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복과 관련하여 오늘날 제기되는 비난은 야웨께서 야만적이고 부도덕한 방식으로 가나안 사람들의 권리를 침해하고 계신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의는 문맥상 본문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본문에는 인권이나 신적 도덕성[divine morality]과 같은 것이 없다). 문맥상 본문은 야웨는 누구든 자신이 원하는 자에게 땅을 분배하실 수 있기 때문에 그분이 원하는 자에게 땅을 분배하신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나 문맥상 이것은 신에 대한 정의의 일부이며(삿 11:24에서 그모스도 그것을 할 수 있음) 특별히 중요하지 않다. 본문은 야웨께서 이스라엘에게 땅을 확실히 주셨다는 점을 강조하지만 야웨께서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실 수 있었다는(즉, 야웨께서 그것을 행하실 법적인 권리를 가지고 계신다는) 개념에 특별한 중요성을 두지 않는다.
명제 7_이스라엘 사람들과 가나안 사람들은 모두 다른 사람의 정당한 재산을 훔치는 자들로 묘사되지 않는다 중에서
거룩은 신과의 동일시를 의미하고 도덕이나 청결의 기준을 충족시키는 것과 동일시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이나 가나안 사람을 막론하고 어느 누구도 거룩하지 않은 죄를 범할 수 없다. 거룩은 지위다. 그 땅의 정복은 분명히 이스라엘의 거룩한 지위와 관련이 있지만 가나안 사람들 편에서 거룩이 없는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명제 10_거룩은 하나님이 부여하신 지위다. 그것은 도덕적 행위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거룩을 갖지 못한다고 해서 심판받지 않는다 중에서
정복 시대에 하나님은 자신이 사용하기에 적합하도록 땅을 준비시키기 위해 그 땅에서 가나안 사람들을 제거하신다. 포로기에 하나님은 자신과 동일시하셨던 질서를 시행하는 것에 대한 자신의 헌신을 입증하기 위해 그 땅에서 이스라엘을 제거하고 계신다. 그 사건들 사이에는 가능한 유사점이 없다. 그러므로 포로기 때 이스라엘에게 일어나는 일이 정복 시대에 가나안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과 같다고 주장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겉모습은 비슷할지 몰라도 사건의 본질은 비교될 수 없다. 결과적으로 이스라엘로 하여금 언약의 저주와 추방을 얻게 했던 것과 같은 일을 함으로써 가나안 사람들이 추방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명제 11_이스라엘은 언약 아래 있고 가나안 사람들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정복 시대에 가나안 사람들이 그 땅에서 추방되는 것은 포로기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땅에서 추방되는 것과 비교함으로써 평가될 수 없다 중에서
레위기와 신명기에서 가나안 사람들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는 언어는 고발이 아니며 전쟁에 대한 이론적 근거도 아니다. 그것은 동시에 야웨에 대한 이스라엘의 의존성을 강조하고, 언약 질서를 이상적인 존재 상태로서 칭송하며,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언약의 불충실로 인한 결과에 대해 경고하기 위해 고안된 문학적인 수사적 표현과 유형론을 훌륭하게 차용한 것이다.
명제 13_가증스러운 것으로 묘사되는 행동들은 이스라엘 언약에 따른 이상적인 행동과 대조를 이루기 위해 의도된 것이지, 그것들을 행한 사람들을 범죄자로 고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중에서
역사적인 가나안 사람들은 그들이 실제로 정상 기능을 저해할 만큼 수간을 좋아하는 이들이 아닌 것처럼 실제로 인간 이하의 혼돈을 일으키는 괴물이 아니었다. 정복 이야기의 목적은 실제 사람들의 성격을 문자적으로 엄밀하게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의 성격이 적절하게 이해될 수 있는 방식으로 그들에게 일어나는 일을 묘사하는 것이다. (모든 인류가 그렇듯이) 그들은 죄인이었지만 그것 때문에 정복이 그들에게 일어난 것은 아니다. 그들은 죄인처럼 취급되지 않고 혼돈의 생물처럼 취급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본문은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명확히 하기 위해 (무적의 야만인들에 대한 수사적 표현을 통해) 마치 그들이 혼돈의 생물인 것처럼 묘사한다.
