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덕에 헤엄쳐 올라갔던 토마스 목사는 한문 성경책을 전하다가 박춘권의 칼을 가슴에 맞고 순교하였다. 그의 시체는 토막 내서 강변에서 불태워졌다. 그러나 그의 한문 성경을 전해 받은 병사가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실을 후일 마포삼열 선교사에게 찾아와 고백함으로써 밝혀졌다.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의 피는 한국 개신교의 선교를 열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 p. 49-50.
기존의 방법은 선교부에서 전적으로 맡아 지급했으나 네비우스가 제시하는 방법은 본토 교인들 스스로가 부담하게 하는 것이다. 전자의 방법이 선교 초기에 눈에 띄는 급속한 발전을 기할 수는 있으나 장기적인 안목에서 볼 때는 완전한 자립 토착교회 설립의 저해 요인이 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네비우스의 선교 방법은 그의 독창적인 것이 아니라 헨리 벤(Henry Venn)과 루퍼스 앤더슨(Rufus Anderson)의 선교 이론에서 온 것으로 네비우스 목사는 벤이나 앤드슨에 의하여 정립된 원리를 아시아의 선교지의 상황에 구체적으로 적용했다. 네비우스 선교 정책이 발표되기 이전의 주한 선교 사역들은 교회 개척, 의료, 교육 등의 영역에 국한되었고, 초창기 선교의 선교적 방법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지 못했지만 이러한 약점을 주한 선교부에 적용하여 새로운 선교 지평(地平)을 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네비우스 박사 부처의 서울 방문은 주한 선교부의 선교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사건이 된 것이다.
– p. 78-79.
1938년 9월 10일 제27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열려 일제의 강요와 친일파 목사 김일선의 주동으로 신사 참배를 국가 의식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의하고 실행함으로서 한국교회는 처음으로 순결을 범하게 됨으로써 변절하였다. 신사 참배를 결의한 장로교회는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을 조직하여 국가 시책에 적극적으로 협력할 것과 신사 참배, 궁성 요배, 황국신민 서사제창을 결정하였다.
물론 신사 참배를 반대하는 교역자, 교인들의 수도 많았다. 신사 참배 반대자로 순교한 이들은 주기철(朱基徹), 최봉석(崔鳳奭) 목사, 박관준(朴寬俊) 장로, 박의흠(朴義欽), 서정명(徐廷明) 전도사 등 50여 명이며, 옥고를 겪으면서도 수진자(守眞者)로 출옥한 이들은 이기선, 주남선, 한상동,채정민 목사, 방계성, 이인재, 김린희, 손병복 전도사 등 50여 명이다.
– p. 150
WCC는 처음에는 147개 회원교회들로 출발했으며, 현재 8개 권역으로(유럽, 아프리카, 북미, 아시아, 중동, 남미, 카리브 지역, 태평양 지역) 나뉜 140개국 349개 교단에 속한 5억 7천만의 회원들을 두고 있는 초대형 단체이다. 전 세계의 300여 교단을 그 회원으로 하고 있으며, 성공회, 루터교회, 개혁교회, 침례교회, 감리교회, 연합교회, 오순절교회 등 20개이상의 다양한 교파들이 회원교회로 참여하고 있다.
한국교회에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에 속한 대한성공회, 한국기독교장로회,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기독교대한감리교,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가 가입했다. NCCK에 속한 구세군대한본영, 기독교대한복음교회, 정교회한국대교구는 WCC에 동의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만, 회원으로 가입은 하지 않고 있다.
– p. 282-2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