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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우리는 악과 고통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 고난은 인간의 실존이자 특히 최근 세계의 현실이다. 전 세계적으로 코비드 19 바이러스가 창궐하여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고, 경찰이 시민의 목을 밟아 죽인 사건에서 보듯이 이 세상에는 자연적인 악과 도덕적인 악이 가득하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자애로우시고 전능하신데 하나님은 왜 이런 악과 고통을 허용하시는가? 혹시 하나님이 무능하거나 자애롭지 않은 것은 아닌가? 더 나아가 과연 신이 존재하기는 하는 것인가? 악과 고통의 문제에 직면하여 우리는 누구나 한 번쯤은 이런 질문에 맞닥뜨리는데, 신학에서 이 문제를 다루는 분야가 바로 신정론이다.
악의 문제에 대해 답변하기 위해서는 먼저 악에 대해 정의해야 하는데, 본서에서는 악을 도덕적인 악과 자연적인 악이라는 두 유형으로 나눈다. 도덕적인 악은 어떤 의미에서는 결과로 빚어진 악에 대해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만한 사람이 초래한 악으로서 사건의 배후에 의도가 있었고 그 사람의 자유 의지가 개입된 악을 의미한다. 도덕적인 악은 아동 학대, 인종 학살, 고문, 테러 행위, 절도, 부정직, 탐욕, 폭식 등이 포함된다. 자연적인 악은 도덕적 행위자와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사건이나 재해와 관련이 있다. 자연적인 악에는 허리케인, 토네이도, 지진, 쓰나미, 기근, 백혈병이나 알츠하이머병과 같은 질병, 청각장애나 시각장애와 같은 장애, 사람이나 다른 생물에게 해를 끼치지만 어떤 인간도 그에 대한 책임이 없는 기타 끔찍한 사건들이 포함된다.
이러한 악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자애로우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본성과 악의 실재가 공존하는 현실이 모순되어 보인다는 지적·논리적 문제가 다뤄져야 할 뿐 아니라, 삶이 송두리째 무너져 내리는 듯한 고통에 직면하여 사람들이 느끼는 ‘하나님이 내게 어떻게 이러실 수 있는가?’라는 감정적 문제도 다뤄져야 한다.
본서에서는 이 문제를 놓고 하나님과 악의 문제에 관한 오늘날의 선도적인 사상가 다섯 명이 먼저 이 문제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제시하고 나서, 다른 네 명의 저자들의 견해에 비판적으로 답변한다.
우선 아우구스티누스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고전적 관점에서는 악이 발생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이를 허용하시기 때문이며, 하나님은 그로부터 더 큰 유익을 끌어내기 때문에 악을 허용한다고 본다.
몰리나주의 관점은 예수회 신학자인 루이스 데 몰리나의 저작과 그의 신적 섭리 이론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16세기 스콜라 철학 부흥의 선도적인 인물인 몰리나는 창조 질서에 대한 하나님의 포괄적인 섭리는 자유로운 인간의 행동과 조화를 이루며, (자유로운 인간의 행동을 포함하여) 세상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에 대해 하나님이 미리 다 알고 있고 인과 관계상의 영향력을 끼친다고 해서 하나님이 반드시 그 사건들이 어떻게 될지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에 따르는 함의로서 하나님이 악을 의도하거나 악이 일어나도록 결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악의 문제에 책임이 없게 된다.
열린 유신론 관점에서는 전지하고 무한히 자애로운 하나님이 택하신 일반 정책의 결과로 자연적인 악이나 도덕적인 악이 발생하는데, 이 세상은 선하시고 현명하신 창조자가 자신이 택하신 일반 정책의 결과로 이러한 악이 발생할 것을 아셨다 할지라도 이 세상을 그렇게 창조하신 것은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본질적 케노시스 관점은 공감적·교훈적·치유적·전략적·주권적 차원이라는 다섯 가지 차원을 포함한다. 이 관점의 주권적 차원에 따르면 하나님이 악을 일방적으로 방지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자신의 자애롭고, 자기희생적이고, 남에게 권한을 부여하고, 필연적으로 지배하지 않는 본성을 부인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런 본성을 지닌 하나님이라면 타자의 자유와 존재를 뒤엎지 않을 것이고 자신이 창조한 자연 세계의 자유와 규칙성도 번복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타자를 지배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하나님은 진정한 악을 일방적으로 방지할 수 없다.
