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순간 우리도 온유를 버리고 분노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어쩌면 우리가 예수의 마음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온유를 잃어버린 기독교를 향한 본질
***팀 켈러 강력 추천***
“극심하게 분열된 딱히 해법이 보이지 않는 이 세대에
예수의 온유로 이끌어 주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책” – 팀 켈러
우리는 어디에서 예수의 마음을 잃어버렸을까? 분노를 무기로 삼는 이 세상의 원리대로 우리 역시 분노에 분노로 맞서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둠은 어둠을 물리칠 수 없고, 미움은 미움으로 물리칠 수 없듯이, 분노 역시 분노로는 몰아낼 수 없다는 사실을 잊은 채 말이다.
어쩌면 ‘포용적이기보다는 배타적이고 친절하기보다는 비판적이고, 만나면 기분 좋기보다는 불쾌해지고 살갑기보다는 쌀쌀맞은 크리스천들’로 비쳐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우리의 모습을 보고 기독교에 승선하기를 거부하고 있지는 않을까? 은혜와 사랑보다는 비판과 경멸의 아이콘으로 비쳐지지는 않을까? 크리스천으로 살고 싶지만 크리스천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정의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이 책은 이런 우리에게 죄인들의 친구가 되신 예수님의 길로 안내한다. 오해를 감수하면서까지 기꺼이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 주시며 그들을 품어 주신 예수님의 온유하심은, 죄인들을 친구로, 친구들을 가족으로, 가족들을 그분의 사명자로 변화시키신다. 그렇다. 예수의 온유만이 ‘분노로 길을 찾는 세상’에 답이 된다.
온유함은 타협이 아니다.
온유함은 무른 반응도 아니다.
예수의 온유로 반응한다는 것은
대가가 따르는 급진적인 용기가 필요한 사랑이다.
누구보다도 원한을 품을 자격이 있는 사람일지라도, 누구보다도 미움을 무기로 휘두를 권리가 있는 사람일지라도, 우리는 분노와 복수의 순환을 이어가는 대신에 예수의 온유로 답해야 할 사람들이다. 대가가 따르더라도, 오해를 감수하더라도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이다. 예수의 온유만이 이 분노한 사회를 쉬게 할 힘이 있기 때문이다.
《선에 갇힌 인간, 선 밖의 예수》 저자의 새로운 신작
분노할 것인가, 온유함으로 답할 것인가
* 가족과 반목할 때
* 동료와 충돌할 때
* 악플의 공격을 당할 때
* 자녀가 말을 듣지 않을 때
* 신앙이나 인종, 사회 계급 등의 이유로 거부를 당할 때
* 세대나 경제적 상황이나 문화가 다른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을 때
전체적으로 이 책에 대한 주제는 한마디로, 분노에 찬 사회와 사람들의 물음에 예수님이 주신 해답이 무엇인지 가르쳐 준다. 예수님이 보이신 온유함이 무엇인지 우리는 오해하며 살고 있다. 그리스도가 보이신 온유한 대답을 바로 깨달아 분노 사회와 하나님 나라를 연결하는 다리가 되기를 기대해 보자. 예수님의 사역에서 보는 온유함의 근거들과 저자의 다양한 경험과 적절한 예화들이 우리의 사고를 확장시키고 좀 더 쉽게 온유함의 길을 찾도록 도와준다. 이 책을 통해 분열된 세상 속에서 크리스천이 해야 할 온유함의 역할과 그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 필요한 마음가짐과 행동지침들을 배울 수 있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라는 잠언 15장의 말씀처럼 세상의 분노를 잠잠케 하는 크리스천이 되기를 소망해 보자. 이 책이 좋은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이다
2014년 <슬레이트>(Slate)지는 ‘분노의 해’라는 일련의 논설에서 “의분에서 가짜 의분까지, 우리는 모든 것에 분노를 터뜨린다. … 분노가 우리의 삶을 사로잡았다”라고 말했다. 논설 제목들에는 ‘분노 프로젝트’, ‘분노의 라이프사이클’, ‘분노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정체성 분노’, ‘문화적 분노 실태 조사’, ‘진보 진영의 분노의 해’, ‘보수 진영의 분노의 해’, ‘분노 바이러스 창궐’, ‘의로운 분노’, ‘내 삶을 바꿔 놓은 분노’ 등이 있었다.
