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전까지만 해도 나는 펄펄 살아있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살리는 기도를 하자 나의 죽은 상태가 드러났다. 분명 기도를 시작할 때는 남 살려달라는 기도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살려달라 외칠 때마다 내 기도가 되었다. p.46
메마른 우물로는 몇 사람 못 먹인다. 넘치는 강물이라야 농사도 짓고 마을도 먹일 수 있다. 생명력도 그렇다. 어중간한 능력으로 퍼주다가는 둘 다 죽는다. 살리려면 넘쳐흘러야 한다.
그리스도의 생명력은 끝이 없다(골 1:17-19). 죽음도 이긴다(행 2:24). 그 안에 넘치는 생명력이 있다. 풍성하다. 그런 생명이라야 희생해도 산다. 살린다. p.47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발견한 죽음엔 소망이 있다. 하나님은 살리시는 분이다. 죽이실 것이었다면 이미 죽었을 것이었다. 죽음을 미리 알려주셨다는 것은 살리시겠다는 뜻이었다. 히스기야도 모세도 이를 알았다. 덕분에 그들이 할 일은 하나뿐이었다. 살리는 기도.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기까지 완전히 기도에 몰두했다. p.64
인생마다 전환점이 있다. 모세의 경우 하나님을 만났을 때가 그랬다. 80년 인생을 역전시킨 만남이었다. 이집트를 무너뜨린 능력이었다. 홍해를 가르고, 군대를 수장시키고, 반석에서는 물을, 하늘에서는 음식을 비처럼 내리게 했던 생명력이었다. 이는 모세에게 머물러 있지 않았다. 차올라 흘러넘쳤다. p.114
결국 ‘사랑’이다. 사랑이 살 길이다. 사랑이 살리는 길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를 기도하신다. 우리도 사랑을 기도하면 살리는 기도를 하는 것이다. p.137
살릴 수 있는 분이 오셨다. 심지어 기도할 필요가 없는 능력자셨다. 그분께서 살리는 기도의 모범을 몸소 보이셨다. 하지만 유다는 살 수 없었다. 살리는 기도의 무능력이 아니라 죽을 인생의 죽겠다는 고집 때문이었다. 그를 보며 우리도 깨닫는다. 살리는 기도는 무능하지 않다. 목이 곧은 죄인이 죽음을 끝까지 선택하는 것이 문제다. p.146
기도는 하나님의 명령이다(겔 36:37 ; 골 4:2). 그러나 의무감만으로 하는 기도는 의미가 없다. 사랑 때문에 하는 순종이라야 진정성이 있다.
살리는 기도자는 억지로 기도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사랑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 보니 그리스도께서 살리려고 기도하시는 사람들이 보여서 기도한다. p.161
그런데 모든 바쁨이 부지런함이 아닌 것처럼, 모든 휴식이 게으름인 것도 아니다. 소명과 상관없이 바쁘면 바빠도 게으른 것이며, 소명을 위해 쉬는 것은 아무 일 안 해도 부지런한 것일 수 있다. p.167
살리는 기도자는 기도 타이밍을 놓치지 않는다. 어떤 문제도 모두 기도로 하나님께 집중할 기회일 뿐이다. p.173
우리는 모든 능력과 권세가 다 주어진 사람들이다(골 1:11). 아무것도 이기지 못할 것이 없다(요 16:33). 받은 그리스도와 그 부활 능력을 모두 파묻어두고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과 같다. 자신이 받은 것을 모른 척해도 진실은 바뀌지 않는다. 구원을 받았으니 그에 합당하게 구원 능력을 사용해야 한다. p.177
살리는 것은 오로지 주님의 일이다. 그러므로 살리는 기도자는 살리려 들지 말고 살려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이것은 말장난이 아니다. 살리는 기도의 진정한 작동 원리다. p.208,209
염려를 통해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진정한 해결책은 하나님께만 있다. 하나님만이 살리실 수 있다. 믿음이란 살리시는 하나님께 먼저 꽂히는 시선이다. 죽음보다 먼저 하나님께 눈이 가는 것이다. p.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