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그에게 찾아온 기적 같은 겨울밤”
인간의 상처에 대한 가슴 뭉클한 위로와 따뜻한 문장으로 인생의 아름다움을 조명해 온 소설가 아사다 지로의 신작이다. 2016년에서 2017년까지 1년간 일본 <마이니치 신문>에서 연재된 작품으로, 연재 내내 독자의 사랑을 받으며 ‘아사다 지로 감동 문학의 결정판’이라는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정년퇴직을 맞이한 예순다섯 살의 다케와키는 송별회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뇌출혈로 지하철에서 쓰러진다. 애틋한 가족과 잊었던 친구가 잇달아 병문안을 오던 그때, 병실에 누워 있던 다케와키에게 미스터리한 방문자들이 찾아온다. ‘마담 네즈’와 함께 병실을 빠져나가서 도쿄의 밤 풍경을 바라보며 고급스러운 저녁을 먹고, 갑자기 젊은 육체를 얻어 하얀색 선드레스를 입은 여인 ‘시즈카’와 한여름의 바닷가를 거닐기도 한다. 심지어 같은 처지의 옆 침대 환자 ‘가짱’과 같이 목욕탕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포장마차 포렴 안에서 따뜻한 정종을 마시는 등 꿈도 망상도 아닌, 이세계(異世界)를 여행한다. 그리고 기묘한 방문자들과 배회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겉보기엔 지적인 엘리트, 성공한 비즈니스맨 같았던 다케와키의 비극적인 과거, 불행으로 얼룩진 인생이 드러나는데…. 일본 문단에서 가장 ‘탁월한 이야기꾼’이라 손꼽히는 작가답게 흥미진진한 환상 여행과 그 속에서 드러나는 진한 인생 이야기, 그리고 위로와 감동으로 눈물을 쏟게 하는 아사다 지로의 새로운 대표작이다.
목차
제2장 | 마담 네즈와 시즈카 · 57
제3장 | 병원의 얼굴 · 151
제4장 | 미네코 · 189
제5장 | 가족 · 281
제6장 | 흔적 · 317
저자소개
1951년 도쿄의 큰 부잣집에서 태어났지만, 집안의 몰락으로 아홉 살 때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는 쓰라린 경험을 했다. 이후 자위대 입대, 패션 부티크 경영 등을 하다 “뛰어난 작가의 문장을 손으로 직접 베껴 써 보라”는 고교 선배의 권유와 “몰락한 명문가의 아이가 소설가가 되는 경우가 많다”라는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의 문장을 읽고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1991년 39세의 늦은 나이에 소설가로 데뷔한 뒤 1995년 《지하철》로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상 신인상, 1997년 《철도원》으로 나오키상, 2000년 《칼에 지다》로 시바타 렌자부로상, 2007년 《할복하십시오》로 시바 료타로상, 2008년 《중원의 무지개》로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상을 받았다. 《철도원》에 실린 단편 〈러브레터〉는 2001년 우리나라에서 〈파이란〉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었다.
주요 저서로는 《철도원》 《천국까지 100마일》 《창궁의 묘성》 《프리즌 호텔》 《지하철》 《장미 도둑》 《파리로 가다》 《칼에 지다》 《오 마이 갓》 《월하의 연인》 《쓰바키야마 과장의 7일간》 《중원의 무지개》 《가스미초 이야기》 《온기, 마음이 머무는》 등 다수가 있다.
역자 : 이선희
부산대학교 일어일문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 일본어교육대학원에서 수학했다. 부산대학교 외국어학당 한국어 강사를 거쳐 삼성물산, 숭실대학교 등에서 일본어를 강의했다. 현재 나카타니 아키히로 한국사무소 소장과 KBS 아카데미 일본어 영상번역과정 강사로 있으면서 방송 및 출판 번역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번역한 책으로는 아사다 지로의 《천국까지 100마일》 《쓰바키야마 과장의 7일간》, 히가시노 게이고의 《비밀》 《방황하는 칼날》, 기시 유스케의 《신세계에서》 《검은 집》 《푸른 불꽃》, 이케이도 준의 《한자와 나오키》, 나쓰카와 소스케의 《책을 지키려는 고양이》 등 다수가 있다.
