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부터 시(詩)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 전까지는 초등학교 때 백일장 나가서 써 본 것 이 전부였습니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30여년 사회복지 현장에서 일을 해 온 저는 ‘작가’와는 거리가 먼 생활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인가 SNS에 올린 글을 많은 분들이 읽어주시고 응원해주셔서 그동안 공개, 혹은 비공개 된 글을 출간할 용기를 내었습니다. 몇 년 전 저희 시설에 말기 암을 앓으시는 60대 초반 여성분이 들어오셨습니다. 저희가 요양시설은 아니지만 드물게 중환자가 들어오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분은 매우 활동적인 분이셔서 몸이 스러져가는 와중에도 두고 온 직장과 교회를 염려하시며, 늘 다시 일할 궁리를 하셨습니다. 어느 일요일, 다니시던 교회를 가시겠다고 하여 거기는 먼 곳이고 차도 몇 번 갈아타야 해서 저희가 말리는데도 ‘괜찮다’ 하시고 나가셨는데, 결국 버스에 올라타시기도 전에 주저앉아서 다시 모셔 와야 했습니다. 그때서야 그 분은 자신이 밖에 나가 자유로이 다닐 수 없음을 아시고 조용히 집에 앉아 무언가를 적어가셨습니다.
그 분에게는 대학생 아들이 있는데 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글로 적는 것 같았습니다. 이제 이 세상을 떠날 것을 받아들이시고 남아있는 사랑하는 이들에게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적으셨던 것입니다. 그 분의 그 모습을 저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모습, 펜을 잡은 그 손은 연약했지만, 그 정신과 영혼은 맑고 힘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때 ‘나도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삶을 기억하는 것이며,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나는 순서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시간을 알고 있는 것도 아니기에, 사랑하는 이들에게 남기고 싶은 선물로 이 보다 더 좋은 것이 없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튼 그 분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엄숙한 마음으로 저도 글쓰기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그 여성분은 시설을 떠나셨고 몇 달 후 가족과 교우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운명하셨습니다. 제가 글을 써 놓고 보니, ‘아, 이게 정말 내가 쓴 건가?’ 의아해하며 ‘나도 시를 쓸 수 있구나’를 새삼 알게 되었습니다. 시는 등단한 시인만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말하고 노래하듯이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것들은 자신이 스스로 꺼내서 써보기 전에는 그 보물이 거기에 있는지도 모를 수가 있습니다. 생각보다 ‘내가 모르는 내 속에 있는 보물’이 누구에게나 많은 것 같습니다. 저에게 ‘시’는 늦게나마 저를 피워 준 꽃이며, 세상과 소통하는 도구이기도 했습니다. 나아가 저와 함께 하는 가난하고 상처 입은 이들과 부르는 희로애락(喜怒哀樂)의 합창이기도 합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적어 놓고 보니 자연으로부터 지혜를 얻은 글들이 많음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또한 시를 쓰는 시간은 나 자신과 오롯이 있음으로 자연히 마음의 거울에 비추인 나 자신을 바라보는 시간이 되었다고 생각됩니다. 때문에 시는 저에게도 치유와 회복 그리고 성장의 길이 되어주었다고 여겨집니다. 그러기에 이 책의 구성을, 지혜로 이끄는 스승, 자연에서/그건 바로 나였다-바깥세계로부터 내면세계로/일을 통해 배운 삶과 사랑, 이렇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보았습니다. 코로나19의 위기로 세상이 온통 갇히게 되었을 때, 저는 제 작은 방 창가에 앉아 글쓰기에 몰입했습니다. 우연히 시설 분들과 함께 써본 붓글씨가 계기가 되어, 제 글을 일일이 붓으로 쓰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려 본 적 없는 삽화까지 넣게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만 초보였던 붓글씨도 연습이 많이 되었습니다.
캘리그라피(Calligraphy)는 마음 이끄는 대로 쓰는 자유로운 멋과 글씨 전체의 조화를 중요시 하는 면이 있지만 저는 여기에서 글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하나같이 또박또박 글자를 썼습니다. 한편, 시의 줄과 문단이 조금씩 어색한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글씨의 배치를 고려하여 그리되었으므로, 글과 글씨가 서로를 배려하고 서로에 봉사하는 차원에서 사이좋게 역할을 분담한 것이라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붓과 물감과 종이와 벗되어 놀 때, 내 방 창문으로 햇빛과 바람이 살며시 들어와 주어 이 다섯 친구(五友)와 사랑에 빠진 날들이었습니다. 혼자 있을 때 충만해지고 창조되는 나를 느낍니다. 그리고 그 ‘창조적인 홀로’가 오늘 이 글을 읽는 독자들과 공감한다면 더 좋은 만남이 될 것을 기대합니다.
