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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의 희열 (Expository Exultation)

$46.00 $32.20

저자/역자 : 존 파이퍼/윤종석  |  출판사 : 도서출판 두란노
발행일 : 2019-07-17  |  (150*210)mm 452p  |  978-89-531-3530-7

브라이언 채플, 싱클레어 퍼거슨, 매트 챈들러 추천작

40년간 설교자로 살아온 존 파이퍼의
설교자들을 향한 묵직한 외침

“오늘의 설교는 예배였는가?”
“오늘의 설교는 청중의 예배를 깨웠는가?”
“정확한 가르침과 마음에서 우러난 선포였는가?”
“설교는 강해의 희열이다!”

바쁜 사역 일정에 치여 정신없이 설교를 준비하는 이들, 잘하고 싶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방법을 찾는 설교자들, 자신의 일상과 자신이 하는 설교의 괴리감으로 고민하는 설교자들을 위한 책이 출간되었다. 40년간 설교자로 살아온 존 파이퍼가 들려주는 설교의 정수, 《강해의 희열》.
이 책은 이전에 펴낸 두 권에서 이어진 유기적 파생물이며 합해서 3부작을 이룬다. 《존 파이퍼의 성경과 하나님의 영광》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온전한 진리임을 어떻게 알 수 있는지에 초점을 맞추었고, 《존 파이퍼의 초자연적 성경 읽기》에서는 세상 모든 민족이 불같이 뜨거운 사랑으로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성경 자체의 궁극적 목표에 걸맞게 성경 읽는 법을 다루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강해의 희열》이 던지는 질문은 이것이다. “성경이 온전한 진리이며 예배에 걸맞게 초자연적으로 읽어야 한다면, 이 말씀을 설교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이고 그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모든 복음 설교자의 손에 들려야 할 책
현세대와 다음 세대 복음의 전령을 빚는 필독서

존 파이퍼는 이 책에서 설교의 목적을 설득력 있게 역설한다. 본래 설교란 단지 본문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그 자체가 예배로서 예배를 깨우는 수단이다. 기독교의 설교는 하나님이 정하신 기적이며, 그 목표는 청중을 깨워 그리스도의 영광을 초자연적으로 보고 음미하고 드러내게 하는 데 있다. 파이퍼는 40년 넘게 설교하고 가르친 경험을 졸여 내서 설교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에서 무엇을 어떻게 소통할 것인지 보여 준다. 그리하여 성경에 물씬 젖어 그리스도를 높이는 하나님 중심의 설교를 통해 이 땅에 하나님의 목적이 진척되게 한다. 곧 ‘강해의 희열’(Expository Exultation)이다.
이 책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에 접근하는 방식과 말씀을 전하는 열정이 근본적으로 달라질 것이다. 당장의 설교 준비에 급급해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설교자들이 설교의 본질과 목적으로 돌아가게 한다. 또한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설교가 ‘말만 유창한 설교, 설교자와 청중의 삶에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설교, 예배가 아닌 설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는 설교’는 아닌지 분별하게 한다. 소중한 사명과 처음 마음을 회복하는 동시에 더 뜨겁고 깊은 설교의 세계로 들어가는 확실한 동기 부여가 될 것이다.