명제 14_정복 기사의 이미지는 창조를 재현한다 중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배교(apostasy)를 제거하기 위해 무신론자와 불신자를 “헤렘”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영토를 정복하고 그것으로 하여금 신정 통치를 받게 해서는 안 되며, 부도덕을 이유로 외집단의 개인들에 대해 살인적인 판단을 내려서는 안 된다. 대신 그들은 형벌로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을 통하여 그분의 목적을 수행하실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서 기독교 공동체의 온전함을 위해 스스로를 “헤렘”해야 한다. 그것이 가나안 정복이 옛 언약의 맥락과 목적 안에서 한 일이며, 그리스도인들이 새 언약의 맥락과 목적 안에서 해야 할 일이다.
명제 21_신약에서 “헤렘”의 적용은 우리가 이전의 신분을 벗는 것과 그리스도의 주권에 복종하는 것에서 발견된다. 따라서 “헤렘”은 사람들을 죽이는 것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중에서
제1부 해석
명제 1 성경을 일관되게 읽는 것은 성경을 고대 문서로 읽는 것을 의미한다
명제 2 우리는 성경이 무엇인가에 대한 우리의 기대를 조정함으로써 정복의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
명제 3 성경은 우리에게 선함을 정의하거나 선함을 생산하는 방법을 알려주지 않고, 그 대신에 하나님이 생산하시는 선함에 대해 알려준다
제2부 가나안 족속은 죄를 지은 자들로 묘사되지 않는다
명제 4 성경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고통이 자동적으로 희생자의 악행에 기인하는 것일 수 없음을 분명하고 일관되게 가르친다
명제 5 신의 응보를 나타내는 일반적인 본문 지표 중 어느 것도 가나안 사람들의 경우에 나타나지 않는다
추기 민수기 31장의 미디안 사람들
명제 6 창세기 15:16은 가나안 사람들이 죄를 범하고 있었음을 알리지 않는다
명제 7 이스라엘 사람들과 가나안 사람들은 모두 다른 사람의 정당한 재산을 훔치는 자들로 묘사되지 않는다
제3부 가나안 사람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는 죄를 범한 것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명제 8 그 땅의 백성은 언약 규정을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고발당하지 않으며, 이스라엘도 그들을 언약 안으로 끌어들일 것으로 기대되지 않는다
추기 구약에서의 귀신들과 우상숭배
명제 9 레위기 18-20장에 포함된 것과 같은 고대 법전은 지켜야 할 규칙들의 목록이 아니므로 가나안 사람들은 그것을 위반하는 죄를 범할 수 없다
명제 10 거룩은 하나님이 부여하신 지위다. 그것은 도덕적 행위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거룩을 갖지 못한다고 해서 심판받지 않는다
명제 11 이스라엘은 언약 아래 있고 가나안 사람들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정복 시대에 가나안 사람들이 그 땅에서 추방되는 것은 포로기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땅에서 추방되는 것과 비교함으로써 평가될 수 없다
제4부 정복 이야기의 언어와 이미지에는 문학적ㆍ신학적 의미가 있다
명제 12 레위기와 신명기에 있는 가나안 사람들에 대한 묘사는 고발이 아니라 일반적인 고대 근동 문학 장치의 정교한 차용이다
추기 무적의 야만인들과 르바임
명제 13 가증스러운 것으로 묘사되는 행동들은 이스라엘 언약에 따른 이상적인 행동과 대조를 이루기 위해 의도된 것이지, 그것들을 행한 사람들을 범죄자로 고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명제 14 정복 기사의 이미지는 창조를 재현한다
제5부 “헤렘”이라는 히브리어 단어가 일반적으로 잘못 번역되기 때문에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하고 있는 일이 종종 잘못 이해된다
명제 15 “헤렘”은 “완전히 파괴하다”를 의미하지 않는다
추기 정복 기사에서의 과장법
