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이 고민하는 돈 문제의 명쾌한 해답
크리스천으로 돈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늘 고민하셨죠? 이젠 문제 해결!!!
십일조와 기타 헌금, 저축하는 문제에서부터 크리스천이 돈과 관련해서 균형잡히고 올바른 지침을 김동호 목사의 새 책이 자세하고 완벽하게 알려줍니다.
돈, 잘 벌고 싶다!!
하지만 돈에도 구원받지 못한 돈과 구원받은 돈이 있다.
당신은 어떤 돈을 원하는가? 지금 어떤 돈을 모으고 있는가?
이제 하늘에 보물을 쌓는 부자가 되는 법을 배우라
평소“공부해서 남 주자”,“진리가 밥 먹여준다”는 식의 탁월한 역발상 메시지로 현대인에게 복음과 말씀의 진수를 전달해온 김동호 목사가 이번에는 일찍이 볼 수 없던 새로운 접근 방식을 통해 크리스천의 돈 문제를 실제적이고도 심도있게 다룬 책을 펴냈다. 제목은 「깨끗한 부자」. 이 책은 제목 그대로 모든 사람들이 희망하는‘부자 되기’에 대한 성경적 원리와 돈에 대한 크리스천의 균형잡힌 자세를 명쾌하게 다루고 있다.
특히 이번에는 김동호 목사가 몇 달에 걸쳐 직접 집필한 단행본의 발행과 함께 돈을 주제로 한 주일예배 설교를 담은 오디오북(Tape)과 컴퓨터와 전자북리더(hiebook reader)에서 볼 수 있는 e-book(전자책)이 동시에 출간되었다. 이는 기독 출판사상 유례가 없을 뿐 아니라, 한국이나 전 세계를 통틀어서도 그 전례가 없던 일이다.
김동호 목사는 이 책에서 “돈은 그저 돈일 뿐”이라고 단순히 전제하고 돈에 대한 우리의 편향된 시각을 균형잡히도록 조율해준다. 즉, 돈 자체를 죄악시하여 마치 청빈(淸貧)이 크리스천의 미덕인 양 주장하는 일부의 논리를 일축하고, 반대로 부자가 되는 것이 크리스천의 축복인 양 착각하는 부류의 기복적 신앙관도 강하게 꼬집고 있다.
이런 기초 위에서 김동호 목사는 “돈에 대한 기독교의 원리는 청빈(淸貧)이 아닌 청부(淸富:깨끗한 부자)”라고 일관되게 주장한다. 크리스천이기에 부도덕한 돈을 거부함으로 부득불 가난해질 순 있어도, 굳이 가난함을 자랑으로 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할 수 있으면 모든 크리스천이 부자가 되기를 소망하되, 반드시 정직한 십일조와 구제헌금을 하고, 내 돈과 하나님의 돈을 구분할 줄 아는 투명한 돈 관리를 삶의 기준으로 삼으라고 권면한다. 또한 그런 사람이 부자가 되는 세상이 제대로 된 세상일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하나님은 바로 그런 사람에게 ‘은사’로서 돈을 맡길 수 있게 되므로, 결국 모든 크리스천이 십일조와 구제헌금을 잘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제대로 돈을 벌고 쓰겠다는 신실한 자세만 있다면 누구나 ‘깨끗한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의 핵심 내용이다. 책의 후반부에서는 경제적으로 소외되고 지친 이 시대 독자들을 격려하며, 이 책에서 말한 기독교적 원리를 따라 ‘깨끗하고 떳떳한 부자’가 되기를 힘쓰라고 결론을 맺는다.
전자책(혹은 e-book)은 기독교 인터넷 쇼핑몰인 케이북닷컴(GODpeopleMall.com)을 통해서 다운로드 방식으로 구입할 수 있어 컴퓨터 사용자에게 편리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e-book은 최근 케이북닷컴을 통해 판매되는 전자북리더(hiebook reader, PDA 겸용)에 옮겨서 휴대하며 책처럼 볼 수도 있다.
오디오북에는 이 책의 내용과 동일한 총 여덟 편의 설교가 4개의 테잎에 담겨 있어 김동호 목사의 육성으로 듣는 남다른 은혜와 깊이를 느끼게 한다. 자가용으로 출퇴근하는 평신도라면 일주일치 말씀 묵상으로 적합한 분량이다.