회의적 유신론에서는 유신론의 하나님이 정말로 존재한다 하더라도(대다수 회의적 유신론은 이 점을 긍정한다) 우리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목적이나 행동에 대해 많은 것을 이해할 것으로 기대하지 말아야 하며, 이 점이 사실이라면 유신론에 반하는 강력한 증거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은 그다지 강력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이렇듯 다섯 명의 기고자는 자신이 속한 전통의 관점에서 신과 악과 고난의 관계를 면밀히 탐구하며 치열한 논쟁을 펼친다.
우리는 저자들의 관점에 동의할 수도 있고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설사 그 관점들에 동의한다 해도 악과 고통의 문제는 그대로 남아 있기 마련이다. 그러다 보니 이 관점들 모두 악의 문제에 대한 속 시원한 해법을 제시하지는 못하고 부분적인 해답만 제시하는 것으로 느껴지기 쉽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신뿐 아니라 자신보다 더 큰 세계의 현실을 완전히 이해하기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니 이것은 어쩌면 우리 인간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설사 완벽한 해법은 찾지 못할지라도 우리는 욥처럼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께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해 달라고 요청할 수 있다. 비록 지금은 청동 거울에 비친 사물처럼 희미하게 보일지라도 모든 것이 완성될 그날에는 얼굴을 마주한 채 보듯이 선명하게 볼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서 말이다.
그러니 본서는 악의 문제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과 이 문제로 고통 중에 있는 이웃을 돕기 원하는 사람이 자신과 타인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하여 꼭 읽어야 할 책이다. 또한 지금 당장은 그런 큰 고통 중에 있지 않은 사람이라도 그런 문제에 직면할 때 조금이라도 더 잘 대처할 수 있도록 준비한다는 ‘예방 접종’ 차원에서 읽어볼 가치가 있는 책이다.
고전적 관점에서 제시하는 악의 문제에 대한 기본적인 대답은 ‘하나님이 허용하지 않으면 어떤 악도 발생하지 않으며, 하나님께는 각각의 악을 허용하는 타당한 이유 – 하나님이 악을 사용해서 더 큰 유익을 가져오기 위함이다 – 가 있다’라는 형태를 취한다. 물론 흔히 더 큰 유익 원리라고 불리는 이 원리는 악의 문제에 대한 완벽한 해답과는 거리가 멀다. 이 원리는 우리가 겪는 특정한 악들 각각에 의미를 부여하는 더 큰 유익이 무엇인지를 알아내는 방법을 우리에게 말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이 원리는 주기도문에서 말하듯이 하나님 나라가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도 임할 때 우리가 발견하기를 소망하는 특정한 해답을 포함해서 기독교적 소망의 구조에 대해 중요한 무언가를 말해준다.
기독교의 소망은 우리를 종말론, 즉 결말(그리스어로 eschaton)이 있는 이야기 안에 위치시키는데, 그 이야기는 다수의 좋은 이야기의 행복한 결말처럼 이야기의 중간에 나오는 고통과 악을 일리가 있도록 만들어주는 더 큰 유익을 드러낸다. 그러나 많은 희극에서와 마찬가지로 그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이야기의 중간 부분은 – 숲 속에서 길을 잃은 네 명의 연인이 자신이 누구이며 누가 자신이 진짜 사랑하는 사람인지 잊어버리고 미쳐가는 것처럼 보이는 “한여름 밤의 꿈”의 중간에 나오는 막들처럼 – 어둡고 기괴하며 아무 재미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런 희극의 중간에서 등장인물들은 전혀 웃을 입장이 아니다. 그들은 낙원에 있는 것이 아니며 이 밤이 끝나기를 소망해야 한다.
