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신자로 빚어지는 오랜 노정,
좋은 길벗이 되어 줄 실전의 지혜
“평생 기독교 신앙을 실천한 사람” C. S. 루이스
그의 일상을 뚫고 나오는 복음의 충만한 빛
《순전한 기독교》,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같은 기독교 고전의 작가이자,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에서 오랜 시간 영문학을 가르쳤던 존경받는 스승,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변증가로 칭송받는 C. S. 루이스. 이 시대를 사는 무수한 신앙인들이 그의 치밀한 영적 탐구와 빛나는 지혜에 빚을 졌다. 그의 수고 덕에 우리는 차마 해석하지 못하고 말로 표현하지 못했던 우리 마음과 신앙의 상태를 들여다보고 진단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심오하고 생동감 넘치는 기독교 변증과 해설,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이해는 세상을 떠난 지 50년이 넘도록 지금껏 수많은 신자들의 길잡이가 되고 있다.
루이스의 뛰어난 논증은 ‘기독교 신앙을 철저히 실천한’ 깊은 지혜에서 발원했다. 신앙의 진수를 삶으로 체험한 사람만이 그토록 정곡을 찌르는 탄탄한 논리로 진리를 변호할 수 있다. C. S. 루이스의 작품들에서 ‘믿음의 실천’을 다룬 최고의 글들을 엄선한 책, 《신자의 자리로》에서 기나긴 신앙의 노정에 필요한 지혜를 얻으라.
사랑받는 작가 C. S. 루이스의 전작에서 엄선했다!
영생을 맛보는 찬란한, 그러나 평범한 순간들에 관하여
관념에 머무르는 신앙에서
일상 속 약동하는 신앙으로
국내에 번역되어 소개된 루이스의 여러 명저들을 포함해 아직 소개되지 않은 글 가운데 ‘믿음’과 관련한 글을 선별해 엮었다. 어떻게 믿을 것인가만 아니라, 어떻게 믿음을 실천할 것인가를 밝힌다. 장별로 이 땅에서 신자로 살아가면서 고민이 되는 지점들을 질문 형식의 제목을 달아 제시했고, 루이스의 다양한 글들에서 그에 해당하는 대답을 찾아 실었다. 구체적인 상황 가운데 예수 믿는 사람들이 걸어가야 할 길, 타협하지 않고 지켜야 할 자리를 통찰력 있게 그린다.
각각의 본문은 단순히 이 땅에서 옳게 신앙하는 법을 넘어, 신자가 마침내 이를 영광의 나라, 그리스도인이 누릴 영원한 삶을 그린다. 머리로 배운 성경 지식들을 내 삶의 현장으로 고스란히 옮겨 놓기에는 현실이 참으로 퍽퍽하며 만만찮다. 하지만 루이스는 이 고된 여정 끝에 우리가 마침내 도착할 그 나라, 기쁨의 그날을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한 풍부하게 보여 줌으로써, 이 험한 세상을 끝까지 믿음으로 걸어가도록 신자들에게 힘을 실어 준다.
* C. S. 루이스를 향한 찬사
옥스퍼드의 명사이자 케임브리지 교수인 그는 필시 생명력이 장구할 것이다. 공룡처럼 한물간 존재라는 자평과는 달리 그의 글은 늘 독자들의 현재 자리로 찾아가는 호소력이 있다.
<워싱턴 포스트>(The Washington Post)
기지와 지혜와 문체와 학식이 천국 문을 통과하는 필수 요건이라면 루이스는 천사의 반열에 들 것이다.