다만, 작품들이 아직 미완성으로 길 위에 있다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은 피어나고 싶어 합니다. 마음은 마음에 닿고 싶어 합니다. 제 사랑의 표현이자 저를 닮아있는 저의 분신들을 여기에 내어놓습니다. 그리고 이 시 속에는 가슴 저미는 사연들로 가득한 시설의 가족들이 있고 저와 동시대를 살며 성장한 고마운 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저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시고 생명력을 불어넣으시는 내 속의 하느님도 계십니다. 또 북한산 아래 내가 사는 정릉동의 아름다운 숲과 계곡은 영혼을 맑게 해 주며 영감으로 이끌어 지친 마음을 쉬게 해준 크나큰 축복의 선물이었습니다. 이 안에 ‘나’ 아닌 것, ‘우리’ 아닌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는 원래 자연입니다. 우리는 원래 평화입니다. 지금 우리가 신음하고 아파한다면 다시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갈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 위태로운 세파 속 두려움 내던지고, 여윈 몸과 빈 주머니 가벼워진 생각으로 그대, 평화가 되라…” 햇살 같은 미소 하나로도 빈 가슴을 채울 수가 있겠지요. 서로의 거울이 되어 서로를 깨우쳐 주며, 감사의 작은 마음 즐겨 주고받으며, 소소한 일상으로 함께 웃으며, 부디 홀로 울고 있지 마시기를… 그 때에, 많은 생각들도 사라질 것입니다. 3월에 출간 된 “가난한 너희, 행복하다”(공저 수필집)에 이어, 4월에 출간된 저의 수필집 “가난한 우리, 사랑할 일이 남았다”와 이야기의 맥을 같이 하는 “가난한 그대, 평화가 되라” 이 한 권의 시집이 아파하는 이 세상에서 독자들과 함께 한 점의 평화를 더하는 기도이자 작은 희망이 되기를 소망하며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마음 가난한 모든 분들에게 바칩니다.
<저자 서문에서>
<저무는 가을 길에서>
“여기, 바람에 실려 내리는 당신의 손이 있습니다. 잎 새 같은 매순간 당신도 함께 걸으셨습니다. 나무에 달려 있을 때나, 땅에 누워 있을 때
그리 다르지 않은 고운 모습
삶과 죽음이 또한 이 같지 않겠습니까?
잠깐이기에 못내 아쉬운 가을 같은 생(生)
그래서 더욱 애틋하게 보듬습니다. 속으로 불타는 가슴, 몰래 삭이는 기도를 품었기에
다가올 겨울 이미 따뜻합니다.” 시인은 낙엽을 “당신의 손”이라고 표현한다. “당신”은 신(神)이
될 수도 있고, 상상하기에 따라 그 누구도 될 수 있을 것이다. “잎 새
같은 매 순간”이라는 표현 또한 찰나적 변화의 시간을 한 잎 한
잎의 공간 속에 배치하는 탁월한 발상이다. 삶과 죽음이 바로 이
‘한 잎 한 잎의 잎 새’의 시공 속에 전개되기도 한다. 그러한 생로
병사의 매 순간에도 ‘신(神)’은 함께 걷고 있다. “나무에 달려 있을
때나, 땅에 누워 있을 때”에도, ‘신(神)’의 손길은 떠나지 않기에, 혹독한 겨울이 곧 다가올지라도 ‘기도’ 속에 품은 ‘신(神)의 온기’는
거뜬히 ‘저무는 가을’을 건너고 겨울을 맞이할 차비를 하고 있다. 그래서 삶도 아름답고 “죽음 또한 그와 같으리라”는 고백을 하는
듯하다. 한편의 아름다운 서사시와 같은 작가의 ‘시·서·화(詩·書· 畵)’를 읽고 보면서 독자에게도 일독을 적극 권한다.
-추천인 이 명 권 (동양철학자)의 글에서-
저서
「가난한 너희, 행복하다」(공저)
「가난한 우리, 사랑할 일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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