_1장 고전적 관점
몰리나주의는 악의 문제와 어떤 관련이 있는가? 그것은 어떤 형태의 문제를 논의하느냐에 달려 있다. 현대 종교 철학자들은 악에서 지적인 문제와 감정적인 문제를 구별하는 것이 유익함을 발견했다. 악의 지적인 문제는 ‘하나님과 악의 공존을 어떻게 합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설명할 것인가?’와 관련이 있다. 악의 감정적인 문제는 ‘사람들이 그러한 악을 허용하는 하나님께 갖는 감정적 혐오를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와 관련이 있다. 지적인 문제는 철학자의 영역에 속하고 감정적인 문제는 목회자의 영역에 속한다.
나는 몰리나주의가 악의 감정적인 문제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감정적인 위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몇몇 열린 유신론자들은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섭리적으로 통제
하지 않으며 따라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닥친 악을 계획한 책임을 질 수는 없다’고 생각함으로써 진정한 위로를 받는다고 주장한다. 나는 몇몇 사람들이 왜 악과 고통과의 싸움에서 자기 편이 되어 주는데 나쁜 일들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알지 못했다는 이유로 비난받을 수는 없는, 인지적 한계가 있는 슈퍼맨이 존재한다는 생각에 위로를 받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사람들이 실제로 열린 유신론이라는 대안을 충분히 생각해봤는지 궁금하다. 천재가 아니더라도 어떤 끔찍한 도덕적 악이나 자연적인 악이 곧 발생할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는데, 인지적 한계가 있는 슈퍼맨이라면 흔히 그런 악을 방지하거나 중단시키지 않은 데 대한 책임이 있어 보일 것이다. 쓸데없어 보이는 악은 중간 지식이 없다면 실제로 쓸데없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 그러나 중간 지식을 갖고 있는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몇몇 끔찍한 악한 사건이 발생하도록 허용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는 그렇게 할 도덕적으로 충분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기에 위로받을 수 있고 따라서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다.
_2장 몰리나주의 관점
그렇다면 이런 형태의 자연적인 악은 우리가 사는 세상과 같은 세상에서 창조자가 가져오는 선하고 바람직한 것들로 인식되는 특성들의 불가피한 결과다. 자연 질서 신정론(natural order theodicy)은 그 대가를 치를 가치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 신정론은 다음과 같은 일련의 네 가지 명제로 요약될 수 있다.
1. 실제 우주는 지적인 몇몇 피조물뿐만 아니라 지각 있는(sentient) 피조물도 포함하고 있는 복잡하고 다단계적인 자연 세상이다. 세상은 복잡한 진화 과정을 통해 현재 상태로 발전해왔으며 기능 발휘에 있어서 상당한 정도의 자율성을 누린다.
2. 그렇게 구성된 우주는 물리적인 우주의 질서와 아름다움에 있어서, 그리고 수많은 생명체의 발전과 번성에 있어서 많은 유익이 가능해지게 한다. 우주는 또한 상당히 많은 고통과 죽음도 불가피하게 포함하고 있다.
3. 우리가 전능한 하나님에 의해 창조될 수 있는 어떤 대안적인 자연 질서가 선에 대한 잠재력에 있어서나 선과 악의 균형에 있어서 현재의 우주를 능가할 것이라고 가정할 타당한 이유는 없다.
4. 처음 세 가지 요점 때문에 하나님이 이 우주를 창조한 것은 좋은 일이다.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한 데 대해 도덕적으로 힐책하거나 완벽하게 선한 창조자라면 그와 다르게 행동했을 것이라고 가정할 근거는 없다.
자유 의지 신정론은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명제로 구성된다.
1. 세상은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는 지적이고 자유로운 사람들을 포함하고 있는데, 그들은 그 안에서 서로에게 그리고 서로를 위해 책임을 진다. 인간 사회는 사람들의 내재적인 잠재력을 실현하고, 점진적으로 복잡한 사회 및 문화 체계를 발전시키고 물질적 환경을 더 많이 통제하는 데 이러한 잠재력을 활용함으로써 발전해왔다.