이번 장의 초점은 강해로서의 설교가 아니라 희열로서의 설교 즉 예배로서의 설교다. 이런 설교는 강해와 희열이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놓치지 않는다. 희열은커녕 자신이 믿지도 않는 본문으로도 강해는 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강해 자체를 설교의 결정적 표지로 간주하지 않는다. 마귀도 성경을 강해할 수 있고, 본문이 전하려는 참명제를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마귀는 성경의 의미에 담긴 하나님의 영광을 희열할 수 없고 오히려 혐오한다. 그래서 마귀는 설교할 수 없다. 물론 생각 없는 열성파는 성경 본문의 의미를 완전히 무시하고도 설교에 희열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본문의 참뜻과 그 배후 실체에서 비롯한 희열은 아니다. 따라서 희열 자체도 설교의 결정적 표지는 아니다. 그러나 양쪽, 성경의 참뜻을 밝히는 강해와 그 의미 속에 담긴 하나님의 영광을 공공연히 중시하는 희열이 합해지면 설교다운 설교가 나온다.
– 71쪽 중에서강해의 희열인 설교의 뿌리는 삼위일체 하나님께 있다. 그분은 자신을 아시기에 성부와 성자로 존재하시고, 성부와 성자는 서로를 즐거워하시기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존재하신다. 알고 즐거워하심은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이다. 인간에게도 알고 즐거워하는 똑같은 능력이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 능력을 주신 궁극적인 목적은 그분을 알고 즐거워함으로써 그분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묵상하고 칭송하게 하시기 위해서다. 바로 그것이 예배다. 하나님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참으로 알고 마땅히 즐거워하며 결국 이를 드러내는 게 예배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이 모이는 공예배는 성격상 특별한 소통 방식이 필요하며, 하나님의 진리를 명확히 밝히고 그분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도록 하는 것이 이 소통의 목표다. 이 특별한 소통 방식을 신약에서 “설교”(preaching)라 칭한다(딤후 4:2). 설교는 가르침 이상이며 감정의 자극 이상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속성이 지식이나 즐거움 둘 중 하나만이 아니라 양쪽 다이기 때문이다. 그분은 영원 전부터 아시고 즐거워하신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아니시다. 우리도 양쪽을 다 경험한다. 그렇지 않으면 예배가 아니고 본래 지음받은 우리가 아니다. 설교도 양쪽을 다 구현한다. 그렇지 않으면 설교가 아니다. 양쪽을 다 구현하는 설교가 내가 말하는 “강해의 희열”이다. 즉 강해로 진리를 구현하고, 희열로 기쁨을 구현한다. 설교가 하나님 백성의 공예배에 독특하게 합당한 까닭은 예배를 깨우면서 그 자체로 예배이기 때문이다.
– 131-132쪽 중에서

강해의 희열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예배를 돕는지를 더 구체적으로 밝히는 것이 이번 장의 목표다. 여기서 예배란 예배 시간만 아니라 일상생활까지 포괄한다. 양쪽 모두에서 하나님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게 그분의 뜻이다(고전 10:31; 롬 12:1-2). 이게 초미의 문제인 까닭은 진정한 예배, 즉 전례와 일상생활 모두가 그저 자연적 원인의 산물이 아니라 기적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예배의 본질을 놓치지 말라. 한낱 행위로써의 “예배 시간”은 그저 자연적 원인의 산물일 수 있으나, 예배자 안에 예배의 본질을 경험하고 있다면 그럴 수 없다. 예수 안에서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전부로 만족하는 일(그것이 내가 정의하는 예배의 본질이다)은 그저 자연적 원인의 산물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의 질문은 “자연적 지식과 자연적 감정을 높이기 위해 설교자가 할 수 있는 자연적인 일은 무엇인가?”가 아니다. 그런 질문이라면 나는 조금도 관심이 없다. 설교는 자연적 수사법의 변종이 아니며, 말로 자연적 사고를 설득하여 행동을 고치려는 수단도 아니다. 수사법으로 자연적 사고를 신기하게 움직일 수는 있고, 그런 화술로 큰 사회 운동을 일으킬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사고에 미치는 영향에는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보는 안목이 결여되어 있을 수 있다.
설교는 그런 설득에 관심이 없다. 설교의 목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영적으로 보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최고의 아름다움이자 만족이심을 “맛보도록” 영혼을 깨우고 유지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빠진 채 그럴듯해 보이는 수사법만으로 이룩한 성공은 오히려 교회에 치명적이다.
– 142쪽 중에서