<뉴요커>(The New Yorker)
20세기의 어느 작가보다도 루이스의 말을 듣고 글을 읽는 이들은 자신의 철학적 전제를 재고할 수밖에 없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Los Angeles Times)
처음에는 도덕과 의무와 규율과 죄와 덕이 기독교의 관건인 것 같지만, 기독교는 우리를 이 모두에서 이끌어 내
그 너머의 세계로 데려간다. 여기까지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어렴풋이 내다보이는 그 나라에서는 혹시 농담으로라면 몰라도 이런 것들이 전혀 화젯거리가 못 된다. 거울이 빛으로 가득하듯이 거기서는 모두가 선(善)으로 충만하다. 그런데 그들은 이를 선은커녕 그 무엇이라고도 부르지 않고 부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저 그것의 근원이신 그분을 바라보느라 여념이 없다. 그나마 이는 현세를 떠나 내세로 들어서는 길목의 근처일 뿐이다. 그 너머까지 아주 멀리 내다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22쪽 중에서>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아무리 초라한 자연적 활동도 하나님께 드리면 그분이 다 받아 주시지만, 아무리 고상한 일도 그분께 드리지 않으면 다 악해진다. 기독교는 그저 자연적 삶을 새로운 삶으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 소재를 초자연적 목적을 위해 활용하는 새로운 질서다. …(중략)… 베토벤 같은 작곡가의 일도 파출부의 일도 정확히 똑같은 조건에서만 영적이다. 즉 “주께 하듯” 겸손히 하고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물론 그렇다고 청소 일을 할지 교향곡을 작곡할지 정하는 문제를 순전히 우연에 맡겨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두더지는 땅을 파고 수탉은 울어야 한다. 우리는 한 몸의 지체지만 분화된 지체라서 각기 소명이 다르다.
<28, 30-31쪽 중에서>
교사나 부모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고는 타인의 결점을 생각하는 일은 삼가라. 쓸데없이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들거든 그냥 밀쳐 내라. 대신 자신의 결점을 생각하면 어떨까? 그거라면 하나님의 도움으로 어떻게든 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가정이나 직장의 모든 까다로운 구성원 가운데 당신이 대폭 발전시킬 수 있는 사람은 하나뿐이다. 이 현실성 있는 목표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미루지 말고 지금 시작하는 것이 좋다. 언젠가는 해결해야 할 일인데 차일피일 미룰수록 그만큼 더 시작이 힘들어진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분명히 보다시피 “그 인간”에게 시기와 이기심과 앙심이 남아 있는 한 아무것으로도 그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할 수 없으며, 전능하신 하나님도 어찌하실 수 없다. 당신 안에도 그런 부분이 있음을 명심하라. 이를 고치지 않는 한 하나님의 능력이 막혀서 당신은 영원히 비참해질 수밖에 없다. 그 문제가 남아 있는 동안에는 당신에게 천국이 있을 수 없다. 코감기에 걸린 사람이 향기를 맡을 수 없고, 청각을 잃은 사람이 음악을 들을 수 없음과 마찬가지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지옥에 “보내시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 각자 안에 뭔가 자라고 있어서 미리 싹을 잘라 내지 않으면 그 자체가 지옥이 된다. 그만큼 심각한 문제다. 그러니 당장 그분의 손길에 우리를 맡겨 드리자. 오늘 이 시간에 말이다.
<41-42쪽 중에서>
그 심판은 무오하다. 유리한 판결이라면 틀렸을까 봐 걱정할 일이 없고, 불리한 판결이라면 틀렸기를 바랄 수 없다. 심판자의 언도가 곧 내 실상임을 우리는 믿을 뿐 아니라 알게 된다. 나라는 존재의 모든 세포로 의심의 여지없이 알고는 기겁하거나 희열에 젖는다. 진작부터 알 수도 있었음을 희미하게나마 깨달을지도 모른다. 또 나만 아는 게 아니라 조상과 부모와 배우자와 자녀를 포함해 모든 피조물이 알게 된다. 반론의 여지없는 각자의 진상이 (그때에는) 명백하게 모든 사람에게 알려진다.
구름 속에 나타나는 징조, 두루마리처럼 말리는 하늘 등 물리적인 재난이 일어나는 광경은 심판의 적나라한 개념만큼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 사람이 늘 들떠 있을 수는 없다. 그러나 자신을 훈련하여 점점 더 자주 이렇게 자신에게 물을 수는 있다. 매 순간 내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또는 행동하지 못하거나 행동하지 않은 것)에 불가항력의 빛이 비쳐 들면 어떻게 보일까? 그 빛은 이 세상의 빛과는 사뭇 다르지만, 이미 아는 만큼만으로도 우리는 그 빛을 염두에 두고 살 수 있다.