■ 머리말
당신에게 돈의 의미는 무엇인가?
목사안수를 받은 지 20년이 넘었다. 그동안 나는 참으로 많은 설교를 해왔다. 그 많은 설교 가운데 내가 가장 많이 이야기하고 강조한 것은 무엇일지 생각해보았다. 그것은 단연코 ‘돈’이었다.
돈을 터부시하여 설교 중에는 돈 이야기를 평생 하지 않았다는 목회자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이 정도는 아니더라도 강단에서 돈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는 것이 보편적이다. 그러나 나는 열 번 설교 중 최소한 예닐곱 번은 돈 이야기를 한다고 할 만큼 돈과 관련된 메시지를 많이 증거했다.
내가 설교 중에 하는 돈 이야기는 주로 헌금에 관한 것이다. 특히 십일조와 구제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한다. 설교를 들은 교인들이 조심스럽게 불평 아닌 건의를 하더라도 나는 “교인들이니까 말로 하지, 내 아들 같으면 때려서 가르칠 겁니다”라며 좀처럼 물러서지 않았다. 내 말은 사실이다. 내가 내 아이들에게 가장 열심히 가르치고 싶은 것 역시 ‘돈’, 특히 십일조와 구제에 대해서이다.
2000년부터 나는 주일 낮 예배시간에 복음서의 예수님 말씀만 골라 설교했다. 그러다가 마태복음 6장 19절과 20절의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는 말씀으로 몇 달 동안 ‘신앙과 돈’이라는 주제로 설교했다.
이 설교를 하면서 나는 크리스천들이 ‘돈’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교회에 다니고 있더라도 신앙이 깊지 못한 사람은 돈에 대해 일반적으로 세상적인 생각을 갖고 있고, 또 신앙이 깊은 사람들은 돈에 대해 불교나 유교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또 이것을 기독교적이며 신앙적인 생각으로 알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래서 나는 교인들에게 돈에 대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바른 기독교적 이해를 심어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돈을 축복으로 알고 있는 교인들에게 돈은 축복이 아님을 설교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이 설교를 듣고 반박하지 않았다. 그러나 청빈(淸貧)을 기독교적 신앙으로 알고 있는 교인들에게 청빈은 훌륭한 것이지만 이것이 기독교의 가장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라는 것과 기독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오히려 청부(淸富)라는 것을 강조하여 설교했을 때는 얼마나 많은 반박과 저항(?)이 있었는지 모른다. 이런 내용의 설교를 한 날이면 어김없이 교회 인터넷 게시판에 엄청난 양의 글이 올라왔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곤 했다.
나는 경제에 대해 문외한이다. 경제를 공부해본 일이 전혀 없다. 그러나 성경을 읽고 설교를 하면서 하나님이 돈에 대해 어떤 생각과 자세를 갖고 계시는지 알게 되었다. 나는 그것을 교인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절묘한 하나님의 입장을 가르쳐주고 싶었다. 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교인들에게 설교했다.
설교 중에 워낙 돈 이야기를 많이 하는 사람이고 보니 여러 편의 설교를 통해 줄곧 다루어온 내용을 다시 책으로 묶게 되었다. 설교 원고를 그대로 출판할까도 생각했지만 독자들과 함께 ‘돈 문제’에 대해 좀더 깊이 있게 생각해보기 위해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꼼꼼히 원고를 재정리했다.
이 책을 읽는 많은 독자들이 돈 잘(바르게) 벌고 돈 잘(바르게) 쓰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경제가 어려운 이때에 예수 믿는 사람들 때문에 우리 경제가 잘 돌아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1장 돈은 복이 아니다
물질관이 있는가?
바른 생활, 특별히 바른 신앙생활을 위해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는 돈에 대한 바른 신학과 신앙을 가지고 그대로 사는 일이다. 세상에 돈만큼 우리에게 소중한 것도 없고, 돈만큼 우리 생활과 밀접한 것도 없다. 한순간도 돈 없이 살 수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러므로 돈에 대해 바른 이해와 철학을 가지고 사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돈에 대한 바른 이해와 철학 없이 살아가기 때문에, 돈이 많아도 인생에 실패하고 돈이 적어도 인생에 실패하는 우를 범한다.
