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복음(Gospel According to Thomas)은 기독교 신약성서 외경의 하나로서, 서문에서 예수의 열두제자 중 한 사람인 ‘쌍둥이’ 유다 토마가 썼다고 기록되어 있다. 콥트어로 기록된 완전한 사본이 1945년 나그함마디에서 나그함마디 문서의 일부로 발견되었고, 이후 1898년 이집트 옥시링쿠스에서 발견된 그리스어 조각 필사본의 내용과 일치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토마복음은 예수의 일생에 대한 전기적 내용을 담고 있는 사복음서의 형식과 달리, 예수의 어록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겨자씨의 비유 등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의 말씀과 같은 공통된 내용이 다수 있다. 다른 복음서와 달리 예수의 행적, 말씀의 배경에 대한 내용은 없이 오로지 가르침 114개 어구로만 구성되어 있다.
관옥 이현주는 자신의 영성으로 토마복음을 읽고, 그렇게 읽으며 마음에 떠오른 생각들을 모았다. 『관옥 이현주의 토마복음 읽기』는 그렇게 태어났다. 관옥은 밝힌다.
“이 글은 토마복음 해설도 아니고 주석도 아니다. 관옥은 그런 작업을 할 실력도 자격도 없음을 스스로 알고 있다. 그냥 토마복음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생각들을 될수록 간명하게 달아본 것이다. 왜, 뭐 하려고, 이러는 건지 실은 저도 모른다. 말 그대로 사족蛇足을 다는 것이긴 하겠지만, 이것이 토마복음을 좀 더 깊이 만나는 하나의 방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든다.”(4p)
있는 그대로 따라 읽기…
낭독하듯 읽다보면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이 책은 이렇게 읽어보자. 천천히, 관옥의 표현과 문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따라 읽어보자. 읽는 데서 그치지 말고 하나하나 낭독하듯 읽어보자. 곱씹어 읽다보면, 밥을 곱씹을 때에야 비로소 단맛을 알 수 있듯, 『관옥 이현주의 토마복음 읽기』를 따라 읽다 보면 “어?” 하다가 “아!” 하고 무릎을 치게 된다. 토마복음이 개인의 깨달음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관옥의 마치 선문답 같은 글이 어느 새 깨달음을 가져다준다.
토마복음 1 “누구든 이 말씀들의 풀이를 발견하는 사람은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14p)
이 말씀을 관옥은 이렇게 풀이해준다.
말의 뜻을 이해하는 길은 머리에서 비롯하여 몸으로 이어진다.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몸으로 살기가 앎으로 통하는 유일한 길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눈이 보는 게 아니라 눈으로 보는 거다. 몸이 아는 게 아니라 몸으로 아는 거다. 누가 무엇을 보았다는 말은, 그가 보기 전부터 거기 있던 무엇이 그의 눈에 보였다는 말이다. 말씀의 풀이를 발견한다는 말은 말씀의 내용을 몸으로 실현한다는 말이다.(14-15p)
관옥의 풀이는 친절하다. 아이에게 하나하나, 차근차근 짚어주듯 한다. 관옥이 풀어주는 예수의 말씀을 읽으면 마치 관옥이 옆에서 이야기해주는 듯하다. 그의 쉼이, 말투가 살아 있다.
토마복음 45 예수께서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에 대해 하신 말씀을 관옥은 이렇게 풀이해준다.
선한 행실보다 선한 사람이다. 악한 행실보다 악한 사람이다. 어떤 사람이 선한 사람이냐 악한 사람이냐는 그가 제 속에 무엇을 쌓아두었느냐에 따라서 결정된다. 네 속에 무엇을 쌓아둘 것인가? 그건 네 몫의 일이다. 다른 사람이나 상황에 핑계를 댈 수야 있겠지만 결국은 네가 선택하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네가 사람이기 때문이다. 대부분 사람이 자기 속에 악한 것을 쌓아두기도 하고 선한 것을 쌓아두기도 한다. 그래서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다. 그러므로 둘 가운데 어느 쪽을 편들 것인지가 공통 과제다.