<54-55쪽 중에서>
“지금이 세상의 마지막 밤”일 수도 있음을 생각하면, 미친 듯이 세상에 만병통치약을 투여하는 일은 무의미해진다. 그러나 평범한 도덕과 지혜의 한계 내에서 성심껏 미래를 위해 쏟는 노력은 그렇지 않다. 심판이 있기 때문이다. 소명에 충실하다 심판을 맞이하는 이들은 행복하다. 그냥 밖에 나가 돼지를 치는 사람이든, 선한 구상으로 백 년 후의 인류를 크나큰 악에서 구하려는 사람이든 다를 바 없다. 마침내 극의 막이 내리면 돼지는 더 이상 먹이를 얻지 못하고, 백인의 노예제도나 정부의 폭정을 퇴치하려는 큰 싸움은 승리에 이르지 못한다. 그래도 괜찮다. 검사관이 오실 때에 당신은 당신의 자리를 지켰다.
<52-53쪽 중에서>
두 번째 해법은 죄 사함을 확실히 믿는 것이다. 변명하고 싶은 우리의 욕구는, 용서받을 수 있다고 실제로 믿지 않아서 생기는 것이다. 내 쪽에 유리한 변론으로 하나님을 납득시키지 않는 한 그분이 나를 다시 받아 주시지 않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아예 용서가 아니다. 진정한 용서란 모든 정상이 참작되고도 변명의 여지없이 남아 있는 죄를 그 속의 모든 섬뜩함과 더러움과 비열함과 악의까지 똑바로 응시하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해자와 온전히 화해한다는 뜻이다. 그것만이 용서이며, 우리가 구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하나님께 그렇게 용서받을 수 있다.
<60-61쪽 중에서>
가정생활도 수도 생활도 가증스러울 때가 많았다. 다행히 주목해야 할 점은 이 두 제도를 진지하게 옹호하는 이들이 위험성도 십분 인식하여 감상적 환상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쓴 저자는 수도 생활이 얼마나 쉽게 변질되는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샬럿 M. 영이 지적했듯이 가정은 지상천국에 이르는 통행권이 아니라 천국 지도를 보는 사람만이 항해할 수 있는 고단한 소명이다. 바로 이점부터 우리는 아주 분명히 해 두어야 한다.
국가처럼 가정도 하나님께 바쳐져 회심하고 구속(救贖)될 수 있다. 그러면 그 특유의 복과 은혜의 통로가 된다. 단, 인간의 다른 모든 것처럼 가정도 구속되어야 한다. 구속되지 못하면 그 특유의 유혹과 타락과 불행을 낳는다. 사랑이 가정에서 나오듯 사랑의 부재 역시 가정에서 시작된다.
<81-82쪽 중에서>
자연은 없어지지만 우리는 길이 산다. 모든 항성과 성운이 사라진 후에도 우리의 삶은 계속된다. 자연은 표상이요 상징일 뿐이로되 성경은 우리에게 이 상징을 활용하라고 권한다. 자연을 지나고 넘어서, 자연에 희미하게 반사된 그 광채 속으로 들어오라고 우리를 부른다.
자연 너머 바로 거기서 장차 우리는 생명나무 열매를 먹는다.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경우, 현재는 영혼이야 직접 하나님을 의지하여 살아가지만, 정신과 특히 육신이 그분께 받는 생명은 조상과 음식과 순리 등 수많은 단계를 거쳐서 온다. 세상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은 물질 속에 즐거이 각종 에너지를 넣어 두셨는데, 그런 동력원의 멀고 희미한 산물이 흔히들 말하는 물리적 즐거움이다. 그렇게 걸러져서 오는데도 현세에 다 감당하기에 너무 벅차다.
이처럼 하류에서도 우리를 도취시키는 영광의 강물을 수원지에서 마시면 얼마나 더하겠는가? 바로 그것이 우리의 미래다. 그날에는 전인(全人)이 기쁨의 샘에서 기쁨을 마신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말마따나 구원받은 영혼의 희열은 영화로워진 몸속으로까지 “흘러넘친다.” 현재 우리의 타락한 이분법적 성향으로는 이런 물밀 듯한 즐거움을 상상할 수 없으며, 모두에게 아주 엄중히 경고하건대 상상하려 해서도 안 된다. 단, 언급은 필요하다. 그래야 그나마 더 잘못된 생각(영혼만 구원받는다거나 부활한 몸이 멍한 무감각 상태로 살아간다는 생각)을 몰아낼 수 있다. 몸도 주님을 위해 지어졌기에 이런 암울한 공상은 얼토당토않다.
