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신학자이자 목회자로서, 한국 교회의 개혁과 사회적 책임을 위하여 여러 활동을 펼치고 있는 최형묵 목사가 첫 설교집을 냈다. 그는 코로나 위기 가운데, 일찍이 겪어보지 못한 그 위기의 실체를 성찰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감히 설교집을 엮어냈다고 말한다. 그래서 “삶의 위기 앞에서 성찰하는 신앙” 또는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는 용기”로 하려 했던 책 제목을 두 가지 의미를 함축하는 뜻으로 “성찰하는 신앙, 마주하는 용기”로 했다.
그저 흔한 설교집은 아니다. 설교는 신학의 꽃이라는 말의 무게감을 느낄 만하다. 칼 바르트는 설교자의 태도로 “한 손에 성서, 한 손에 신문”을 말했다. 성서의 메시지를 시대정신의 맥락에서 밝히는 것이 설교의 요체라는 의미이다. 최형묵 목사의 설교는 그 원칙에 충실한 한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성서 본문의 메시지를 헤아리기 위한 주석에 꼼꼼하다. “성서의 기록자와 현대인 사이의 뛰어넘을 수 없는 세계관과 언어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메시지가 담고 있는 본질적 내용을 간파해 이를 적절히 전해준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작업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현대과학의 시각에서 비판적 사유를 본업으로 해온 필자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최 목사의 설교는 이 점에서 결코 흠잡을 곳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장회익 교수 <추천의 글> 중에서).
성서 본문에서 메시지를 찾아내는 밑바탕이자 동시에 그 메시지와 교감하는 시대정신을 헤아리는 데 또한 진지하다. 그 시대 정신은, “현재 우리는 어떠한 삶의 정황 속에 놓여있으며 그렇기에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하며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이는 곧 우리는 과연 사람다운 삶을 누리고 있는가, 우리의 문명은 장기적 생존을 위해 바른 방향으로 지향하고 있는가, 특히 우리 가운데 억눌린 사람들이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작업은 무엇인가 등에 대한 끊임없는 통찰을 의미한다. 그런데 바로 이 점에서 최 목사의 설교는 남다른 감수성을 보여준다”(장회익 교수 <추천의 글> 중에서)
그래서 그의 설교는 “성서를 당시의 역사적 사실과 연관시켜 해석하지, 개인의 의견에 동조하도록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지 않고, “또한 가진 사람이나 힘 있는 사람의 편에 서지 않고, 사회적 약자, 경제적 약자, 소수자 편에 서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다”(홍윤표 교수 <추천의 글> 가운데).
이러한 그의 설교는 민중신학적 탐구 여정과 무관하지 않다. 교회와 민중신학이 과연 어울릴 수 있을까? 민중신학이 과연 교회에 뿌리를 내릴 수 있을까? 민중신학이 탄생한 이래 이 점은 늘 문젯거리 가운데 하나였다. 그의 설교는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민중신학이 교회에서 제대로 심어질 수 있을까? 천안살림교회 개척 이후 그의 설교를 보기 전까지 나는 민중신학의 성서적 전거가 지극히 제한되어 있다고 막연히 생각해 왔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성서 전체가 최 목사에 의해 민중신학의 전거가 되고 있지 않은가? 더욱이 민중신학이 그의 설교를 통해 성서적 지평을 넓혔고 지금도 넓히고 있는 중이다.”