그것은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이다. 바른 신앙생활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돈에 대한 바른 신학과 신앙을 갖는 것이 중요한데 오늘날 많은 신앙인들이 돈에 대한 바른 신학과 신앙을 갖지 못하고 있다.
기독교인들의 돈에 대한 신학과 신앙은 대개 두 가지로 나타난다. 하나는 물질을 터부시하는 유교적인 물질관이며, 다른 하나는 물질을 축복으로 여기는 기복적인 물질관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물질관으로는 기독교의 물질관을 설명할 수 없다. 기독교인 가운데 기독교의 물질관이 기복적 물질관과 다르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물질을 터부시하는 유교적 물질관과도 다르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기독교의 물질관이 기복적인 물질관도, 그렇다고 해서 돈을 터부시하는 유교적인 물질관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제부터 나는 돈에 대한 바른 신학과 신앙의 정립을 위해서 기독교적인 물질관에 대해 논해보려고 한다. 이 기회에 그동안 물질에 대해 갖고 있던 선입관을 벗어버리고 냉정히, 그리고 꼼꼼하게 성경적인 재물관에 대해 깊이 생각해볼 수 있기 바란다.
부자 크리스천, 가난한 크리스천
가장 먼저 생각해볼 문제는 “돈은 복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많은 교회에서 교인들에게 물질을 복으로 가르치며 예수를 잘 믿으면 물질의 복을 받게 된다고 설교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물론 보편적으로 예수를 잘 믿으면 물질적으로 안정되고 넉넉해진다. 그러나 그것이 절대적이지는 않다. 예수를 잘 믿어도 얼마든지 가난해질 수 있고 예수를 안 믿어도 얼마든지 부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예수를 잘 믿어도 가난해질 수 있고 예수를 안 믿어도 부자가 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물질이 복인데 하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이거나, 하나님이 계신데 물질이 복이 아니기 때문이거나 둘 중 하나이리라. 신앙인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또 하나님이 그분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복 주는 분이시라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중에도 가난한 사람이 있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들 중에도 부자가 있다는 것은, 물질이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궁극적인 것도 아님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마 6:19)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에는 “보물을 땅에 쌓아두는 일은 너희를 위하는 일이 아니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땅에 보물을 쌓아두려고 최선을 다한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보물을 땅에 쌓아두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큰 차이가 없다. 예수님은 보물을 땅에 쌓아두는 것이 우리를 ‘위하는’ 일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는데도 사람들은 물질을 복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물질이 우리를 잘 살게 한다고 확신한다.
우리는 흔히 돈이 많은 사람을 ‘잘 사는 사람’이라고 하고 돈이 없는 사람을 ‘못 사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잘못된 생각이다. 돈이 많은 사람을 부자라고 부를 수는 있어도 그를 ‘잘 사는 사람’이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돈이 없는 사람을 ‘못 사는 사람’이라고 불러서도 안 된다. 돈이 없는 것은 못 사는 것이 아니라 그냥 가난한 것이다.
물질에 대해 바른 생각을 가지고 살려면 우선 돈이 많은 사람을 잘 사는 사람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또 돈 없는 가난한 사람을 보고 못 사는 사람이라고 해서도 안 된다. 돈이 많은 사람은 부자이고, 돈이 없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일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만 말해야 한다. 절대로 부자를 잘 사는 사람, 가난한 사람을 못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거나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
만족은 없다
돈이 축복이 되지 못하는 까닭은 복음 때문이다. 복음 중의 복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나와 당신을 사랑하신다. 우리는 이 복음을 믿어야만 한다.
사랑은 사랑받는 대상을 존귀하게 하는 능력이 있다. 나는 내 아이들을 사랑한다. 아비인 내게 사랑하는 내 아이들은 아주 귀한 존재이다. 천하보다 귀하고 내 생명보다 귀하다. 다른 사람에게는 그냥 수많은 이들 가운데 한 명에 불과하지만 아비인 내게 내 아이들은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존재이다.
하나님은 나와 당신을 사랑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아주 귀한 존재이다. 천하보다 귀한 존재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막 8:36)라고 말씀하셨다. 또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막 8:37)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우리의 생명이 천하보다 크고 귀하다는 말씀이다.