지금 우리에게는 모든 논쟁거리가 곧 분노할 것들이다. 우리 화에서 분노는 특별한 일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 되었다. 이제 분노는 이상 현상이 아니라 정상이다. 이제 분노는 지양해야 할 것이 아니라 권장해야 할 일이다. 이제 분노는 오히려 상을 받아 마땅한 반응이다. 이제 모든 뉴스 속보의 이면에는 분노가 흐르고 있다. 분노는 우리의 모국어가 되었다. 분노는 공격하고 모욕하고 벌을 주려는 우리의 욕구를 채워 주는 감정적 음식이다. 이제 우리는 분노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들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분노를 없애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성경의 명령대로 모든 원망과 분노를 없애기는커녕 아예 흥분과 미움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 집단들로 나뉘어 자기들끼리만 소통하고, 악성 댓글과 정치적인 공세가 판을 치고, 누군가를 헐뜯는 책과 폭언하는 팟캐스트가 난무하며, 교회들은 계속해서 분열되고 있다. 마치 온 세상이 아군과 적군으로 나뉘어 끊임없이 싸우고 있는 듯하다.
무언가에 ‘찬성’한다는 개념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되어 버렸다. 이제 우리는 무엇이든 ‘반대’하는 대상에 대해 분노의 ‘복음’을 외치기를 좋아한다. 우리는 편향된 해시태그와 뉴스 기사, 정치 슬로건, 종교 교리의 모닥불 옆에서 몸을 녹이다가 이내 준비, 조준, 발사를 단행한다. 세상의 인기 있는 목소리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지지기
반을 쌓고 추종자들을 모으고 돈을 벌어들인다. 요즘 세상에서는 무조건 분노가 통한다! 우리 시대에 분노는 누구나 애용하는 무기가 되어 버렸다.
온유한 대답의 힘
미국 정치풍자 코미디 프로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Saturday Night Live)에서 코미디언이자 배우인 피트 데이비슨(Pete Davidson)이 “전쟁터에서 눈을 잃었다는데 과연 그럴까?”라며 안대를 쓴 해군 특수부대 출신 공화당 하원의원 댄 크렌쇼(Dan Crenshaw)를 경솔하게 조롱한 적이 있다. 그때 무공훈장을 단 전쟁 영웅 크렌쇼의 반응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데이비슨은 크렌쇼의 정치적 입장이 싫어, 전투에서 얻은 장애를 놀린 죄로 대중의 심한 반발에 부딪쳤다. 대중의 비난이 얼마나 거셌던지 데이비슨이 우울증과 자기혐오에 빠질 정도였다. 그는 인스타그램에 이런 글을 올렸다. “더는 살고 싶지 않다. 살아보려고 안간힘을 쓰겠지만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나는 그저 사람들을 도우려 했을 뿐이다. 이 점만큼은 기억해 주기를 바란다.”
아프가니스탄 전투에서 폭발물 공격에 잃은 눈에 대해 조롱을 받았으니 사람들은 크렌쇼가 “두고 보자!”라고 말할 줄 알았을 것이다. 크렌쇼는 반격을 하거나 그냥 무시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데이비슨에게 조용히 연락해서 친구가 되어 주고 생명을 살리는 말로 격려해 주었다. 그는 누구에게나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이 있다며 “하나님은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당신을 이곳에 두신 것입니다. 그 목적을 찾는 게 당신의 임무입니다. 그리고 그 목적대로 살아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크렌쇼는 똑같이 갚아 주는 대신 다리를 놓았다. 망신을 주고 꾸짖는 대신 온유하게 말했다. 보복을 하는 대신 우정과 화평을 추구했다. 분노의 순환에 힘을 보태는 대신 무조건적인 사랑의 제스로 그 악한 순환을 깨뜨렸다.