“민중신학의 신학다움은 신학적 사상이나 논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자리’에 있다. 민중신학은 성서가 천상 무대에 있는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라 오늘 이 땅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삶과 그 사람들의 삶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임을 고백하는 신학이다. 그래서 최 목사의 설교는 철저히도 이 땅의 과거, 역사를 다루고 있고, 이 땅의 미래, 심판과 구원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그 과거, 미래 사이에 오늘의 결단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니 그 설교가 여느 교회처럼 ‘아멘’이 쉽게 나오겠는가? 당연이 무겁다. 부담스럽다. 당연히 자기 십자가를 요구한다. 그렇기에 그의 설교는 철저히 성서적이고 예수적이다”(김종수 목사 <추천의 글> 가운데)
그의 설교는 성서를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하여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이들에게뿐만 아니라 성장주의로 황폐화된 오늘 기독교에 경종이 된다. 그의 설교는 특정한 신조에 매여 있는 이들에게는 불편할지 모른다. 그러나 좁은 신앙과 관행적인 설교에 답답함을 느껴온 이들에게는 설교가 무엇인지 일깨워 줄 뿐 아니라 비기독교인들에게도 기독교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이것은 매우 미묘한 문제입니다. 옳고 그른 것을 가르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냐 그리고 그것을 가를 때 고통이 따른다는 것 역시 당연한 것 아니냐, 우리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결국 그 분별 능력을 지닌 인간 삶 자체가 죄 아니겠느냐 하는 결론에 이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나무가 동안 한가운데, 중심에 있다는 상징적 표현에 유의해야 합니다. 동산 한가운데 있는 선악과와 생명나무, 그것은 공유되어야 할 보편적 가치, 중심을 말합니다.
… 철학자 윌프리드 셀라스(Wilfrid Sellars, 1912~1989)는 이렇게 주장했다. “철학의 목적은 – 추상적으로 표현해서- 가능한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사물들이, 가능한 가장 넓은 의미에서 어떻게 서로 일치하는지를 이해하는 데 있다.”
-<1부 _ 삶의 위기 앞에서 성찰하는 신앙> 중에서
어째서 구원자인 메시아 예수가 사람들의 비방을 받는 표징이 되고 그 어머니는 예리한 칼에 찔리는 듯한 아픔을 겪을 수밖에 없을까요?
그것은 세상이 결코 진실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다들 진실을 외치지만, 사실 많은 사람은 그다지 진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많은 경우 많은 사람은 진실이 드러나는 것을 환영하기보다는 불편해합니다. “진리는 우리가 싫어하는 그 무엇입니다.” 마이다 슈이치라는 사람이 선사인 스승을 따라다니며 깨달음을 얻은 과정을 기록한 책 『이와 같이 나는 들었노라』에 나오는 한 구절입니다. 사람들은 앎에의 욕망보다는 무지에의 욕망에 사로잡히는 경우가 많습니다.
-<2부 _ 역사의 무게, 사건의 진실> 중에서
하나의 예입니다만, 잃어버린 양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찾아나서는 태도가 아니라 잃어버린 것을 오히려 반기는 태도를 환기시켜주는 사례입니다. 특정한 하나의 대상에만 관련된 태도가 아닙니다. 누군가를 배제하고 정죄하는 태도는 끊임없는 연쇄 고리를 형성해 칭칭 감기고 얽힌 그물망을 만듭니다. 그로 인해 허다한 사람들이 고통을 겪습니다. 예수님께서 본문 말씀에서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의 태도를 문제시한 것이 바로 그 때문입니다.
의인 아흔아홉보다 죄인 한 사람을 용납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것, 작은 사람 하나라도 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 그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이요, 그리스도교 신앙의 정수입니다.
-<4부 _ 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 마음, 차별 없는 세계> 중에서
이웃 사랑을 거부하는 행위가 살인행위에 해당한다는 것은 구약성서 이래 오랜 가르침입니다. “이웃의 살 길을 막는 것은 그를 죽이는 것이며 일꾼에게 품삯을 주지 않는 자는 그를 살해하는 것이다”(집회서 34:22). “사랑이 그 자체로 죽은 자를 살리고 죽음에 넘겨진 자를 불러 되살리려 하듯이, 증오는 살아 있는 자를 죽이며 작은 죄인을 살려두지 않는다. 증오의 영은 모든 사람에게서 그 편협함으로 역사하며 사탄과 함께 인간의 죽음을 향해 세력을 뻗치기 때문이다”(가드의 유훈서 4:6-7). 예수님께서도 형제를 증오하는 것이 살인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말씀하셨는가(마태 5:21 이하) 하면, 요한1서 또한 같은 뜻의 말씀을 단호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는 사람은 누구나 살인하는 사람입니다”(요일 3:15).
