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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혹이 기승하는 오늘날, 불안에 잠식당한 일상. 우리 마음속 묵직한 근심을 빛 한가운데로 내오는 책이 출간되었다. 1985년 사순절 기간에 헨리 나우웬이 매사추세츠 주 케임브리지의 세인트폴교회에서 했던 총 여섯 번의 강연을 엮었다. ‘불안의 시대를 사는 법’이라는 주제로 펼친 이 강연록은 그가 끝까지 예수님의 가르침을 붙잡고 이웃을 향한 연민을 잃지 않으며 투명한 삶을 살 수 있었던 비결을 잘 보여 준다.
상처 입은 치유자, 실천하는 영성가의
순도 높은 메시지
당시는 나우웬의 인생에서 앞길이 불투명하던 시기였다. 2년 전 그는 오랜 각고의 분별 끝에 페루의 선교 활동을 중단하고 귀국한 터였다. 남미로부터 그가 교수직에 몸담고 있던 명문 하버드의 신학부에까지 고립감과 불안감이 그를 따라왔다. 게다가 대학의 야심찬 경쟁적 분위기마저 그러잖아도 팽배해 있던 그의 외로움과 초조함을 더 부추겼다. 이 강연이 이토록 생동감 넘치는 이유는 나우웬에게 이 주제가 이론이 아니라 더없이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이듬해, 결국 나우웬은 세계적인 명문대 교수직을 떠나 한 발달장애인 공동체를 섬기는 자리로 인생길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기에 이른다. 강연 준비 차 예수님을 따르는 삶의 의미를 탐색하다가 자신의 진로가 정해진 셈이다.
어수선한 시대 한가운데서
예수의 사람으로 산다는 것에 대하여
‘예수가 필요한 나’의 현실 속 제자도
지금 여기서 예수를 따르는 용기 있는 한 걸음!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가? 사실 그분을 따르기보다 그저 헤맬 때가 많다. 살기보다는 살아지는 느낌으로 여기저기 헤매는 일상은 뼛속까지 피곤하다. 마치 곡예사처럼 공중에 많은 공을 띄워 놓고는 어떻게든 떨어뜨리지 않으려 애쓰는 삶 말이다. 그러다 지쳐 손 놓고 주저앉아만 있는 이들도 피곤하기는 마찬가지다. 실존적 피로다. 아무것에도 의욕이 없다. 이렇듯 불안과 권태로 얼룩진 우리 일상에 예수님이 오셔서 부르신다. “나를 따르라.”
이 책은 그분의 이 사랑의 음성을 듣도록 우리를 돕는 길잡이다. 이 책에서 나우웬은 그리스도인의 소명과 목적, 두려움과 소망에 대해 설득력 있게 풀어냈다. 아울러 우리에게 확신과 믿음으로 가는 길, 좁고 힘들지만 궁극적인 만족이 있는 그 길을 헤쳐 나가는 따스하면서도 실용적인 지혜들을 전한다. 이 책은 좋아 보이는 것들로 자신의 실상을 포장해 보려 하지만 실은 사는 게 고단한 사람들의 숨은 마음을 진리로 위로하고 격려한다.
예수님을 따르면 인격의 가장 깊은 곳인 우리의 마음이 그분께로 다가간다. 주님을 따르는 삶은 내 내밀한 자아와 깊이 관계되는 일이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분의 영과 빛과 마음 안에 살되 또한 나의 영과 빛과 마음으로 산다는 뜻이다. 수동적 모방자가 아니라 각자의 고유한 소명과 부름을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발견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자기만의 고유한 모습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성육신하게 해 드린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예수님이 그분의 고유한 삶을 사셨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삶을 진실되게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우리의 자아를 그분께 내어 드리고 예수님이 보여 주신 사랑의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다.
<60-61쪽 중에서>
세상의 사랑은 거래다. 사랑이 거래다 보니 사람들이 늘 문제에 빠져 허덕인다. 그들은 자신이 준 사랑에 대해 보답이 돌아오기를 바란다. 바로 이 지점에서 갈등과 적의와 분노와 질투와 원한과 복수심이 싹튼다. 인간의 모든 혼돈은 사랑을 거래로 보는 데서 비롯된다. …(중략)… 우리가 기도함은 자신이 온전히 사랑받는 존재임을 머리로만 아니라 존재의 중심과 마음으로 알기 위해서다. 그래서 기도한다. 기도하면 이 세상 어디를 가더라도 욕구에 찌들거나 남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을 수 있다. 사랑을 베풀되 보답을 바라지 않을 수 있다. 기도할 때 우리는 자유로워진다.