“아이야, 네 속에서 늑대와 양이 서로 싸우고 있구나.”
“어느 쪽이 이길까요?”
“그야, 네가 먹이를 주는 쪽이지.”(95p)
토마복음 57에 원수가 등장한다. 관옥의 풀이는 이렇다.
아버지의 나라는 좋은 것들만 있는 나라가 아니다. 좋은 것이 있으려면 안 좋은 것들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안 좋은 것들을 있게 하려고 좋은 것이 있는 건 아니다. 좋은 것을 좋은 것으로 있게 하려고 안 좋은 것들이 있는 거다. 그런즉, 원수가 알고 보면 협조자다. 네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안 좋은 것들을 발본색원拔本塞源하는 데 있지 않다. 그것들로 말미암아 존재하는 본디 좋은 것들을 돌보고 자라게 하는 것이다. 안 좋은 것들은 그냥 놔두고 눈여겨보지 말라. 언제고 사라진다.(115-116p)
『관옥 이현주의 토마복음 읽기』에서 강조하는 것들
토마복음 자체도 그러하지만 토마복음을 읽으며 떠오른 관옥 이현주의 생각은 몇 가지 화두를 안긴다. 자신, 오늘, 하나, 선이다.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고 스스로 깨달음의 길을 찾으라 한다. 오늘은 지금, 여기를 이르기도 하는데, 바로 지금 여기 오늘의 소중함을 강조한다. 하나의 의미는 합치, 일치, 소중한 것, 혼자 등 여러 의미로 나타난다. 본문에서 그 의미를 새겨볼 수 있다.
자신
토마복음 3 ‘네 지도자들이 너희에게 이르기를’에 관한 관옥의 풀이다.
사람이 무엇을 알 수 있고 알아야 한다면 그건 저 자신이다. 두드리지 않은 문이 열릴 수 없듯, 묻지 않는 닫힌 입에는 답을 듣는 열린 귀가 없다.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고 해야 한다면 자기를 알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을 품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래서 무엇을 알았다면 그건 제가 안 게 아니라 알아진 거다. 알고자 하는 마음 없이는 오지 않는 게 답이지만 알고자 하는 마음이 남아있으면 그것에 막혀 올 수 없는 것 또한 답이다.(19p)
토마복음 16 ‘사람들은 내가 세상에 평화를 던지러 왔다고’에 관한 관옥의 풀이다.
혼자일 때, 만유와 더불어 혼자 있을 때, 그때 비로소 사람은 진정 평화로울 수 있다.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가는 유일한 목적이 있다면 자기가 천상천하에 홀로 존귀하다는 진실에 눈을 뜨는 것이다.(43p)
오늘
토마복음 18 ‘말씀해주십시오, 우리의 끝이 어떻게 오겠습니까?’에 관한 관옥의 풀이다.
세상에 날이라는 게 있다면 오늘이 있을 뿐이다. 어제는 어제의 오늘이고 내일은 내일의 오늘이다. 그러므로 오늘은 어제의 끝이면서 내일의 시작이다. 어제는 이미 없고 내일은 아직 없다. 있는 것은 어제의 끝이며 내일의 시작인 오늘, 끝이면서 시작인 오늘이 있을 뿐.
사람들이 어제 오늘 내일을 말하지만 모두 실체가 없는 것들이다. 어제는 더 이상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날이고, 내일은 아직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날이고, 오늘은 사람이 살 수 있는 유일한 날이지만 역시나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날이다. 물리학에서 말하는 쿼크처럼 있으면서 없고 없으면서 있는, 그날이 오늘이다.
오늘은 동떨어진 외톨이 날이 아니다. 무수한 어제와 무수한 내일에 이어져 있다. 무수無數를 다른 말로 바꾸면 영원永遠이다. 앞뒤로 영원에 이어진 영원한 날, 그날이 오늘이다.