2. 그렇게 구성된 인간 세상은 인간들의 잠재력 실현 및 성취와 인간 문화의 발전에 있어서 선을 위한 큰 잠재력을 제공한다. 사람들에게는 이 수준을 넘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인간이 이룰 수 있는 궁극적인 성취를 향유할 기회가 있다. 인간 세상은 또한 사람들이 선보다 악, 공통의 이익보다 단기적인 만족, 사랑보다 미움을 선택할 자유를 활용할 때는 커다란 악의 가능성 및 실로 악의 실재도 제공한다.
3. 우리가 알 수 있는 한, 이런 일반적인 특징들을 공유하지 않는 어떤 대안적인 세상도 실제 세상이 제공하는 것과 비교할 만한 선에 대한 잠재력을 제공할 수 없다. 자유롭고 책임 있는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자격이 있다.
4. 피조물에 의한 자유의 오용을 막고 이러한 오용을 통해 가해진 피해를 바로잡기 위해 하나님이 일상적으로 빈번하게 개입하면 창조 계획에서 의도된 인간의 삶과 공동체의 구조를 훼손할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개입이 발생할 것으로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5. 처음 네 가지 요점 때문에 하나님이 위에서 묘사한 바와 같은 인간 사회를 포함하는 우주를 창조한 것은 좋은 일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한 데 대해 도덕적으로 힐책하거나 완벽하게 선한 창조자라면 이와 다르게 행동했을 것이라고 가정할 근거는 없다.
나는 자연적인 악에 대한 자연 질서 신정론과 도덕적인 악에 대한 자유 의지 신정론의 결합이 악을 근거로 하나님의 존재를 반박하는 논증에 대한 적절한 답변이 된다고 결론짓는다. 이 접근법이 이 주제에 대한 다른 접근법보다 우월한지 – 나는 그렇다고 믿는다 – 는 더 깊이 논의해야 할 주제다.
_3장 열린 유신론 관점
아마도 케노시스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현대의 번역은 하나님의 소위 자발적인 자기 제한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 관점에서는 하나님은 사랑때문에 자발적으로 타자를 위해 자신을 제한한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존 폴킹혼은 “신의 능력은 의도적으로 자기 제한적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들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지만 기꺼이 자신을 제한한다. 폴킹혼은 자발적인 자기 제한이 악의 문제에 대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이렇게 설명한다. “하나님은 살인자의 행동이나 지진의 파괴적인 힘을 원하지는 않지만, 피조물에게 인과 관계의 여지를 허용하기 위해 하나님의 능력이 의도적으로 스스로 제한된 세상에서 그런 사건들이 발생하도록 허용한다.”
본질적 케노시스는 하나님이 더 작은 실체들을 완전히 통제하거나 법칙과 같은 규칙성에 개입해서 진정한 악을 방지할 수 없다고 말한다. 덜 복잡한 실체들의 경우에 하나님은 필연적으로 자발적 활동과 자기 조직화라는 선물을 준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일부다. 이는 하나님이 좀 더 단순한 유기체나 실체의 자발적 활동과 자기 조직화를 철회하거나 번복할 수 없으며 그것들을 주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우주의 덜 복잡한 피조물들과 실체들 가운데서도 통제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랑은 필연적으로 자발적 활동과 자기 조직화를 부여한다.
본질적 케노시스는 하나님이 법칙과 같은 존재의 규칙성에 개입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런 규칙성들이 창조세계에서의 하나님의 지속적이고 자애로운 활동에서 유래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규칙성에 개입할 수 없다. 하나님의 사랑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원천이며, 하나님의 존재를 부여하는 사랑은 취소될 수 없다.
우리가 세상에서 목격하는 규칙성은 하나님이 자발적으로 삽입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을 초월하는 외부에서 유래한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자애로운 본성이 창조세계의 법칙과 같은 규칙성의 궁극적인 원천이며, 필연적으로 사랑하는 하나님은 만물에게 신적으로 표현되는 사랑을 중단할 수 없다. 하나님은 외부의 시계 제작자가 아니라 자신 안에서 만물이 살고 움직이며 존재하는 분으로서(행 17:28), 하나님의 지속적이고 언제나 영향력이 있는 사랑은 모든 피조물에게 조건을 부과한다.