사람은 가난하든 부하든, 많이 배웠든 못 배웠든, 세상적인 지위가 높든 낮든지 간에 모두 천하보다 크고 귀한 존재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온 천하보다 크고 귀하다는 것이야말로 기독교의 아주 중요한 인간 이해이다.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삶의 비밀이 들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천하보다 크고 귀한 존재이기 때문에 사람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이 세상에서 만족함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천하보다 크기 때문에 천하를 다 얻어도 그것으로 우리의 삶을 채울 수 없다.
‘행복하다’는 말을 ‘만족하다’는 말로 바꾸어 쓸 수 있다. 만족한 것이 곧 행복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자신의 만족과 행복을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말로 표현했다. 그러나 우리가 온 천하를 다 얻어 삶의 잔에 채우더라도 그 잔은 절대로 채워지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천하보다 크고 귀하게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자기가 바라던 것, 욕심내던 것을 얻으면 처음에는 만족해한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조금만 지나면 그저 그런 것이 되고 만다. 이 만족은 절대로 영원할 수 없다. 어릴 때 우리 집은 가난하였다. 아버지가 중고등학교 수위로 근무하셨기 때문에 그 월급으로 사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어머니가 살림을 알뜰하게 하셔서 내가 중학교 3학년이던 1965년, 자그마한 집이나마 처음으로 집을 사서 이사하게 되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그 일이 얼마나 좋던지 도무지 잠을 잘 수 없었다. 그날 밤 나는 끝내 잠을 설치고 말았다. 그러면서 ‘평생을 셋방살이하다가 처음으로 집을 사서 이사했는데, 첫날부터 쿨쿨 잠을 잔다면 사람도 아니다. 그게 곰이지 사람이냐?’ 하는 생각을 했다.
돈이 주는 만족이 있다. 잠을 잘 수 없을 만큼 만족케 하는 힘과 능력이 돈에 있다. 그러고 보면 세상에 돈만큼 좋은 것도 없다. 그래서 사람들이 돈, 돈 하는 것이고 그것을 땅에 쌓아두려고 그처럼 애쓰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있다. 처음으로 집을 사서 이사한 날, 나는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할 만큼 만족하고 행복했다. 그러나 그런 만족감과 행복감이 도대체 며칠이나 갔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정확히 하루였다. 만일 내가 이 일로 이틀 사흘씩 잠을 못 잤다면 사람들은 지나치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일주일간 잠을 못 잤다면 틀림없이 나를 병원에 입원시켰을 것이다. 미치지 않고는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천하에 그 어떤 것을 얻어도 끝끝내 만족하고 행복할 수 없는 존재다. 집을 사서 이사한 것이 처음에는 그렇게 좋더니만 얼마 지나지 않아 시들해지고 만 것처럼 말이다.
물질의 은사
솔로몬은 세상의 온갖 부귀와 영화를 누렸던 사람이다. 부귀와 영화와 쾌락이 물이 바다로 흘러들어가듯 자연스럽게 솔로몬에게 흘러들어왔다. 하지만 솔로몬은 삶의 만족을 얻을 수 없었다.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자신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전 1:2-7).
강물이 쉬지 않고 바다로 흘러들어가듯이 모든 부귀와 영화와 쾌락이 솔로몬에게 흘러들었는데 솔로몬은 왜 만족할 수 없었던 것일까? 거기서 만족과 행복을 얻으려고 한 것이 헛된 일일까? 솔로몬이 만족할 수 없었던 것은 복음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 지극히 사랑하시고, 천하보다 크고 귀하게 창조하셨기 때문에 천하를 다 얻은 솔로몬이었지만 그것으로 그의 삶을 채울 수 없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불만족과 불행의 원인이 소유의 넉넉지 못함에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소유가 넉넉하면 만족하고 행복해질 줄 안다. 그래서 열심히 땅에다 보물을 쌓지만 이것은 지혜로운 일이 아니다. 이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헛된 일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마 6:19)고 말씀하셨다. “땅에 보물을 쌓아두는 것이 너희를 위하는 일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물질은 너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너희들의 삶의 잔을 채워줄 수 있는 복과 보물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신다.