시작에 선다는 말은 끝에 선다는 말이고, 시작이면서 끝인 오늘에 선다는 말이다. 오늘에 선 사람이 죽음을 맛보지 않는 이유는 오늘에 죽음이 없어서다.(46-47p)
하나
토마복음 7 ‘사람을 먹을 사자는 운이 좋다’에 관한 관옥의 풀이다.
누가 누구를 먹는 것은 둘이 하나로 되는 틀림없는 길이다. 사자가 사람을 먹든 사람이 사자를 먹든, 운이 좋든 더럽든, 사람과 사자가 하나 되려면 먹고 먹히는 사건을 반드시 겪어야 한다.
누가 누구를 먹느냐 안 먹느냐를 결정하는 것은 먹히는 쪽이 아니라 먹는 쪽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거다.
“나를 먹어라.”
둘인 ‘우리’를 본디 하나인 ‘나’로 너와 내가 함께 만들자는 초대의 말씀이다.(25p)
토마복음 8 ‘그 사람은 바다에 그물을 던져’에 슬기로운 어부 이야기가 나온다. 관옥의 풀이는 이렇다.
그물을 바다에 던지는 건 어부의 몫이지만 그물에 무엇이 걸리는지를 결정하는 건 그의 몫이 아니다. 그물에 많은 고기가 걸렸지만 어부는 그것들 가운데 한 마리만 취한다. 한 마리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충분하니까 다른 것들은 모두 바다로 돌려보낸다. 그래서 그냥 어부가 아니라 슬기로운 어부다.
너에게는 무엇이냐? 그것 하나 있으면 다른 것들은 없어도 되는, 오히려 있어서 짐이 되는, 그래서 그것들을 저절로 버리게 되는, 그 ‘하나’가 너에게는 무엇이냐? 부디 그것을 만나기 바란다, 밭에서 값진 진주를 발견하고 모든 소유를 기꺼이 팔아 그 밭을 산 사람처럼! 그리스도 한 분 만나 그동안 자랑으로 여기던 모든 것을 오물처럼 버린 바울로처럼!(26-27p)
토마복음 43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들려주시는 당신, 누구십니까?’에 관한 관옥의 풀이다.
사람의 말과 말하는 사람은 동떨어진 둘이 아니다. 하나다. 그런데 너희는 내가 하는 말과 나를 하나로 보지 않는다. 그러기에 내가 누구라고 말해주어도 너희는 나를 모른다.
사람의 말과 말하는 사람을 하나로 보기가 쉽지 않은 까닭은 그만큼 자신의 말과 삶이 일치되는 사람을 보기 어려워서다.
전체와 부분은 하나면서 하나가 아니다. 나무와 나뭇가지는 서로에게 너면서 나다. 나뭇가지에서 나무가 보이고 나무에서 나뭇가지가 보이는 일원一元의 눈을 뜨기까지, 나뭇가지는 나무를 보지 못한다.
하나인 것을 둘로 나눠놓고 보는 이원二元의 눈으로는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라는 말씀의 깊은 뜻을 결코 알 수 없다.(90-91p)
토마복음 75. ‘문간에 서 있는 사람들은 많다’에 관한 관옥의 풀이다.
신랑이 혼자다. 어떻게 여러 신부들이 무리지어 신방에 들 것인가? 저마다 혼자 태어나 혼자 살다가 혼자 죽는, 이것이 어쩔 수 없는 인생이다.
이래도 저래도 혼자일 수밖에 없는 인간이건만 참으로 혼자일 수 있는 사람이 오히려 드물구나. 상황 때문에 혼자로 된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혼자인 사람, 그가 신방에 들 것이다.(145p)
금식을 하든 말든, 기도를 하든 말든, 자선을 베풀든 말든, 어떤 음식을 먹든 말든, 모름지기 솔직하라. 사람들은 서로 속고 속이지만 하늘은 속지도 속이지도 않는다.
한마디 더, 네가 하는 온갖 일이 하늘 앞에서 하는 것임을 유념하라.(24p)
12. 제자들이 예수께 말씀드렸다.
