 가족이나 지인들에게 선물용 도서로 환영받을 만하다.
이 시리즈는 저자의 삶이 살아 숨 쉬는 ‘일상의 증언’이다. 저자 자신이 평생 실천하며 체득한 제자도이기에 그 내용에 더욱 힘이 있으며, 이 시대를 사는 이들에게 ‘상처 입은 치유자’로서 큰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한 줄 한 줄 밑줄 그으면서 읽게 되는 책!
돌봄은 인간의 모든 몸짓 중에서
가장 인간다운 것이다.
조건 없이 마음을 열고
사랑으로 함께하는 훈련
대중매체와 인터넷, SNS의 발달로 세상은 유례없이 하나가 되었다. 전 세계 구석구석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전파를 타고 그 어느 때보다 발 빠르게 생중계되고 있다. 실시간으로 다양한 정보들을 공유하고 실어나르지만, 그중 화려하고 그럴 듯해 보이는 것에는 지나치게 열광하면서 아픔과 고통은 쉽게 외면하고 만다. 또한 그 어느 때보다 자기를 챙기고 자기 삶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심화되고 있다.
헨리 나우웬은 「삶의 영성」, 「귀향의 영성」에 이은 시리즈 세 번째 편, 「돌봄의 영성」에서 이런 시대를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을 실천하는 제자의 삶을 살라고 권면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긍휼의 삶’이다.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주위로 시선을 돌려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를 돌보고, 그들과 ‘존재 자체’로 소통하는 법을 배우라는 것이다. 미국 하버드대학교의 존경받는 교수이자 학자였던 헨리 나우웬은 생애 마지막 10년간 캐나다 라르쉬 데이브레이크 공동체에서 발달장애인과 함께 생활한 경험을 바탕으로 ‘돌봄의 영성’을 역설한다.
누군가를 돌보는 일은 신체적, 정서적, 영적으로 엄청난 도전이자 선물이다. 친밀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상대로 직접 ‘불 시험’을 경험한 헨리 나우웬은 이 책에서 ‘돌봄’의 양면성을 진솔하고 깊이 있게 파헤친다.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이 누군가를 돌보는 과정에서 차가운 분노, 뒤섞인 감정, 죄책감 등이 쌓였던 경험을 솔직하게 고백한다. 그리고 인정과 지지와 위안을 얻고 싶었던 내면의 절규, 자신의 부족함과 한계를 뼈저리게 맛본 순간들도 가감 없이 보여 준다.
이렇듯 ‘돌보는 일’의 모든 어려움을 투명하게 밝히면서도 저자는 독자들이 용기를 내서 다시 마음을 열고 지극히 인간다운 열망을 되찾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책을 썼다. 돌봄을 주고받을 때 비로소 우리가 가장 인간다워지기 때문이다. 돌봄이 ‘돌보는 사람’과 ‘돌봄을 받는 사람’ 양쪽 다 사랑 안에서 자라가는 소명이며, 양쪽 다 내적 치유와 해방과 변화를 경험하는 기회임을 헨리 나우웬은 체험으로 알았다.
이 책은 어려운 사람과 ‘함께하는’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그의 따뜻한 조언과 위로를 통해, 질병으로 고통 받는 누군가를 돌보느라 무기력감과 영적 고갈에 시달리는 이들이 끝까지 단념하지 않고 힘겨운 관계의 고통을 견뎌내고, 비록 눈에 보이거나 귀에 들리거나 손에 잡히지 않더라도 중요하고 진실한 가치를 고수하게 되기를, 당면한 현실에서 도망치지 않고 더 온전히 품게 되기를 바란다. 또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잃어버린 우리 세대 그리스도인들이 이 책을 통해 시간을 내서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와 함께하는 삶, 긍휼의 삶, 예수의 삶으로 들어가기를 바란다.