_4장 본질적 케노시스 관점
나는 앞에서 소위 회의적 유신론은 두 가지를 주장한다고 말했다. 첫 번째 주장은, 만일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우리 인간은 이 하나님의 목적에 관해 많이 알거나 이해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두번째는, 이 점을 감안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강력한 증거로 보일 수도 있는 많은 것들이 전혀 강력한 증거가 아님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유신론에게 불리해 보이는 증거의 모든 부분에 두루 적용되는 하나의 해답이 존재할 것으로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우리는 삶을 찢어놓는 사건들의 한가운데서 회의적 유신론에서 슬픔을 치유할 많은 위안이나 심지어 그냥 견디는 데 필요한 많은 도움을 받기를 기대해서도 안 된다. 그와 반대로 회의적 유신론의 “유신론적인” 부분은 – 특히 우리가 신앙적으로 활발한 유신론 전통에 속해 있다면 – 우리의 하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대한 기대를 줄 것이고, 우리의 여정은 어느 정도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관심을 기울이는 일들에 관심을 갖게 해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우리의 비탄과 고통을 단지 비탄의 원천만이 아니라 다른 많은 것의 원천 – 지적인 질문의 원천은 물론이고 유신론에 기반을 둔 우리의 실망과 항의와 심지어 비난까지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는 것의 원천 – 으로 만들 수 있다. 이렇게 표현해도 된다면 유신론은 계집애같이 유약한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다.
_5장 회의적 유신론 관점
그래서 현명한 신정론은 지나치게 야심적이지 않을 것이다. 그런 신정론은 소망의 이유를 빼앗아 가지 않도록 하나님을 정당화하는 이유들을 제시하는 데 주저할 것이다. 신정론이 제시하는 논증이 기독교적이려
면, 그 논증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야기 안에 중간에는 불평하다가 결국에는 기뻐하는 쪽으로 옮겨 갈 가능성을 열어둘 필요가 있다. 악의 문제는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추론을 차단하는 논증 이상의 것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악의 문제는 하나님이 현재의 상황을 변화시킬 것이라고 소망할 수 있는 이유를 요구한다. 이는 단지 목회적 또는 감정적 요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모든 기독교 신정론의 논리적인 함의다. 하나님이 악을 허용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 하나님이 현재의 악에서 더 큰 유익을 가져올 것이라고 우리가 소망하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이런 이유들이 우리로 하여금 현재에 대해 너무 편안하게 느끼게 할 위안을 제공하지 않아야 한다. 그 이유들은 우리로 하여금 지금 이 시대의 정당화된 악에 만족하게 할 이유여서는 안 된다.
_6장 고전적 관점의 답변
내 대화 상대들은 주로 악의 지적인 문제의 비논리적인 형태들, 즉 오늘날의 논쟁의 중심에 있고 섭리에 대한 몰리나주의의 관점과 가장 관련이 있는 형태들에 관심이 있다. 우리의 다양한 접근법을 이해하고자 할 때 나는 윌리엄 해스커의 일반 정책 신정론과 구체적 유익 신정론을 구별하는 것이 특히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해스커와 토머스 오어드의 접근법은 일반 정책 신정론인 반면 필립 캐리, 스티븐 위크스트라와 나 자신의 접근법은 구체적 유익 신정론, 또는 적어도 구체적 유익의 변호라고 생각한다 즉, 우리 세 사람은 그 이유가 우리에게 알려지지는 않았을지라도 하나님이 이러저러한 악한 사건이 발생하도록 허락하는 데는 특정한 이유가 있다고 믿는다. 해스커가 지적하는 대로 이 두 접근법 사이에는 모순이 없다. 사실 나는 몰리나주의 관점이 일반 정책 접근법을 보완한다고 본다. 나는 해스커나 오어드의 일반 정책 신정론에 하나님이 중간 지식을 갖고 있지 않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으므로 이러한 신정론은 특정한 유익도 포함하도록 확대될 수 있다는 점을 발견하고 기분좋게 놀랐다. 일반 정책 신정론이 그 자체만으로 그리고 확대되지 않고서 악의 문제에 대한 확률론적인 내적·외적 진술의 힘을 저지하는 데 성공할 수 있다면 이는 놀랍고 환영할 만한 일일 것이고 나는 내 동료들이 그 일을 잘 해내기를 바란다.