“당신이 우리를 떠나실 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누가 우리의 지도자가 될 것입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어디에 있든지 의로운 사람 야고보에게로 너희는 갈 것이다. 그를 위해서 하늘과 땅이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야고보를 당신 후계자로 지목하셨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야고보가 과연 스승의 뒤를 이어 지도자 자리에 앉을 것인지, 그건 아무도 미리 말할 수 없는 일이다. 사람의 말이라는 게 본디 그렇다. 누구나 미래를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이 정말 그리 된다고는 아무도 단언할 수 없다.
참 지도자는 누가 지명하여 세우는 게 아니라 본인의 뜻에 거슬러 세워지는 것이다. 스스로 나서서 지도자 되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제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를 만큼 무식하고 미련한 사람이다.(33-34p)
17 예수께서 이르셨다.
“내가 너희에게 눈이 보지 못한 것, 귀가 듣지 못한 것, 손이 잡지 못한 것, 인간의 마음에서 일어나지 않은 것을 주리라.”
예수께서 주겠다고 하신다. 받으라고는 하지 않으신다. 주는 건 당신 몫의 일이지만 받는 건 우리 몫의 일이란 말씀이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에 잡히고, 마음에 생각나고, 몸에 느껴지는 것들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그것들이 없으면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고 마음의 생각과 몸의 느낌으로 닿을 수 없는 경지에 들 수 없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에 잡히는 것들을, 그것들에 가로막히지 말고,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잡히지 않는 경지에 들어가는 문으로 삼아라.(44-45p)
25. 예수께서 이르셨다.
“네 벗들을 네 영혼 같이 사랑하고, 네 눈동자 같이 지켜주어라.”
본디 네 벗들이 모두 너다, 너의 팔과 다리와 가슴이 모두 너인 것처럼. 한님이 지으신 세계에 동떨어진 별개란 없는 것이다. 모두가 이어져 있어서 갈 데 없는 하나다.
그러기에 네가 벗들을 사랑하는 것이 네가 너를 사랑하는 어쩔 수 없는 방편이다. 네 벗들을 미워하는 것은 다른 누구 아닌 너를 미워하는 것이다.
이는 생각이나 말로 알 수 있는 무엇이 아니다. 삶의 경험으로만 깨칠 수 있는 진실이다.(62-63p)
34. 예수께서 이르셨다.
“눈먼 사람이 눈먼 사람을 이끌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질 것이다.”
“눈먼 사람이 눈먼 사람을 이끌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질 것이다.” 이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다만, 자기가 눈먼 줄을 모르는, 그래서 자기가 이것도 알고 저것도 안다고 착각하는, 그런 사람들이 많아도 너무 많아서 시끄럽고 어지러운 세상이다.(77p)
48. 예수께서 이르셨다.
“둘이 한 집에서 평화롭게 살면 그들이 산에게 말하기를, ‘여기에서 옮겨져라!’ 하여도 그대로 될 것이다.”
어차어피 지구별은 극에서 극으로 돌아간다. 동이 있어 서가 있고, 남이 있어 북이 있고, 여자가 있어 남자가 있고, 위가 있어 아래가 있고, 안이 있어 밖이 있고….
그래도 지구별은 천상천하에 하나뿐인 별이다. 한 집에서 둘이 함께 살아야 하는 것이 지구별 생명체의 숙명이다. 그러니 이 별에서 사람들이 경험할 수 있는 것도 둘 중 하나다. 서로 화목하여 안 되는 일이 없든지 아니면 서로 불화하여 되는 일이 없든지.(100p)
68. 예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미움 받고 핍박당할 때 너희에게 복이 있다. 그리고 너희가 어디에서 핍박당했든지, 그 장소가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누구를 미워하고 누구를 핍박하는 대신 누구에게 미움 받고 누구에게 핍박당하니 분명 제가 저를 해치는 사람이 아니다. 복 있는 사람이다.
지난날에 있었던 일은, 지난날과 더불어,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지난날에 핍박당했던 곳을,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그곳을, 누가 어떻게 찾을 수 있으랴?(13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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