상대방의 약점을 들춰 고통을 주었던 데이비슨은 경솔한 행동으로 인해 도리어 더 큰 고통을 받게 되었다. 반대로 누구보다도 공격에 능한 군인이었던 크렌쇼는 그런 데이비슨을 긍휼의 마음으로 바라보고 온유한 대답을 전했다. 그 대답은 너무도 온유해서 데이비슨의 속에서 타오르던 정치적 분노와 이어진 자기혐오의 분노를 한꺼번에 꺼뜨렸다. 그리고 돌아오는 재향군인의 날, 두 사람은 나란히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에 출연해 화해했다. 크렌쇼는 뉴욕 시의 소방관으로 2011년 9월 11일 테러 공격으로 목숨을 잃은 데이비슨의 아버지를 언급하며 그에게 따뜻한 말을 건넸다. 방송이 끝나자 데이비슨은 카메라가 꺼진 줄 알고 크렌쇼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이렇게 속삭였다. “당신은 좋은 사람이에요!”
이런 자비와 용서, 화해의 이야기는 선택의 기로에 선 우리에게 도움을 준다. 공격적인 자세로 반격할 것인가? 아니면 호의를 베풀고 온유한 대답으로 반응할 것인가? 가족과 부딪힐 때, 동료와 충돌할 때, 악플의 공격을 당할 때, 자녀가 말을 듣지 않을 때, 신앙이나 인종, 사회 계급 등의 이유로 거부를 당할 때, 세대나 경제적 상
황, 문화가 다른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을 때, 그럴 때 우리는 온유한 대답으로 반응해야 한다. 갈등의 한복판에서 예수님이 존 퍼킨스, 댄 크렌쇼, 그리고 이 책에서 앞으로 소개할 사연들의 주인공들과 함께해 주셨던 것처럼 우리와 함께해 주실 것이다.
크리스천들은 말씀을 통해 치유를 낳는 방식, 생산적인 방식, 생명을 주는 방식으로 반응하기 위한 모든 것을 배웠다. 우리가 최악의 모습을 보일 때도 예수 그리스도가 사랑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도 최악의 모습을 보이는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모든 잘못을 용서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도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더럽고 악한 행동에 형벌과 거부 대신 온유함으로 답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더럽고 악하게 구는 사람들에게 온유한 대답을 보여 줄 수 있다. 하지만 오해하지는 말라. 예수님의 온유한 대답은 용기와 대가를 필요로 한다. 예수님의 온유한 대답에는 십자가에서 보혈을 쏟아내며 돌아가신 것이 포함된다. 우리의 온유한 대답에도 대가가 따를 것이다. 자기 의(self-rightousness), 의분, 분노에 대해서 죽어야 한다. 성경은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 10:39)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은 우리를 온유하게 대해 주셨다. 따라서 우리도 남들에게, 심지어 우리를 원수로 대하는 사람들에게까지 온유하게 대해야 한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마 5:43-45).
Part 1 .
분노의 시대, 온유를 잃어버린 기독교
1. 온유는 대가가 따르는 사랑이다
2. 교만은 배타적이고 쌀쌀맞은 사람을 만들 뿐이다
3. 분노는 분노를 몰아낼 수 없다
Part 2 .
예수의 마음을 살아내다
4. 화날 이유가 차고 넘쳐도 쉽게 요동하지 않다
5. 약자를 위해 용기있게 일어서다
6. 부당한 비판에 비판으로 답하는 악순환을 멈추다
7. 용서하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8. 나를 미워하는 이들을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다
에필로그 예수의 온유만이 분노한 세상을 녹이다
소그룹을 위한 질문들
주
“정말 좋은 책이다. 두세 장에 걸쳐서 칭찬을 해도 모자란다.”
맥스 루케이도, 《믿음 연습》 저자
“이 책은 극심하게 분열된 이 시대에 꼭 필요한 목소리다.”
앤 보스캠프, 《나의 감사연습, 하나님의 임재연습》 저자
“이보다 더 필요하고 시의적절한 책을 본 적이 없다.”
폴 트립, 《돈과 영성》 저자
“꼭 듣고 싶고, 들어야 할 온유한 대답으로 가득하다.”
줄리어스 김, TGC(The Gospel Coalition) 대표
Weight | 1 lb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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