나는 청중을 이제부터 영원까지 성령으로 예배하도록 돕기 위해 성령으로 설교하려 애써 왔다. 청중을 재미있게 해 주거나 단지 교리적 진리를 납득시키는 일은 내 관심 밖이다. 재미와 교리라면 마귀가 나보다 뛰어나다. 마귀는 거기서 아무런 유익도 얻지 못할뿐더러 이로써 선을 행하지도 못한다. 마귀의 일이자 마귀가 나보다 더 잘하는 일에 내 평생을 바칠 마음은 없다. 지극히 아름답고 존귀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는 일만은 마귀가 할 수 없다. 그는 이 아름다움을 다른 무엇보다도 더 음미할 수 없고 생전 이를 알릴 수도 없다. 그런데 이 아름다움이야말로 우주가 존재하는 이유,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 공예배가 존재하는 이유, 설교가 존재하는 이유다. 성령의 초자연적 역사가 없이는 예배와 설교의 목표가 무산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공예배에서 인간의 설교 활동이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도록 설계하셨다. 이런 설교는 예배가 되어 예배를 깨운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설교는 성경의 영광스러운 진리를 보고 말하고 음미하고 찬미한다. 먼저 진리의 영광을 보고 음미한 설교 덕분에 듣는 이들도 똑같이 한다. 그래서 강해의 희열인 설교는 성령 안에서 예배함으로써 예배를 촉진한다.
– 164쪽 중에서

기독교 설교는 얼마든지 언변이 좋을 수 있다. 구원이나 성화의 결정적 요인은 언변이 아니라 하나님이지만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말씀에서 난다. 그런데 성경말씀은 시종 언변이 좋다. 큰 효과를 내는 쪽으로 어휘를 배합했다. 게다가 하나님은 우리를 초대하여 우리 이름이 아니라 그분의 이름을 위해 달변의 문장을 짓게 하시고, 그분의 신비롭고 주권적인 은혜 가운데 때로는 우리가 선택한 어휘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그 어휘 때문에 청중의 마음속에서 스스로 영광을 받으신다. 이렇게 그분은 우리를 낮추시고 친히 모든 영광을 취하신다.
– 213쪽 중에서

설교는 본문의 단어와 어구 자체에 치열하게 주목함으로써 본문이 전달하려는 실체 속으로 뚫고 들어간다. 설교자가 무한히 중요한 실체(그리스도, 은혜, 의, 영생 등)에 이를 수 있는 결정적인 접촉점은 하나뿐이니 곧 성경에 감화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청중의 접촉점도 그것이다. 설교자는 성경의 자리를 대신하는 게 아니라 성경이 전달하려는 실체를 청중에게 보여 준다. 회중을 도와 이런 실체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성경을 통해 보고 맛보게 해 주는 게 설교자의 본분이다.
이런 설교는 많은 교회가 익숙해진 설교와는 완전히 다르다. 그래서 설교자가 최대한 많은 청중을 붙들어 두려면 대단한 인내와 깊은 지혜와 가르치는 은사가 필요함을 나도 안다. 그러나 자신이 보았고 또 보여 주는 내용의 현실적이고도 영원한 가치 때문에 설교자의 마음에 기쁨이 충만하다면, 주인이신 그분의 음성을 아는 이들(요 10:4)은 설교자와 함께 비상할 것이다. 강단에 명쾌하고 권위 있는 “음성”이 울리고 있기 때문이다.
– 241-242쪽 중에서

바울의 말은 그가 알고 말하고 행한 다른 모든 것도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와 연관시켜 알고, 말하고, 행했다는 뜻이다. 바울은 십자가 아래서 천막을 지었고, 십자가 아래서 말씀을 전했고, 십자가 아래서 대적과 변론했다. 그의 모든 언행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와 관계가 있음은, 말로든 행위로든 남에게 베풀 수 있는 모든 선이 오직 예수의 죽음 덕분에만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으셨다면 바울이 남에게 내놓을 소망이란 전무했다. 그의 선행이나 그가 설교한 기쁜 소식은 모두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덕분이었다. 그래서 그는 매사를 이런 식으로만 “알고” 생각했다. 그 전제하에서만 설교했다.
– 319-320쪽 중에서