출판사서평
아사다 지로 문학 인생 30년 회심의 역작
도쿄의 단독주택에 살며, 대기업 계열사 임원까지 지낸 예순다섯 살의 ‘다케와키 마사카즈’. 정년퇴직 송별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그가 지하철에서 뇌출혈로 쓰러지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의식을 잃은 채 집중치료실에 사흘 동안 누워 있던 다케와키는 별안간 포근하고, 따듯한 행복감에 사로잡혀 깨어난다. 그때 그를 찾아온 것은 자신을 ‘마담 네즈’라고 소개하는 정체불명의 여인. 마담 네즈의 손에 이끌려 병원 밖으로 나온 다케와키는 꿈도 실제도 아닌, 기이하고도 아름다운 이세계(異世界) 여행을 떠난다(59쪽).
마담 네즈는 ‘사신(死神)’이고 자신을 ‘저세상’으로 데려가는 게 아닐까? 의심하는 사이 다케와키는 어느새 신주쿠 고층 빌딩에 있는 고급 레스토랑에 와 있다. 몸에 부드럽게 스며드는 콩소메 수프로 시작해 전채 요리로 가리비 마리네, 메인은 혀가자미 뫼니에르, 디저트로 아이스크림과 에스프레소까지. 이 여인은 어떻게 내 취향을 이렇게 정확히 알고 있는 거지? 의문을 떠올리며 다케와키는 자신의 월급쟁이 인생을 반추한다. 1951년에 태어나 고도 경제 성장기에 자라고, 입사한 이후에는 꿈이나 취미를 생각할 여유 따위 없이 일만 했다. 밤에는 녹초가 될 만큼 지쳐서 기절한 것처럼 잠들고, 아침에는 귀찮아하지도 않고 벌떡 일어나 직장으로 향한 세월이 44년. 그런데 ‘직장의 정년퇴직’이 ‘인생의 정년퇴직’이라니. 아직은 죽어도 죽을 수 없다고 생각한 순간, 마담 네즈가 그에게 속삭인다.
“당신은 참 열심히 살았어요.”
그 한마디에 내 마음이 흔들렸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의 말이기에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101쪽)
기묘한 체험을 마치고 병실로 돌아온 다케와키에게 죽마고우 ‘나가야마 도오루’가 찾아온다(106쪽). 침대 옆에 앉아 이제 그만 가족에게 ‘출생의 비밀’을 털어놓으라며 숨죽인 오열을 쏟아내는 도오루. 다케와키의 의식은 ‘비밀 같은 건 없다’고 소리치지만, 잊었던 기억이 눈꺼풀 안쪽에 떠오른다. 크리스마스이브에 부모에게 버려져 아동 보호 시설에서 자란 어린 시절. 그는 신문 배달소에서 입주 배달원으로 일하며 겨우 대학에 합격한 뒤, 과거를 지워버리고 인생을 새로 썼다. 다시 살아난다면 가족에게 출생을 고백해볼까? 망설이는 순간, 다케와키의 귀에 파도 소리가 들려온다. 어느새 그는 젊어진 육체를 가지고 뜨거운 햇볕이 쏟아지는 바닷가에 서 있다.
멋진 꿈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꿈치고는 너무도 선명하다. 풍경은 그렇다고 쳐도 발바닥을 태우는 모래의 열기나 뺨을 스치는 바람의 감촉은 도저히 현실이라고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문득 생각이 났다. 여기에 온 적이 있다. 어렴풋한 기시감이 아니라 예전에 분명 여름의 하루를 이곳에서 보낸 것이다.-(114쪽)
한여름의 조용한 바닷가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하얀색 선드레스를 입은 여인 ‘시즈카’다. 그녀와 바다를 거닐고 청량음료를 마시며 시간을 보내면서도 그는 알 수 없는 데자뷔에 시달린다.
“좀 더 생각해 보세요.”
“누구를 위해서요?”
“누구를 위해서도 아니에요.”
“나 자신을 위해서인가요? 괜히 위하는 척하지 마세요. 생판 남인 주제에 뭘 안다고.”
