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이 다할 때까지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아들,
그분의 놀라운 사랑을 만난다!”
국제제자훈련원은 은보(恩步) 옥한흠 목사 소천 10주기(2020년)를 맞아 《옥한흠 전집》을 출간한다. 옥한흠 목사의 강해설교를 담은 〈강해편〉부터 출간되며, 《요한복음 2_요한이 전한 복음》은 〈강해편〉 11권 중 제5권이다. 전집의 각 권에는 설교자와 연구자를 위해 성경구절 색인을 수록했다.
한 편의 설교를 위해
목숨을 걸다
‘옥한흠’ 하면 많은 사람이 ‘제자훈련’을 떠올릴 만큼 그는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제자훈련 목회자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가 우리에게 끼친 영향은 제자훈련뿐만이 아니다. 그는 “한국교회의 가장 대표적인 설교자요, 목회자가 가장 존경하는 설교자”(“한국교회 설교 성향 분석”, 『그말씀』, 통권 25호, p.239)로 손꼽힌다.
알려진 것처럼 옥한흠 목사의 목회철학 중 핵심은 평신도를 깨워 주님의 제자로 만드는 제자훈련이다. 이러한 본질을 회복하고 생명력 있게 확장되도록 하는 것이 바로 설교였다. 그는 제자훈련 목회의 본질에 충실할 수 있는 길이 바로 목회자 스스로 죽는 것이라 믿었고, 그의 헌신은 평생 설교를 위해 진액을 쏟아내는 자세로 드러났다.
옥한흠 목사는 그리스도를 믿고, 복음의 본질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성숙한 제자가 되어 세상 속에서 소명자의 삶을 살아가도록, 한 사람을 변화시키는 데 설교의 역점을 두었다. 그런 설교를 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치의 헌신을 준비 과정에 쏟아부었으며, 하나님 말씀이 가르쳐주시고 명령하시는 대로 양심껏 전하고자 몸부림쳤다. 우직하게 본문을 붙잡고, 말씀으로 청중을 사로잡아 기어이 하나님 앞에 무릎 꿇게 만든 그는 제자훈련에 미친 광인(狂人)이자 설교에 목숨을 건 장인(匠人)이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싶다면
요한복음을 읽으라
저자가 주의 영광을 보여달라고 구했을 때, 하나님은 뜻밖의 응답을 주셨다.
“나의 영광을 보길 원하느냐? 요한복음을 읽어라.”
“주님,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기록된 것(요 20:31)이 아닙니까? 영광을 보여달라고 하는 제게 왜 이 책을 읽으라고 하십니까? 저는 이미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까?”
그러자 하나님은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을 떠올리게 하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에는 주님의 영광을 보고 환희에 차서 그분의 이름을 높이는 성도들이 여럿 등장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면서 기도하는 자에게 주어진 풍성한 복을 누렸으며, ‘내가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이 내 안에 거하는’ 신비를 체험했다. 저자는 모든 성도가 이와 같은 복을 누리길 바라는 마음으로 요한복음을 들고 강단에 섰다. 균형 잡힌 성경 해석과 시대와 사람을 읽어내는 통찰력, 본문과 청중의 삶을 이어주는 적실성을 갖춘 이 책은 요한복음 강해설교의 표본이라 할 만하다.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을 만나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불과 일주일 남짓 앞두고 제자들과 나누신 은혜로운 말씀을 가득 담고 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서 잔혹하고 수치스러운 십자가의 죽음을 예견하고 계시던 처지라 마지막이 가까워올수록 날마다 무거운 침묵으로 일관하셨을 것 같은데, 도리어 예수님은 더 많은 말씀을 하셨다는 놀라운 사실을 보게 된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 13:1). 이것이 가장 확실한 답이라고 생각한다. 생명이 다할 때까지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아들, 그분의 놀라운 사랑을 요한복음이 아니고서는 어디에서 만날 수 있겠는가?” _본문 중에서
“목사님,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아십니까?”
“예? 뭐 말입니까?”
“무릎을 꿇고 절하는 것 말입니다.”
“아, 다다미방이니까 그랬겠지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일본에서는 무릎을 꿇고 허리를 굽혀서 바닥에 엎드려 절하는 것은 신하가 왕에게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특별히 존경하는 스승이나 자기가 평생 섬기고 싶은 사람이 있을 때 심사숙고하고 나서 하는 일입니다.”
그 말을 듣고 제가 얼마나 부담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분은 저에게 이런 말까지 들려주셨습니다. “일본 사람은 한번 무릎 꿇고 절하면 절대 배신하지 않습니다.” (중략) 맹인이었던 사람이 예수님 앞에 엎드려 절한 것 역시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초라한 옷을 입은 나사렛 청년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말씀을 듣고 다시 보니 자기 앞에 계신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분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있었습니다.
– 32 믿음과 경배 159-160면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는 예수님을 기쁘게 하고 찬양하고 예배하고 높이는 일을 가장 앞세웁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과 가난한자를 위하는 것을 동등하게 보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 드리는 예배와 가난한 자를 위한 구제를 혼동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의 영광과 사회복지를 동일하게 다루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최우선 순위이십니다. 마리아는 바로 이와 같은 소중한 교훈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 38 사랑의 헌신_290면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영적인 눈이 멀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사람은 예수님이 눈앞에 있어도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죄로 눈이 어두워져 있습니다. 이미 어두운 사람인데 그를 또 어둡게 할 필요가 있을까요? 또 사람은 이 세상에 날 때부터 마음이 강퍅합니다. 성경 말씀대로 하면, 돌처럼 굳은 마음을 가지고 세상에 나옵니다. 미련한 마음을 가지고 나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습니다. 깨달을 수 없습니다. 인간은 그 마음이 돌밭과 같고 가시덤불과 같아서 아무리 귀가 아프도록 들려줘도 깨닫지 못합니다. 날 때부터 이미 완악한데 또 완악하게 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따라서 ‘하나님이 눈을 멀게 했다, 완악하게 했다’는 말을 액면 그대로 들으면 안 됩니다. 이 말씀은 완곡한 표현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눈먼 사람은 눈먼 그대로 내버려두셨고, 마음이 완악한 사람은 완악한 그대로 내버려두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자연적으로는 깨달을 수도 없고, 볼 수도 없었다는 말입니다.
– 41 약한 믿음, 거짓 믿음_342면
25 예수께 반항하는 사람들(요 7:1-13)
26 배에서 흘러내리는 생수의 강(요 7:37-39)
27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요 8:1-11)
28 세상의 빛 예수(요 8:12-30)
29 거짓 믿음이란 이런 것이다(요 8:31-59)
30 진리가 자유롭게 하리라(요 8:31-32)
31 영의 눈을 멀게 하는 것들(요 9:1-41)
32 믿음과 경배(요 9:1-41)
33 양의 문 되신 예수(요 10:1-10)
34 나는 선한 목자라(요 10:11-29)
35 내가 영생을 주노라(요 10:22-42)
36 예수님의 사랑이 의심스러울 때(요 11:1-16)
37 나사로야 나오라(요 11:17-44)
38 사랑의 헌신(요 12:1-11)
39 어린 나귀를 타신 왕 예수(요 12:12-33)
40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요 12:20-33)
41 약한 믿음, 거짓 믿음(요 12:34-43)
42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 13:1)
43 예수님이 보여주신 섬김의 본(요 13:1-17)
44 날마다 발을 씻으십니까?(요 13:3-11)
45 가룟 유다가 주는 교훈(요 13:18-30)
성경구절 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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