그리스도인은 아무 순종이나 아무 사랑을 행해서는 안 된다. 믿음에서 나오는 순종과 사랑만이 하나님께 효력이 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 5:6). 이 믿음의 정수는 하나님을 기뻐함이다. 그래서 바울의 여러 포괄적 진술에 믿음으로 사랑을 추구한다는 말뿐 아니라 청중의 기쁨(믿음의 기쁨)을 추구한다는 말도 나온다.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빌 1:25).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고후 1:24).
이것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다. 그러므로 본문이 무엇이든 모든 설교는 회중을 도와 본문의 실체를 경험하게 하되, 그들이 이를 사망에 이르는 순종이나 사랑이나 거룩함으로 변질시키지 않게 해 주어야 한다. 성경에 엄연히 그런 사례가 나와 있기에 우리는 이런 변질이 가능함을 안다.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롬 9:31-32).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 애쓰다가 멸망할 수도 있다.
– 373-374쪽 중에서

다른 무슨 수로도 보이지 않았을 것들을 그분이 친히 가르쳐 보여 주신다. 당신에게 기적을 베푸신다. 말씀 앞에 온종일 헛수고만 하여 밤늦게 무릎 꿇고 눈물 흘리며 애달파할 때, 한순간 섬광처럼 본문의 실체가 눈에 보인다. 본문의 조홧속이 순식간에 깨달아진다. 이는 선물이다. 그분이 당신에게 반드시 알려 주신다. 매번 수없이 그리하신다. 그분의 영광과 청중의 유익을 위해 예수의 이름으로 감당하는 당신의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다.
이 순간, 이 큰 무리, 이 작은 모임, 이 껄끄러운 주제, 이 난해한 본문 앞에 나 역시 나의 부족함으로 떨었던 적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래도 그분의 말씀이 결코 헛되이 돌아오지 않을 줄을 믿고 담대히 나아가면 매번 그분이 내 곁에 함께 서 계셨다. 그분은 신실하시다.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게] …… 하려 하심이니”(딤후 4:17). 당신에게도 똑같이 해 주실 것이다. 당신이 십자가를 확신하고 청중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가운데 그분을 신뢰하고 말씀에 철저히 몰입한다면 말이다.
– 437-438쪽 중에서

머리말.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이 시대 설교자들에게
ㅡ 행복한 짐, 강해의 희열1부. ‘예배’하러 모이는 하나님의 사람들
ㅡ 설교의 배경

1. 우리는 왜 ‘예배’하는가
예배의 본질

2. 우리는 왜 ‘모여서’ 예배하는가
공예배의 중요성

2부. 공예배에 ‘설교’가 꼭 필요한가
ㅡ 설교의 기원과 합당성

3. 설교, 강해의 희열이다
교회 안에 울려 퍼지는 복음

4. 설교, 예배를 깨우면서 그 자체로 예배다
탄탄한 역사적, 신학적 뿌리들

5. 설교, ‘삼위일체 하나님’의 속성과 맞닿아 있다
근본 중의 근본

3부. 설교, ‘성령’이 하시는 일이다
ㅡ ‘성령의 초자연적 능력’으로 설교하기

6. 설교, 일상을 바꾸는 초자연적인 기적
영적인 일

7. 설교, 성령 안에서 믿음으로만 할 수 있다
내가 경험한 APTAT

4부. 설교, ‘사람’을 통해 하는 일이다
ㅡ ‘설교자의 자연적 능력’으로 설교하기

8. ‘명쾌한 사고’와 ‘논리적 일관성’을 갖추라
허위 전제와 억지 추론의 함정

9. ‘창의적 언변’에 힘쓰라
“말의 지혜로 하지 않는다”는 것의 진실

5부. ‘성경’을 더욱 깊이 파라
ㅡ 본문에 충실하기

10. 본문에 심긴 ‘실체’ 속으로 뚫고 들어가라
치밀한 어구 분석

11. 실체가 어떻게 본문 속에 빛나는지 ‘보여 주라’
본문과 실체의 ‘연관성’ 밝히기

6부.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실체’를 설교하라
ㅡ 모든 설교에 충만해야 할 세 가지