_7장 몰리나주의의 답변
이 답변에서 나는 하나님의 통제에 대한 최대주의 관점부터 최소주의 관점까지 다양한 대안들을 고찰했다. 나는 열린 유신론은 양 극단 사이에 멋지게 균형을 잡고 있는 “골디락스의 의자”(골디락스는 영국의 전래
동화인 “골디락스와 곰 세 마리”에 등장하는 소녀의 이름이다. 곰의 굴에 들어가 곰 가족이 끓인 뜨거운 수프, 차가운 수프, 적당히 따뜻한 수프 중에서 적당히 따뜻한 수프를 먹고 적당한 크기의 의자에 앉아 있다가 적당한 크기의 침대에서 잤다는 이야기에서 따온 말이다 – 편집자주)에 앉아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주장에 대해 우리가 합의에 도달할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_8장 열린 유신론 관점의 답변
나는 이 기고문들에서 신비에 호소하는 데 충격을 받았다. 나는 내 글에서 신비에 호소하지는 않았지만 모든 진리를 알 수는 없다는 점을 인정했다. 나는 동료 기고자들도 진리에 대한 이해가 제한적이라고 주장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우리 중 누구도 하나님이나 실재를 완전히 알아내지 못했다!
그러나 모든 진리를 알지 못한다고 인정하는 것은 내가 다른 기고문들에서 발견한 신비에 대한 호소와는 다르다. 그 글들을 읽어보니 다른 기고자들은 하나님이 악을 막는 중대한 문제에 대해 부분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면서 신비에 호소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나는 특히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주제에 초점을 맞추면서 악의 문제에 대한 완전한 해법을 제시했다.
_9장 본질적 케노시스 관점의 답변
내 동료 기고자들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이 세상의 악을 더 많이 막지 않는 이유를 깨닫도록 건설적으로 도움을 주는 것을 목표로 하는 네 가지 신정론 – 나는 그것들을 네 가지 설명 모델이라고 부를 것이다 – 을 제시한다. 내 글은 분석철학자들로부터의 최근의 몇몇 예리한 무신론 논증을 막는 것만을 목표로 하며, 내 변호 모델은 대체로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이 세상의 악을 더 많이 막지 않는 데 대한 그 분의 목적을 완전하게 또는 자세하게 알기를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확실히 여기에는 차이가 있다. 그렇지만 다른 기고자들의 모델이 그들의 좀 더 야심적인 목표에 기여하고 내 모델도 여하튼 변호에 기여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러한 상생 관계는 그들의 모델이 단지 부분적인 설명을 제공할 경우 – 그래서 내 모델이 지켜내야 할 큰 공백을 남겨둘 경우 – 에만 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내 답변은 공백을 찾아내려는 최초의 시도로서 특히 하나의 신정론 모델을 통해 다룰 필요가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문제들을 형성하는 가정들에 초점을 맞춘다. 어떤 모델이 그 가정들을 통해서 특정한 질문들을 지워버릴 때 공백이 발생한다. 그럴 경우에는 당연히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이 없다는 점이 가려질 수도 있다.