나는 천박하게 말했다. 내 마음 깊은 곳까지 들어오면 화가 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잊으면 가엾잖아요.”-(129쪽)
그때 끊임없이 파 내려가던 기억의 곡괭이가 탁하고 바위에 부딪혔다. 딸아이가 어렸을 적 아내와 함께 여행을 온 곳이었다. 해변에서 딸과 모래성을 쌓고 있다가 문득 뒤돌아보자, 아내가 죽은 아들 ‘하루야’의 사진을 안은 채 오도카니 서 있었다. 하루야는 네 살에 죽었다. 다케와키와 그의 아내는 아들의 죽음을 서로의 탓이라 비난하며 ‘타인보다 못한 타인’으로 지냈다. 친한 입사 동기인 홋타가 “없었던 일로 해. 잊어버린 척을 해도 되네. 아카네를 한쪽 부모가 없는 애로 만들 건가?”라고 말해주지 않았다면, 가정은 이미 파탄 났을 것이다.
하루야의 작은 몸이 가마에서 불타는 동안, 그는 독지가에게서 받은 다케와키라는 성(姓)과 프로야구 선수에게서 따온 마사카즈란 이름을 떠올렸다. 그리고 자신에게는 기호에 불과했던 그 성을 하루야에게 물려주고, 아버지가 되는 것을 망설였던 자신을 꾸짖었다.
“인생의 행복과 불행의 양이 똑같다면,
내게는 아직 행복의 시간이 남아 있어야 해요.”
이차원(異次元) 세계로의 여행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한여름의 바다에서 돌아와 난생처음 ‘따분함’을 즐기고 있는 다케와키에게 걸쭉한 목소리가 말을 건다. 뇌경색으로 쓰러져 옆 침대에 누워 있는 팔순의 노인 ‘가짱’이다. 다케와키는 밖으로 나가자는 영감의 제안이 내키지 않지만, 계속되는 성화에 못 이겨 함께 대중목욕탕으로 향한다.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뜨끈한 욕탕 안에서 가짱은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시작한다.
“난 전쟁고아였지. 3월 10일 밤의 일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네. 겨우 하룻밤 사이에 10만 명이 죽고, 100만 명이 집을 잃고 쫓겨났지. 그런 공습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떻게 제정신으로 있겠나? 부모도 집도 잃어버린 꼬마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어. 다들 지금 어쩌고 있을까? 여든까지 살았을까?”-(216쪽)
우산 도둑, 신발 도둑을 거쳐 미녀 우두머리 ‘미네코’와 함께 목욕탕 탈의실 도둑질을 했다는 가짱의 고백을 들으며, 다케와키도 목욕탕에 얽힌 추억을 떠올린다. 시설 시절, 목욕탕 주인의 배려로 한 달에 한 번 하는 목욕탕 방문은 즐거운 행사였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호의에 일일이 고개를 숙여야 한다는 것에 굴욕감을, 신성해 보이기까지 하는 부자관계에 열등감을 느끼면서 그 행사가 괴로워졌다. 다케와키는 지금도 ‘고맙다’는 말을 잘하지 못했다. 그에게 ‘고맙습니다’는 감사의 말이기 전에 살아가기 위해 평생 읊조려야 했던 ‘주문’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목욕탕을 나온 후 가짱과 다케와키가 향한 곳은 병원이 아니라 포장마차다. 따끈하게 데운 정종을 마시며 가짱은 다케와키에게 “자네 정말 훌륭하게 살았네”라며 칭찬하고 “나는 모두가 배고픈 시대에 살았지만, 자네는 그렇지 않아 더 불행했을 거야”라고 위로하지만, 다케와키는 고개를 젓는다. 복지가 좋아져서 자신은 ‘기회’를 얻었고, 부모도 친척도 없는 덕분에 ‘고생의 절반’이 없었다고 말하면서. 그러나 죽음이 목전이라는 사실을 떠올리자, 다케와키는 처음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자신의 불행에 대해 생각한다.
문득 65년의 인생은 너무 짧다는 생각이 들었다.
버려진 아이가 오히려 행복하다고? 오기에도 정도가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불행을 조금 만회한 것이다.
하지만 65년 만에 끝나서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 인생의 행복과 불행의 양이 똑같다면 내게는 아직 15년이나 20년쯤 행복한 시간이 남아 있어야 한다.-(237쪽)
단백질을 먹지 않는 초식동물이
울퉁불퉁한 근육을 만들어 내서 계속 생존하는 것처럼…
결국 저세상으로 떠나게 된 가짱을 배웅하기 위해 다케와키는 지하철역으로 향한다. 사후의 영혼은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의 육체를 다시 얻는다고 들은 적이 있는데, 정말로 그럴까? 라고 생각하며. 도착한 곳은 다케와키에게도 특별한 인연이 있는 오기쿠보선 지하철역으로, 가짱은 수십 년 전 이 지하철 노선 공사 현장에서 일했다고 한다. 천진난만한 목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자, 반대편 플랫폼에서 양친의 손을 잡고 있는 어린 가짱이 보인다.