12. 성경 기자의 포괄적 실체관에 입각해 본문을 보라
도덕주의적 설교, 환원주의적 설교

13. ‘하나님의 영광’을 설교하라
모든 본문의 궁극적 목표

14. 그분의 영광을 명확히 보고 사랑하게 설교하라
‘하나님의 영광’ 설교의 실제

15.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설교하라
모든 선의 기초이자 궁극의 선

16. 십자가가 삶의 현장으로 이어지게 설교하라
‘십자가의 그리스도’ 설교의 실제

17. ‘믿음의 순종’을 설교하라
최종 구원에 이르는 생활 방식

18. 기쁨과 사랑과 영생을 추구하게 설교하라
‘믿음의 순종’ 설교의 실제

7부. 신약 시대에 하는 구약 설교
ㅡ ‘성경적으로’ 설교한다는 것의 참의미

19. 모든 구약 본문으로 ‘하나님의 영광’ 설교하기
더욱 선명해지는 본문 해석

20. 모든 구약 본문으로 ‘십자가의 그리스도’ 설교하기
의미의 왜곡이 아니라 의미의 완성

21. 모든 구약 본문으로 ‘믿음의 순종’ 설교하기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오늘

맺음말. 더없이 위험하고도 더없이 영광스러운 소명

성경 전체에 충만해 있는 복음의 영광스러운 능력을 드높이는 훌륭한 저작이다.
– 브라이언 채플 _그레이스장로교회 목사, 커버넌트신학교 명예총장설교자를 바닥에 엎드리게 했다가 다시 일으켜 세워 하나님을 위해 더 나은 사람이 되어 보다 잘 살아가고 싶게 만든다. 복음의 설교자라면 누구나 꼭 읽어야 한다.
– 싱클레어 퍼거슨 _리폼드신학교 조직신학 교수

본문에 뿌리박고 본문을 벗어나지 않는 파이퍼의 열의는 내가 본받을 청사진이 되었다. 금광을 품은 책이다.
– 매트 챈들러 _빌리지교회 수석목사, 액츠29교회개척네트워크 총재

전임 사역자라면 설교학의 통찰이 담긴 이 엄청난 보고(寶庫)를 깊이 파라.
– 샘 스톰즈 _브리지웨이교회 설교목사

존 파이퍼

우리 시대 기독교 복음주의를 대표하는 지도자. 신학적인 깊이와 실제적인 넓이를 겸비했다. “기독교 희락주의자”, “기쁨의 신학자”로 불린다. 1946년에 태어나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그린빌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휘튼칼리지에서 영문학(전공)과 철학(부전공)을 공부했고, 풀러신학교(목회학)과 독일 뮌헨대학교(신학 박사)에서 학위를 받았다. 박사 학위를 마치고 나서 6년간 베델칼리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1980년, 설교자로의 부르심을 압도적으로 느낀 뒤 베들레헴침례교회(Bethlehem Baptist Church,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 소재)에 부임했다. 이후 2013년까지 설교목사로 사역했다. 목회 현장에서 은퇴한 뒤 지금까지 ‘디자이어링 갓’(Desiring God) 사역을 통해 수많은 교회들을 지원하고 있으며, 베들레헴신학교(Bethlehem College and Seminary)에서 총장직을 맡고 있다.
《존 파이퍼의 성경과 하나님의 영광》, 《존 파이퍼의 초자연적 성경 읽기》, 《존 파이퍼의 병상의 은혜》, 《하나님을 들으라》, 《하나님의 기쁨》, 《거듭남》(이상 두란노), 《삶을 허비하지 말라》 (생명의말씀사), 《존 파이퍼의 장래의 은혜》(좋은씨앗), 《하나님이 복음이다》(IVP) 등 70종이 넘는 책을 집필한 작가로서, 글쓰기를 통해 전 세계 신앙인들을 만나 왔다. 휘튼칼리지에서 공부하던 시절 만나 결혼한 아내와의 사이에 아들 넷과 입양한 딸 하나, 열두 명의 손주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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