_69쪽 중에서
우리 시대의 가장 비참한 단면 중 하나는, 우리가 세상의 고통과 고난을 이전 어느 때보다도 많이 알면서 거기에 점점 더 반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진, 테러 공격, 난민의 이주, 극심한 기아 등 인간의 무수히 많은 고난이 라디오와 텔레비전과 신문을 통해 시시각각 전해진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다. 고도로 발달된 통신 수단들이 과연 우리를 더 큰 긍휼로 이끌어 주는가?
그럴 가망성은 매우 희박해 보인다. 비극들이 너무 먼 곳에서 일어나서 대개 우리에게 잘 와 닿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통당하는 그들을 한 사람도 만나본 적이 없다. 그들과 우리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하지만 우리의 돌봄을 받는 사람과는 서로 함께 있기 때문에, 마음의 심연에 가닿는 관계가 가능하다. 이 관계를 통해 양쪽 모두가 더욱 온전히 자기다워질 수 있다.
_72쪽 중에서
돌봄을 주고받는 지극히 인간적인 교류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더욱 온전히 붙들 수 있다. 인간적인 강점과 약점을 모두 지닌 채로 말이다. 돌봄을 베푸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관계야말로 쌍방의 치유라는 완전히 새로운 영역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_79쪽 중에서
돌보는 우리의 일차적 관심이 치료에 있으면, 만성 질환에 걸렸거나 죽어가는 사람들을 돌볼 때는 별로 보람을 느낄 수 없다. 그렇게 느끼는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우리에게 늘 두 가지 사실을 들이대기 때문이다. 하나는 우리의 힘이 모자라서 병을 치유하지 못한다는 사실이고, 또 하나는 죽음이라는 현실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것을 직시할 때 우리는 자신이 하는 일의 더 깊은 의미에 새삼 눈뜰 수 있다.
우리는 지금 영적인 보물을 주고 있는 것이다. 불가피한 결과는 우리의 소관 밖이며, 우리 자신도 언젠가는 죽을 것이다. 그 사실을 기꺼이 받아들일 때 비로소 해방이 있다. 그제야 우리는 참으로 돌보는 사람이 될 수 있다. 무조건 치료에만 매달리는 게 아니라 돌본다는 단어의 가장 깊은 의미에서 돌보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_87쪽 중에서
우리 마음 깊은 곳에는 남을 돌보기를 꺼리는 마음이 있다. 물론 이것은 상대를 치료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일 수도 있지만, 더 큰 이유가 있을 수도 있다. 즉 상대의 고난과 고통과 불안을 공감하고 긍휼의 마음으로 함께 부르짖으려면, 나 자신의 고난과 고통과 불안을 대면해야 하기 때문이다.
_95쪽 중에서
돌본다는 것은 곧 인간다워지는 것이다. 돌보는 사람이 된다는 건 곧 상대를 통해 나 자신의 죽음을 부정하는 환상을 벗어버리고, 삶을 훨씬 넓고 풍부하게 이해한다는 뜻이다. 건강의 개념을 강한 심장, 튼튼한 허파, 힘센 근육, 생생한 기억력, 예리한 통찰력, 기민한 이해력을 갖춘 상태로 제한하는 한 우리의 인생관은 지극히 편협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려주시려는 삶은 그게 아니다.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할 때마다 우리는 영생(eternal life)을 믿는다고 고백한다. 영원한 생명을 믿기에, 돌봄을 보는 우리의 관점도 근본적으로 달라질 수 있다.
_114쪽 중에서
돌봄이 필요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다. 사람이 허약해지거나 병들거나 죽는다고 해도 그 정체성은 변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눅 6:20)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들만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니라 그분의 사랑받는 형제자매인 우리 각자를 두고 하신 말씀이다.
우리에게는 서로가 필요하다
1 긍휼은 소명이다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는 영성
2 긍휼은 행동이다
진실한 관계로 들어가는 영성
3 긍휼은 인간다워지는 것이다
당면한 현실을 온전히 품는 영성
4 긍휼은 넘쳐흐르는 것이다
날마다 사랑을 공급받는 영성
돌봄을 주고받을 때
그곳에 천국이 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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