가짱은 과거를 잊었지만 내게는 과거가 없다. 가령 부모가 데리러 온다고 해도, 나는 그들이 누군지 모른다. 부모를 알게 되면 평온하게 있을 수 없으리라. 아마 지하철 차량 안이든 역의 플랫폼이든 상관없이 큰 소리로 욕을 퍼부으며, 아무리 사죄해도 결코 용서치 않을 것이다.-(259~260쪽)
가짱을 배웅하고 들어오는 지하철에 탑승하자, 세련되고 오만해 보이는 여인이 다케와키에게 말을 건다. 자신을 ‘미네코’라고 소개하는 여자. 이 여자는 가짱의 첫사랑, 부랑아들의 ‘미녀 우두머리’가 틀림없다.
어느새 열아홉의 육체로 젊어진 다케와키는 미네코와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빛나는 신주쿠 거리를 걷고, 순찻집에 들러 이야기를 나눈다. 언젠가 이런 찻집을 가지는 게 꿈이라고 말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다케와키는 “그동안 많이 힘들었죠?” 하고 위로를 건넨다. 불타버린 전쟁터에서 고아로 살아남아 도둑질로 연명했다면, 고된 인생을 살았음이 분명하니까. 그러나 미네코는 “나보다 당신이 더 힘들었을 거야. 모두 불행했을 때의 불행과 모두 행복했을 때의 불행은 다르니까”라며 오히려 다케와키를 어루만져 준다.
만약 누군가 그런 말을 했다면 그때까지의 내 노력과 인내는 모두 물거품이 되고 친구들은 전부 등을 돌리며, 약간 남아 있던 연민은 즉시 경멸로 바뀔 만한 말이었다. 하지만 틀림없는 진실이었다. 그래서 나는 잔혹한 진실을 무거운 바위처럼 가슴 안쪽에 계속 간직해 왔다.-(279쪽)
미네코의 환상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케와키는 자신의 첫사랑 ‘후즈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미네코는 어렸을 때의 ‘울보 가짱’에 대해 떠들며 둘은 다시 지하철에 탑승한다. 옛날부터 좋아했던 차량의 가장 구석 자리에 어깨를 기대고 미네코와 나란히 앉은 채, 다케와키는 그동안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자신의 꿈을 입 밖으로 꺼낸다.
“제 꿈을 들어 보시겠어요?”
지하철이 다시 어둠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을 때, 나는 독이라도 토해내듯 말했다.
“그래, 말해 봐.”
그녀가 내 어깨를 안아주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들어간 뒤, 결혼을 해서 집을 짓고 아이를 키우고 싶습니다.”
한 번도 입에 담은 적이 없는 꿈을, 염불이나 신문 기사의 제목이라도 읊조리듯 단숨에 말했다. 평범한 사람은 다들 비웃겠지만 내게 그 꿈은 그들이 가진 그 어떤 장대한 꿈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그 꿈을 이룬다면 언제 죽어도 좋다.
“당신이라면 할 수 있어.”-(353~354쪽)
마침내 현실의 병실로 돌아온 다케와키. 그의 옆에는 아내 세쓰코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앉아 있다. “여보, 이제 돌아와 줘요”라면서 애원하고, “혼자서는 아무것도 먹을 수 없고, 어디에도 갈 수 없어요”라고 한탄하면서. 그 말이 다케와키의 가슴을 찔렀다. 만약 자신이 죽으면, 양친이 모두 재혼해 가족이 없는 아내 세쓰코는 고아가 되는 게 아닌가. 그 생각을 하자마자, 생명을 잇는 기계가 음침한 경보를 울리기 시작했다. 귀의 안쪽에서 큰 북을 치는 듯한 박동이 전해지는 가운데, 다케와키의 의식은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뜬 순간, 다케와키는 또다시 환상 속으로 날아가 노란색 지하철이 들어오는 플랫폼에 서 있다. 이 지하철은 어느 시대의 것일까? 나를 어디로 데려가 줄까? 이제 죽는 것일까? 의문을 품으며 다케와키는 초콜릿색 지붕 끝에 둥글고 커다란 헤드라이트가 빛나는 복고적인 지하철 안으로 들어선다. 이번에는 누구를 만날까 기대를 가득 안고서.
