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판에는 다음과 같은 상황의 변화가 반영되었다. 첫째, 나 자신에게 변화가 생겼다. 초판을 쓸 때 나는 신학 교수였다. 그런데 그 이후 나는 대학을 떠나 목회 현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같은 것을 보아도 어느 자리에 서 있느냐에 따라 달리 보이게 마련이다. 신학 교수의 경험과 목사의 경험이 같을 수 없다. 신학적 입장이 크게 달라진 것은 없지만, 보는 각도와 깊이가 달라졌다. 지금 내가 선 자리에서 보니 수정하고 보완할 것이 여러 가지 있었다.
둘째, 이 책이 독자에게 남긴 몇 가지‘의도하지 않은 인상’을 수정하고 싶었다. 특히, 내가‘요구하는 기도’는 모두 잘못된 것이며 기도할 때 소리를 내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한 것으로 오해하는 독자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의도한 바가 아니다. 나 자신의 기도 생활에서 속삭이는 기도, 웅얼거리는 기도, 부르짖는 기도 모두 중요한 요소다. 이번 판에서는 이 점에서 균형을 잡으려 했다.
셋째, 지난 10년 동안 한국 교회의 영적 기상도가 많이 바뀌었다. 한동안 방언 열풍이 불더니, 소위‘신사도 운동’이라는 이름의 영적 유행병이 한국 교회를 흔들고 있다. 70년대까지 한국 교회를 들끓게 한 은사 운동이 80년대 이후 제자 훈련과 영성 훈련으로 대치되는 듯하더니, 새로운 밀레니엄이 시작되면서 다시금 은사 운동이 산불처럼 번지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해 균형잡힌 안내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넷째, 삶의 여건이 현기증 날 정도로 변화하고 있다. 초판을 쓸 때는 정보 혁명이 이렇게 급속하게 우리 삶을 바꾸어 놓을지 몰랐다. 시대의 정신적 바이러스라 할 만한 피상성과 분주함과 산만함은 정보 혁명의 결과로 더 심해지고 있다. 이러한 변화에 대해 어느 정도 응답할 필요가 있었다.”(pp. 10-11)
“언젠가 나는 니고데모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바로 내가 그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단한 재산과 권력은 없으나, 나 역시 구원받았다고 착각할 만한 것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나는 모태 신앙인으로 어릴 적부터 충실하게 교회에 출석했다. 주일 예배에는 빠져 본 기억이 거의 없다. 반항심이 적어 교회의 요청에 말없이 순종하는 편이었다. 게다가 신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가르치는 신학자요 목사가 되었다. 이만하면 ‘나는 됐다’라고 스스로 속일 만한 조건이 충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무엇’을 느꼈다. 교회 생활을 충실히 하고, 늘 신학적인 문제와 씨름하고 신학을 가르치면서도, 알 수 없는 공허감에 시달렸다. 그 공허감은 목사가 되기 전부터 계속 나를 괴롭혔고, 나는 그것을 해결할 방법을 찾아 헤맸다. 사람들은 나의 경건을 칭찬했지만, 나는 여전히‘이건 아닌데’라는 번민을 가지고 있었다. 제자리에서 맴도는 내 삶에 절망했고, 가르치고 설교하는 것처럼 살지 못하여 고뇌했다.
‘영성’에 대한 관심은 이 고뇌를 해결하려는 한 방법으로 시작되었다. 관습과 교리의 틀 속에서 파리하게 여윈 영적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다른 것이 필요했고, 그 해답을‘영성 생활’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유학 시절부터 영성은 내 연구의 주요 주제로 자리 잡았다. 특히 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위대한 영성가(신앙의 높은 경지에 이른 사람을 나는 이렇게 부르겠다)들의 글과 전기를 읽으며 해답을 찾아보았다. 나는 영성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기도에 천착했다. 수십 년 동안 한다고 해 보았지만 나는 언제나 기도가 어려웠다. 그래서 기도의 대가들이 쓴 책을 읽으면서 길을 찾았다.
신학 대학에서 가르친 지 3년 정도 지난 30대 중반쯤인 것 같다. 노력은 서서히 결실을 맺기 시작했다. 깨달음이 쌓여 가면서 그것들을 하나씩 실험하기 시작했다.‘침묵 기도’를 시작했고‘시편 기도’를 시작했다. 서서히 영성 생활의 틀이 잡히니 기도가 변화되었다. 영성 생활의 맛을 알게 되고 그럴수록 더욱 영성 생활에 집중했다. 오랜 세월 나를 괴롭히던 공허감이 서서히 사라져 갔고, 나의 말과 행동에서 변화가 일어났다“(pp. 15-16)
“나는 기도라는 감미로운 유혹을 벗어날 수 없다. 바다의 신비에 매혹되어 언제라도 바다로 나아가려는 사람처럼, 기도의 세계에서 살다가 그 안에서 죽기를 바란다. ”(p. 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