명제 16 공동체의 “헤렘”은 특정 민족의 사람들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정체성을 파괴하는 것에 초점을 둔다
추기 신명기 7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
명제 17 이스라엘의 정복 전쟁은 모든 고대 전쟁과 같은 방식으로 수행되었다
명제 18 라합과 기브온 사람들은 “헤렘”의 예외가 아니며 아말렉 족속에 대한 “헤렘” 사용은 “헤렘”이 형벌임을 나타내지 않는다
추기 “헤렘”과 불결의 제거
명제 19 정복 사건에서 “헤렘”의 논리는 이스라엘의 봉신 조약의 맥락에서 작동한다
제6부 이러한 이해를 적용하는 방법
명제 20 정복 기사를 포함하여 구약성경은 신약성경을 해석하기 위한 모형을 제공하고 이어 신약성경은 오늘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명제 21 신약에서 “헤렘”의 적용은 우리가 이전의 신분을 벗는 것과 그리스도의 주권에 복종하는 것에서 발견된다. 따라서 “헤렘”은 사람들을 죽이는 것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결론
이 책의 중심 논지가 보수적이고 문자적인 성경 읽기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불편한 저항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지 모르나 다원주의적 평화가 세계 문명 시민이 추구할 질서라고 생각하는 현대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심각하고 안심이 되는 문제를 제기해주고 있다. 가나안 정복 전쟁과 관련된 성경 본문으로 설교하는 모든 설교자와 주일학교 교사들에게는 필독서가 되기를 기대한다.
김회권 | 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 구약학 교수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전쟁 기사는 많은 학자와 일반 신자들에게 심한 두통거리였다. 잔인한 하나님, 폭력에 연루된 하나님을 상정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월튼 부자는 고대 근동의 유사 문헌들, 고대 언어의 어휘론, 고대의 문학적 관습으로서의 과장법 등을 설명하면서 독자들에게 고대 문헌 기록 방식과 문학적 관습에 귀를 기울일 것을 요청한다. 정복 전쟁 기사를 골치 아픈 주제라고 옆으로 제쳐놓았던 사람이라면 반드시 이 책을 정독해 보기를 권한다. 구약학과 구약신학적으로 진일보한 학문적 공헌이다.
류호준 | 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 은퇴 교수
구약성경의 난제 중 난제는 가나안 정복 기사와 관련한 “헤렘”이다. 구약성경에 언급된 헤렘 관습으로 야웨 하나님은 집단 학살을 조장하거나 묵인하는 “도덕적 괴물”로 비치기도 한다. 구약성경의 야웨는 “폭력의 하나님”으로 보이기도 한다. 월튼 부자의 시도는 가나안 족속, 정복 이야기, 헤렘에 대한 기존의 이해를 뒤집고 새로운 길로 안내한다. 이를 통해 잃어버린 세계와 본문이 발견되기를 바라는 저자들의 소망이추천자의 희망이기도 하다.
차준희 | 한세대학교 구약학 교수
가나안 정복은 거의 틀림없이 성경에서 가장 다루기 힘든 윤리적 문제이며 지금까지 어떤 해결책도 합의를 얻지 못했다. 이 저자들은 어려움을 완화시키는 참으로 신선한 접근법을 제공한다.
존 힐버 | 그랜드래피즈 신학교 구약학 교수
아버지와 아들 관계인 이 훌륭한 책의 저자들은 자신들의 생각에 관련이 있는 고대 근동의 평행 자료에 비추어 여호수아서에 대한 신선하고 더 평화로운 읽기를 제공한다. 그들은 여호수아서에서 발견되는 폭력과 그것이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칭찬할 만하고 철저하며 시사하는 바가 많
은 성찰을 제공했다.
로버트 허바드 | 노스파크 신학교 성서학 명예 교수
월튼 부자는 이 골치 아픈 본문들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들을 고대의 맥락에 비추어 해석해야한다고 효과적으로 주장하면서 이스라엘 정복의 윤리적ㆍ도덕적 문제에 관한 최근의 많은 논의에 매우 필요한 교정 수단을 제공한다.
데이비드 램 | 비블리컬 신학교 앨런 맥레이 구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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