“당신은 참 열심히 살았어요”
인생의 밑바닥을 경험한 작가, 아사다 지로가 건네는 헌사와 위로
아사다 지로는 신작《겨울이 지나간 세계》의 일본 출간 인터뷰에서 “처음에 나는 위대한 사람에 대해 쓰려고 했다. 부자이거나 지위가 높은 사람이 아닌, 자기반성을 할 줄 아는 남자, 인망이 있는 사람을. 그런 사람이야말로 위대한 사람이 아닌가”라고 집필 배경을 밝혔다. 그의 말처럼 이 책은 1951년 도쿄에서 태어나 고도 경제 성장기에 청년 시절을 보내고, 대기업에 근무하다가 정년퇴직을 맞이한 평범한 남자, 다케와키 마사카즈의 위대한 인생 이야기다.
아사다 지로와 소설의 주인공 다케와키는 많은 부분이 닮았다. 아사다 지로 역시 1951년에 태어나 고도 경제 성장기에 자랐고, 이른 나이에 부모를 잃은 뒤 남의집살이를 하며 성장했다. 자위대에 입대하고 패션 부티크를 운영하는 등 기나긴 방황 끝에 소설가로 데뷔한 것은 39살에 이르러서다. 지난 2011년 내한 당시 그는 “어렸을 때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친척 집을 전전했습니다. 젊은 시절부터 ‘누군가는 해야 하는데 아무도 안 하는 일’은 내가 반드시 했습니다. ‘누구도 하기 싫은 일’은 결국 ‘남의 밥을 얻어먹는 아이’가 해야 하는 것이죠”라고 어린 시절을 회고했다. 그래서 그가 건네는 결핍과 위로의 문장들은 더욱 처절하고 시큰하게 다가온다.
아사다 지로의 30년 문학 인생을 관통하는 주제인 ‘인간의 선의’에 대한 믿음과 ‘인생의 아름다움’에 대한 메시지 또한 그의 성장배경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러한 주제는 그가 나이를 먹은 것처럼《겨울이 지나간 세계》에서 더욱 원숙하게 드러나 빛을 발한다. 주인공 다케와키가 지하철에서 쓰러졌을 때 그의 나이는 예순다섯이었다. 고아에다 인생을 다시 쓰기 위해서 과거를 감춘 채 늙어버린 그는 위로를 받을 기회조차 없었다. 그런 그를 환상 속으로 데려가는 방문자들은 ‘잊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었던 기억’을 들춰내 상처를 덧내면서도 그의 인생을 훤히 다 안다는 듯 너그럽게 위로해준다. “당신은 참 열심히 살았어요”라고 등을 다정하게 어루만져 주고, ‘정말 훌륭하게 살았네’라며 따뜻한 정종을 내밀면서. 그리고 소설 말미에 이르러 그들의 정체가 밝혀지면, 안온한 위로는 뜨거운 울음이 되어 돌아온다.
작가는 주인공을 ‘같은 교실에, 같은 직장에, 같은 지하철로 출퇴근하는 사람 중에 있었던 인물’로 그리고자 했다고 말한다. 다케와키는 ‘밤늦게 퇴근해 녹초가 될 만큼 지쳐서 기절한 것처럼 잠들고, 아침에는 귀찮아하지도 않고 벌떡 일어나 직장으로 향하는(105쪽)’ ‘매일 아침 똑같은 지하철의 똑같은 칸을 20년간 탔던(304쪽)’ 우리 곁의 누군가, 혹은 나 자신이다. 소설은 직장에서, 출퇴근길의 지하철에서, 집으로 가는 골목 어귀에서 부대끼는 사람들 모두가 저마다의 고통과 상처를 감내하고 있다고 말하며, 타인을 좀 더 관대한 시선으로 바라보도록 안내한다. 그리고 그 깊은 관대함이야말로 다케와키가 불행을 지나 ‘평범한 사람’이 되는 꿈을 이뤘던 것처럼, 우리에게 닥친 이 겨울을 지나게 해줄 거라고 용기를 불어넣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