물질은 복이 아니다. 물질은 복이 아니라 은사에 가깝다. 하나님께 물질을 받아 부자가 된 사람은 물질의 복을 받은 것이 아니라 ‘물질의 은사’를 받은 것이다. 복은 예수님을 믿으면 누구나 다 받지만 은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누구나 다 받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방언은 복이 아니라 은사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누구나 다 방언 받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렇게 가르치는 교회도 있지만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다. 방언은 복이 아니라 은사이기 때문에 받을 수도 있고 받지 못할 수도 있다. 나는 목사이지만 방언의 은사를 받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성령의 은사를 받지 못한 사람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나는 다만 성령의 은사 가운데 방언이 아닌 다른 은사를 받은 것뿐이다. 그러나 구원은 은사가 아니라 복이다. 구원은 복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으면 누구나 다 받는다. 역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천하에 그 어떤 사람도 구원받을 수 없다.
은사는 주(主)를 위하여 쓰라고 주시는 것이다. 물질도 주를 위하여 바로 쓰라고 주신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물질을 주시는 것은 복으로 누리라고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바로 사용하라고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물질을 놓고 기도할 때는 “물질의 복을 주시옵소서”가 아니라 “물질의 은사를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한다.
은사는 쓰면 늘고 쓰지 않으면 소멸하는 특징이 있다. 주를 위해 바로 쓰지 않으면 물질의 은사 역시 자연 소멸하게 될 것이다. 반면 물질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뜻대로 물질을 잘 사용하면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더 크고 많은 물질의 은사를 주시리라고 나는 믿는다.
개처럼 번다?
하나님께 물질의 은사를 받지 않았는데도 부자가 된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물질이 부어지는 통로가 꼭 하나님만은 아니라는 증거이다. 물질은 하나님께로부터 올 수도 있지만 정반대로 사탄과 마귀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올 수 있다. 그러니 돈이 많은 부자라고 해서 그를 무조건 잘 사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생각이다.
우리는 우리가 소유한 물질이 과연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아닌지를 늘 판단해야 한다. 우리에게 억만금이 주어진대도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면 그것은 복(福)이 아니라 화(禍)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돈은 하나님의 방식과 법(法)대로만 벌어야 한다. 하나님의 방식과 법대로 번 돈이라야 하나님이 주시는 돈이 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번 돈은 하나님께 비롯된 돈이 아니며 복이 아니라 화가 된다.
우리 속담에 “개처럼 벌어 정승처럼 쓴다”라는 말이 있다. “개처럼 번다”는 말이 직업의 귀천을 가리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옳다. 그러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조건 돈만 버는 것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다. 그런데 우리는 이 속담을 후자의 뜻으로 사용하는 예가 많다. 돈을 개처럼 벌어서는 안 된다. 무조건 돈을 벌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식과 법대로 버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식과 법대로 돈을 벌어도 그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쓰지 않으면 그 돈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돈이 되고 만다. 하나님의 방식과 법대로 버는 일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바로 쓰는 일은 더 중요하다.
성경은 우리가 주인이 아니라 청지기임을 말씀하고 있다. 우리는 물질에 대해서도 주인이 아니라 청지기이어야 한다. 물질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그 돈을 지불하는 청지기, 즉 회계에 불과하다. 그런데 우리는 가끔 이 사실을 잊어버린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처럼 내가 가진 재물이 모두 나의 것인 양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오직 자신만을 위해 창고를 크게 짓고 그것을 쌓아두려 할 때가 많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식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었다면, 그 돈은 절대로 하나님의 복과 은사일 리 없다. 또 큰 부끄러움 없이 정직하게 돈을 벌었다고 해도 돈에 대한 욕심 때문에 그 돈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지 않았다면, 즉 하나님이 그 돈의 주인 노릇 하시도록 하지 않고 자기가 그 돈의 주인 노릇 하려 했다면 그 돈 역시 하나님의 은사가 아니다. 그런 돈은 우리에게 복이 되지 못하며 오히려 저주하게 될 것이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그것을 모두 자기 것으로 알아 욕심 사납게 땅에 쌓아두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지 않으면 그 사람의 물질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선한 청지기처럼, 바르고 정직하게 물질을 사용할 때 그 물질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부자 중에도 ‘어리석은 부자’같은 사람이 있다. 그들은 절대로 잘 사는 게 아닌데도 사람들은 무조건 그들을 잘 사는 사람,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이라고 말하며 부러워한다. 하지만 이것은 천부당만부당한 말이다. 그런 사람은 잘 사는 사람이 아니라 못 사는 사람이다. 그들은 복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 저주를 받은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돈 때문에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런 부자들이 천국에 들어가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말씀하셨다.