_10장 회의적 유신론의 답변
1부: 악의 문제에 대한 다양한 관점의 설명
1장: 고전적 관점 _필립 캐리
2장: 몰리나주의 관점 _윌리엄 레인 크레이그
3장: 열린 유신론 관점 _윌리엄 해스커
4장: 본질적 케노시스 관점 _토머스 제이 오어드
5장: 회의적 유신론 관점 _스티븐 위크스트라
2부: 다른 기고자들의 글에 대한 각 기고자의 답변
6장: 고전적 관점의 답변 _필립 캐리
7장: 몰리나주의 관점의 답변 _윌리엄 레인 크레이그
8장: 열린 유신론 관점의 답변 _윌리엄 해스커
9장: 본질적 케노시스 관점의 답변 _토머스 제이 오어드
10장: 회의적 유신론 관점의 답변 _스티븐 위크스트라
인명 색인
주제 색인
이 책은 하나님께서 악을 허용하시는 이유를 설명하는 다양한 관점과 더불어, 악을 근거로 신의 무능이나 사 악함을 추론하는 반기독교적 논증의 결정적인 문제를 보여준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다섯 가지 관점 사이의 관계를 상호 배타적으로 보지 않고 상호 보완적으로 읽어내는 독자는 악의 문제에 관한 충분히 성숙한 견해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 김정형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신정론 논쟁』은 악의 문제와 선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는 다섯 가지 관점을 엮어놓은 책인데, 순차적인 흐름은 창조의 구속을 주권적으로 이끌어 가시는 큰 틀 안에서 하나님께서 악과 고난을 실제로 허용하신다는 입장을 대변하는 “고전적 관점”을 제시하고, 한 걸음 더 들어가서 나머지 네 관점으로 재해석하는 내용으로 엮여 있다. 시시각각 일어나는 사건 사고와 전염병이 창궐하는 이런 시점에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자세한 논의를 파악하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일독을 권하며, 이를 통해 성경적 관점을 잘 찾아내고 구체적으로 형성하는 기회로 삼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든다.
– 유태화 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교수
자연적 악의 한가운데서 전능한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인간의 자유 의지가 개입된 도덕적 악이 무참하게 자행되고 있을 때, 무한한 사랑의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실까? 하나님은 이런 악들을 허용하실까, 아니면 막을 힘이 없을까? 본서는 시의적절하게 우리의 믿음의 정당성과 합리성을 고민하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이다.
– 유해무 고려신학대학원 은퇴교수
현대 무신론 철학에서는 신의 존재를 부인하기 위해 단골로 삼는 주제가 악의 실재다. 그러나 악에 대한 이런저런 담론들을 보면 의문에 대한 대답은 언제나 또 다른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악 자체도 힘든데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 더욱 답답하다! 채드 마이스터와 제임스 듀 주니어가 편집한 『신정론 논쟁』은 신정론을 오래 연구해온 현대 미국 학자들의 성찰 다섯 편을 담고 있 다. 저자들은 각각 다른 네 명의 저자들의 성찰에 대해서 토론하고 답변함으로써 문제를 더욱 다양한 각도에서 보게 해주고, 읽는 재미와 이해를 더해준다.
– 이오갑 케이씨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악은 무신론자에게는 신의 비존재를 지시하는 결정적인 증거이며, 그리스도인에게는 신앙의 기반을 흔드는 가장 치명적인 도전이다. 악의 문제에 대한 간단명료한 대답을 기대한다면 이 책을 읽어서는 안 된다. 반면 그러한 피상성을 넘어 악의 한복판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가능한지를 질문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은 펼쳐 볼 만한 가치가 있다. 하나님과 악의 관계에 대한 서로 충돌하는 의견들의 미로를 헤매다 보면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지적인 신뢰 쪽으로 한걸음 더 나아가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 이용주 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
본서가 다루는 하나님과 악의 문제는 인류의 궁극적 질문으로서 변증학에 있어서 항상 중요한 논제였지만, 특별히 현재 세계적인 팬데믹의 고통의 상황에서는 더더욱 절실한 실존적인 문제로 다가온다. 이러한 때 시의적절하게 이 주제에 대한 다양한 관점들을 명쾌하게 제시하며 비교 논의한 이 책이 번역 출판된 것을 열렬히 환영하며 해답을 찾기 위해 고민하는 모든 독자에게 강력히 추천하는 바이다.
– 한상화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조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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