<124-125쪽 중에서>
선과 악은 둘 다 복리로 불어난다. 그래서 당신과 내가 날마다 내리는 작은 결정이 한없이 중요하다. 오늘의 소소한 선행으로 적의 전략적 거점을 점령해, 거기서 당신은 몇 달 후면 여태 꿈꾸지 못했던 승리를 향해 진격할 수 있다. 반면에 오늘 사소해 보이는 정욕이나 분노에 빠지면 능선이나 철도나 교두보를 잃어, 거기서 적이 다른 수로는 불가능했을 공격을 개시할 수 있다.
<139쪽 중에서>
내게 평등이란 옷과도 같다. 둘 다 타락의 결과이자 타락에 대한 대응책이다. 평등주의에 이를 수밖에 없었던 과정을 거꾸로 되돌려 정치적 차원에서 예전의 각종 권위로 회귀하려 한다면, 이는 옷을 다 벗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일이다. 나치당과 나체주의는 똑같은 과오를 범한다. 그러나 정말 살아 있는 것은 우리의 옷 안에 그대로 있는 맨몸이며, 우리의 진정한 관심사는 평등한 시민이라는 가면 속에 여전히 살아서 (아주 정당하게) 숨어 있는 위계의 세상이다.
내 말을 오해해서는 안 된다. 평등주의가 허구이긴 해도 나는 그 가치를 조금도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그나마 서로의 학대를 막으려면 그 길밖에 없다. 성년 남성의 선거권이나 기혼여성재산법을 폐지하자는 제안이라면 나는 절대 반대다. 그러나 평등의 순기능은 온전한 보호다. 평등은 삼시 세끼 꼭 먹어야 하는 음식이 아니라 필요한 때만 먹으면 되는 약이다. 모든 인간을 (객관적 사실에 어긋나지만 그래도 현명하게) 똑같은 부류인 양 대하면, 수많은 악을 예방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평등을 먹고살도록 지음받지 않았다.
<155-156쪽 중에서>
우선 인간 개인을 그 자체로 숭배하는 지독한 반기독교적 개념을 끄집어 내버리고 싶었다. 이런 현상은 집단주의와 나란히 짝을 이루어 현대 사조에 아주 만연해 있는데, 한쪽의 오류가 반대쪽 오류를 낳으면서 중화는커녕 서로를 더 악화시키기 때문이다. (문학 비평에서 볼 수 있는) 유해한 개념은, 처음부터 우리 각자의 내면에 “개성”이라는 보화가 숨겨져 있으며, 그 개성을 방해받지 않게 지키고 확장하고 표현하여 “독창적” 존재가 되는 것이 인생의 주목표라고 가르친다. 이는 펠라기우스주의(인간의 원죄를 부인하고 자기 힘과 노력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단 사상-옮긴이)나 그보다 더 심한 오류이며 심지어 자가당착이다.
독창성을 떠받들어서는 아무도 독창적 존재가 되지 못한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 진실을 말하고, 작은 일에도 그 자체를 위해 최선을 다해 보라. 그러면 소위 독창성이 저절로 찾아온다. 그 정도만이라도 개인보다 본분을 앞세우면 벌써 참된 개성이 태어나기 시작한다.
둘째로, 기독교의 관건이 결국 개인도 아니고 공동체도 아님을 밝히고 싶었다. 세간의 통념 그대로의 개인과 공동체는 영생을 상속받지 못한다. 영생은 자연적 자아나 집단적 대중이 아니라 새로운 피조물에게 돌아갈 몫이다.
<162-163쪽 중에서>
* 신앙의 긴 여정, 어디까지 왔는가?
* 신자는 모름지기 ‘영적’ 활동에 24시간을 바쳐야 하는가?
* 품기 힘든 ‘문제적 그 인간’이 있는가?
* 재림의 복음, 나의 오늘을 어떻게 바꾸는가?
* 줄기찬 일상 속 도발, 용서를 계속 실천하려면?
* 어떻게 자기를 사랑하면서 부인할 수 있는가?
* 신앙이란 이성(理性)에 맞서 싸우는 것인가?
* 집에서도 나는 신자인가?
* 내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제대로 심겼는가?
*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라는 말의 참뜻은?
* 영광에 이르는 절묘한 길, 어떻게 걸어갈 것인가?
* 과학과 지식의 발전이 기독교의 불변성을 위협하는가?
* 아직 사랑하지 않는데도 사랑하듯 행동하면 위선인가?
* 교회,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의 이분법에 빠지지 않으려면?
* 삶의 현장에서 ‘신자다운 선택’을 고민하는가?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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