그런 사람들의 돈이 천국의 문을 바늘구멍으로 만들어놓는다. 그러니 그런 돈이 어떻게 축복이 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화이자 저주이다. 돈이면 무조건 축복인 줄 아는 어리석음에서 한시 바삐 벗어날 수 있기를 바란다.
세상이 채울 수 없다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라는 베스트셀러가 있다. 물론 부자가 되는 일이 나쁜 일이 아니고 부자가 되는 데도 방법이 있으니 그것을 배우는 것이 잘못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이 범하고 있는 보편적인 잘못을 알고 있다. 그것은 이 책이 부자가 된다는 것을 인생의 성공, 즉 잘 사는 길로 단정하여 써내려갔다는 점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부자가 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또 그것으로 부자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절대로 잘 사는 사람이 되는 길을 배울 수 없고 또 그렇게 될 수도 없다. 행복하고 만족한 삶을 사는 사람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오히려 ‘부자 아빠는 유능한 아빠요 가난한 아빠는 무능한 아빠’라고 배우고 세뇌당한다면 어려서부터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사실을 놓치거나 착각하게 되어 결국에는 참으로 잘 사는 사람이 되기 어려울 것이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는 말씀은 돈을 땅에 쌓아두는 것이 우리를 ‘위하는’ 일이 아니라는 중요한 진리를 일러주는 말씀이다. 돈을 쌓아두는 것이 우리를 위하는 일이 아닌 까닭은 무엇인가? 돈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우리에게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천하보다 크고 귀하게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세상에 있는 것으로는 그 삶을 채울 수 없다. 세상에 있는 것으로 행복할 수 없고 만족할 수 없다. 돈은 귀한 것이고 좋은 것이지만 그것으로 우리를 채울 수 없다. 우리의 삶을 채울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시다. 그분의 말씀만이 우리의 삶을 채울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을 하나님의 말씀과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라고 해석하신 것이다.
성도는 가난할 수밖에 없다?
돈이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대신하고 있는 세상에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마저 돈에 대해 세상사람들과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살아간다니 안 될 말이다. 돈을 복으로 생각하지 않고 은사로 여기며 사는 사람들이 되기 바란다. 억만금이 생겨도 하나님의 뜻과 방법이 아니면 당당하게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한 푼을 벌어도 하나님의 뜻과 방법대로 벌겠다는 고집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기 바란다.
하나님의 뜻과 방법을 고집하다보면 가난해질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과 방법을 고집하면 항상 가난해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것은 믿음 없는 패배주의적 생각이다. 하나님의 뜻과 식대로 돈을 벌어야 부자가 되는 세상이 좋은 세상이다. 그런 세상을 꿈꾸며 기도하는 사람, 그런 세상이 실현되도록 노력하는 사람이 되기 바란다. 하나님께서 은사로 넉넉한 물질을 주시면 욕심 부리지 말고 하나님의 뜻대로 잘 선용할 줄 아는 선한 청지기가 되도록 힘쓰기 바란다.
세상에는 주(主)를 위하여 돈 쓸 줄 모르는 어리석은 부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정당하게 돈 버는 법뿐만 아니라 정당하게 돈 쓰는 법도 배워야 한다. 하나님은 돈을 쓸 줄 아는 사람에게 돈을 맡기신다. 그래야만 돈이 잘 돌기 때문이다. 돈이 잘 도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이다. 왜 경제가 어려워지는 걸까? 그것은 돈에 대한 은사와 소명이 없는 어리석은 부자가 많기 때문이다. 돈에 대한 은사와 소명이 없는 어리석은 부자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세상은 나빠질 것이다. 돈이 돌지 않으면 더불어 경제가 나빠지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은 소명감을 가지고 열심히 돈을 벌어야 한다. 부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은사로 주신 물질을 선한 청지기처럼 잘 사용하여 세상에 돈이 잘 돌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세상사람들처럼 돈을 복으로 여기며 살아서는 안 된다. 돈은 복이 아니다. 돈은 은사요, 소명이다.
4부 청부(淸富)의 길
10장 하늘에 보물을 쌓는 부자가 되라
11장 세상의 불평등을 치유하는 부자가 되라
12장 하나님을 위하는 부자가 되라
13장 하나님이 믿고 맡길 수 있는 부자가 되라
Weight | 1 lbs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