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바람은 종교개혁의 고전적 진술이 성경주해적으로 그리고 신학적으로 여전히 타당하다는 것을 증명할 뿐만 아니라 언약적 해석이 칭의와 연합의 법정적 측면과 유효적 측면, 법적 측면과 관계적 측면, 개인적 측면과 집단적 측면을 볼 수 있게 해 준다는 것도 증명하는 것이다.
– p. 15.
언약신학이 성경신학과 조직신학을 통합하는 기반을 제공한다고 할 때, 이것의 타당성은 선택과 칭의에 대한 고찰에서 가장 분명히 드러날 수 있다. 대부분의 근대 교의학과 성경 연구가 유대교나 구약 배경과의 대비(對比) 가운데 규정되어 왔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몇 십 년 동안 이 경향이 바뀌어 왔고, 언약적인 준거 틀이 더욱 인정받게 됐다.
– p. 29.
중세 로마교는 제2성전 유대교의 단순한 복원이 아님에 분명하지만, 둘 다 샌더스가 묘사하는 언약적 신율주의와 유사한 성격을 나타낸다. 언약적 신율주의가 실패를 참작하도록 아무리 조정될지라도, 언약적 신율주의는 종교개혁가들로부터만 아니라 바울로부터도 신랄한 비판을 불러온 신율주의적인 칭의의 원리다.
– p. 109-10.
법정적 구원론과 참여주의적(participationist) 구원론 사이의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슈바이처의 논지는 칭의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우선권을 부여해야 한다는 무수한 요청들 가운데 재차 등장한다. 이 논지가 적용되어 온 대상은 바울만이 아니었다. 루터(새로운 핀란드 학파[New Finnish school]에 따르면)와 칼빈(토렌스[T. F. Torrance]와 다른 이들에 따르면)도 법정적 선언으로서의 칭의보다 삼위일체 하나님께 존재론적으로 참여하는 신비한 연합에 주된 관심을 기울였다고 주장되어 왔다.
– p. 258.
종교개혁 입장에 대한 다양한 도전 가운데,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이 칭의를 변두리로 내몰았을 뿐 아니라, 또한 참여에 관한 어떤 설명(신성화[divinization]나 신화[神化, theosis])이 그 연합에 대한 이해를 점점 더 지배하게 됐다.
– p. 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