간음을 언급한 것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부자를 우대하고 아첨하는 것은 곧 영적 간음이라 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라고까지 봤으니, 더 긴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4부 _ 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 마음, 차별 없는 세계> 중에서
1부 삶의 위기 앞에서 성찰하는 신앙
인간의 조건과 삶 l 창세기 2:4-15
공동의 운명, 공동의 책임 l 창세기 3:8-13
삶의 위기 앞에서 l 창세기 4:1-16
중용(中庸) l 전도서 7:15-18
그리스도교 신앙의 요체 l 마가복음 12:28-34
당당히 걷는 삶을 보장하는 신앙 l 사도행전 3:1-10
삶의 위기 앞에서 성찰하는 신앙 l 로마서 5:1-5
그리스도 안에 그리고 우리 안에 새겨진 진실 l 고린도후서 1:18-22
2부 역사의 무게, 사건의 진실
무도(無道)한 상황에서 정도(正道)를 찾아 l 누가복음 2:22-40
인간의 길, 평화의 길 l 누가복음 19:41-48
칼을 쳐서 보습으로 l 이사야 2:1-5
애초 분계선은 없었다 l 사도행전 16:23-34
꿈은 제재하지 못한다 l 에스겔 37:16-17; 요엘 2:28-29
민중의 노래, 부활의 노래 l 사무엘상 2:1-10
불편한 진실을 딛고 일어서야 l 요한계시록 6:9-11
3부 파국 가운데 지속되는 삶의 희망
고통에의 공감과 연대 l 욥기 21:1-6
아니, 지금 당장 l 시편 54:4; 욥기 21:19-22
시련과 고난이 주는 뜻 l 이사야 42:1-9
인간의 진정한 삶을 보장하는 길 l 예레미야 9:22-24
파국 가운데서도 지속되는 삶의 희망 l 창세기 8:18-22; 9:12-17
예수 그리스도를 반기고 따르는 삶 l 마태복음 2:1-12
믿음의 기적 l 요한복음 4:46-54
4부 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 마음, 차별 없는 세계
말씀, 사건의 진실 l 여호수아 3:5-11, 17
빼앗길 수 없는 삶과 노동 l 이사야 62:6-9
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 마음 l누가복음 15:1-7
처음 온 사람이나 나중 온 사람이나 l 마태복음 20:1-16(8-16)
복음의 진실, 차별 없는 세계 l 사도행전 10: 27-36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보일 때까지 l 빌립보 3:1-14
차별금지, 사랑이 이깁니다! l 야고보서 2:1-13
5부 탈 · 향(脫 · 向)
격랑의 한가운데서 l 마태복음 14:22-33
탈 · 향(脫 · 向) l 창세기 12:1-4
치명적인 유혹 l 민수기 21:4-9
예수님의 정공법 l 마태복음 8:18-22
생명을 위한 자각적인 선택 l 요한복음 12:20-26
위대한 순간, 바울의 전향 l 사도행전 9:1-19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것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l 고린도후서 6:1-10
성문 밖 구원의 길 l 히브리서 13:12-16
6부 새로운 세계, 새로운 인간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l 출애굽기 13:20-22
진정으로 풍요로운 삶 l 이사야 55:1-5
내 마음이 맑아야 l 누가복음 6:36-42
하늘의 삶을 누리는 사람들 l 누가복음 10:17-20
하늘이 열리고 영이 내려와 l 마태복음 3:13-17
미친 상상력 또는 유쾌한 상상력 l 요한복음 8:54-59
종교의 한계지점에서 시작되는 새로운 삶 l 로마서 7: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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