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나는 세상에서 엿새를 살아가는 교인들의 삶에 대해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목사인 나는 일주일 내내 예배당 안에서 맵시 나는 옷을 입고 교양 있는 언어를 구사하며 교인들을 향해 ‘그리스도인의 향기’ 운운하지만 정작 교인들은 때 묻고 냄새나는 옷을 입고서 땀범벅이 되어, 그리고 시시때때로 “드럽게 힘드네, 씨X” 같은 신음을 뱉어가며 겨우겨우 사는구나 싶었다. 그리고 그 처절한 삶의 현장을 모른 채 온갖 화려한 말발로 치장한 나의 종교 언어들이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그날 나는, 비록 일주일 내내 땀에 찌든 옷을 걸친 채 입에는 욕지거리를 달고 이 길 저 길 누비면서도 주일이면 가장 깨끗한 옷을 차려입고 예배당을 찾는 그 아주머니가 누구보다 귀하게 느껴졌다.
_44-45쪽에서
고민 끝에 나는 30년 가까이 지켜온 주일성수 개념을 내려놓기로 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란 뜻에서 말이다. 그리고 매주 주일이면 예배 후 남성 교우들과 함께 부대 근방의 맛집을 다니면서 친교에 힘썼다. 그 결과 많은 남성 간부 신자들이 교회 활동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요즘은 이따금 어린 시절에 철저하게 지켰던 주일성수 모습이 아련하게 그리워질 때가 있다. 하지만 예전으로 돌아가기에는 한국 사회와 교회의 문화가 너무 많이 달라진 것이 사실이다. 다만 자신의 쾌락과 복지를 위해서는 주일에 되도록 돈을 안 쓰고, 다른 사람의 기쁨과 유익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쓸 수 있도록 방향을 잡아가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_66쪽에서
“목사님, 제가 요새 새벽기도회에 나와 울면서 기도를 드리는 것은 제 몸이 아파서 그러는 게 아닙니다. 목사님도 잘 알다시피 제가 젊은 날 월남에 가서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것에 대해 평생토록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교회에 다니며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아, 내가 젊은 날 애국과 이념을 빙자해서 사람을 죽인 죄인이구나’ 싶은 깨달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양심에 가책이 되어 견딜 수가 없어 매일 새벽마다 하나님께 회개하는 중입니다. 그런데 일단 한 번 회개를 시작하니 그 외에도 어찌나 회개할 것이 많이 생각나는지 도저히 눈물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_130쪽에서
사랑에는 국경도, 인종도, 종교 간의 장벽도 없다. 세월이 흐르면서 나는 그 사실을 또렷이 알아가고 있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를 위해서 시간과 에너지를 쏟는 것은 반드시 그가 기독교인이어서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랑을 받아야 할 사람이 누구든 간에, 그가 이슬람교인이든, 불교도든, 무신론자든, 성소수자든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그를 사랑하는 것이다. 나는 어제보다 오늘, 그리고 오늘보다 내일 더 많이 사랑하고 싶다. 내 사랑이 하루에 1밀리미터씩이라도 커졌으면 좋겠다. 우리 모두가 서로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그래서 많은 사람의 눈물보가 터져 그 눈물들이 모여 세상을 살리는 강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때 우리의 눈물샘은 마치 구약성경 에스겔 47장에 나오는 성전의 생명샘과 같아지리라.
_219-220쪽에서
그런데도 왜 나는 아직도 한국 개신교를 못 떠나고 있는 것일까? 무엇이 나를 주저하게 만드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알것 같으면서도 잘 모르겠다. 다만 내가 세찬 바람 앞의 갈대처럼 흔들리면서도 계속 제자리에 서 있는 이유는, 그저 내 주변에 마음이 ‘따뜻한’ 그리스도인들이 있기 때문이라고만 말해두자. 사람을 통해 받는 상처들을 사람을 통해 위로받고 있기 때문이라고만 말해두자. 결국 인간의 ‘온기’를 지닌 그리스도인만이 우리의 희망이라고만 말해두자.
_242-243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