<74-75쪽 중에서>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음은 내 심연의 자아가 처음 사랑을 만났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도 없고 한계도 없다. 우리는 관계를 맺을 때 상대방도 그 처음 사랑으로 사랑받는 존재임을 인식해야 한다. 처음 사랑이 성육신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다. 그래서 이 사랑은 우리를 불러 세상에 하나님의 새로운 집, 새로운 공동체, 새로운 거처를 함께 지으라고 한다. 그것이 바로 결혼이고 우정이고 공동체다. 사람들 사이의 참된 관계는 하나님을 가리켜 보인다. 우정이든 결혼이든 공동체든 성경이 말하는 관계란 구성원마다 자신이 그분의 사랑에 속해 있음을 깨닫는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각 개인이 품기에는 너무나 크다. 그래서 함께 그 사랑을 가리켜 보이는 것이다. 관계의 지향점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우리를 품으시는 더 큰 사랑이다.
<78쪽 중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란 우리가 걷는다는 뜻이다. 말하고 살고 관계를 맺는 주체는 우리 자신이다. 우리가 고민하고 노력해야 한다. 어떤 면에서 예수님은 우리 여정 가운데 있는 역경을 없애 주지 않으신다. 감히 말하건대 예수님을 따르면 모든 것이 변하면서도 모든 것이 그대로다. 잘 알다시피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제자)에게도 인생이 처한 현실은 똑같다. 제자라 해서 삶이 더 쉬워지지 않는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오히려 더 힘들고 고통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특별한 힘을 얻는다. 더는 외로이 홀로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삶의 고뇌와 씨름과 고통을 마치 아무도 돌보는 이 없는 고아처럼 더는 홀로 감당하지 않는다. 사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 그분의 길을 걷는다는 뜻이다. 이 어둡고 깨어진 고통의 세상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길을 보여 주신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우리를 속속들이 아시는 그분과 동반자로 살아간다는 뜻이다.
<91쪽 중에서>
흔히 우리는 가까이에 있는 십자가가 아닌 자꾸만 먼 곳에 있는 십자가를 지려 하는 것 같다. “그 사람이 오늘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큰일은 아니지만 서운한 감정을 느낀다. 이러한 감정을 부정하지 않고 오늘 내가 져야 할 작은 십자가로 고백한다.” “친구에게서 연락이 없었다. 마음의 상처가 된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이 상처를 무시할 필요는 없다.” 정말 놀랍게도 이런 작은 씨름을 볼 수만 있어도 우리는 서서히 내면의 집으로 돌아와 평정을 되찾는다. 더 무서운 일이 벌어질까 봐 겁내지 않는다.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이미 자신의 씨름을 인정해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너희 십자가를 지라”라고 말씀하신다. 십자가를 일부러 만들어 내거나 애써 찾아다니라 하지 않으시고 그저 십자가를 지라고 하신다. 이는 자신의 고통을 들여다볼 용기를 가지라는 말씀이다.
<106-107쪽 중에서>
두려움 때문에 인간은 안전에 집착한다. 우리는 대개 모험을 통해 활기를 얻기보다 차라리 좀 불행하더라도 안전한 쪽을 선호한다. 불평을 위안처럼 삼는 이들도 있다. “잘 지내나요?”라는 물음에 그들은 이렇게 대답한다. “그런 대로 괜찮지만 불만이야 늘 있지요. 그러니 내가 마냥 잘 지낸다고는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는 불평으로부터 이상한 유의 만족감을 얻는다.
우리는 타인이든 자신이든 건강의 문제든 혹은 다른 어떤 부분에서든 부정적으로 말하는 데 익숙하다. 우리는 여럿이 둘러 앉아 불평과 교묘한 험담을 나누며 일말의 안도를 느낀다. 이런 식이다. “상황이 좋지 않군. 어차피 앞으로도 좋은 날은 없을 테니 세월이나 가라지. 세상이 이러니 우리도 늘 힘들 수밖에 없지 않겠어?”
우리는 안전이 제일이라서 움직일 마음이 없다. “무리하지 말고 그냥 현상 유지나 하자. 어차피 더 나아질 것도 없으니 현실을 봐야지.” 이렇듯 우리는 두려울 때면 자꾸 안전을 택한다. 생각해 보면 안전을 택하는 일은 개인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서도 마찬가지다. 알고 보면 세상의 안전 집착은 두려움과 맞물려 있다.
<129-130쪽 중에서>
예수님이 주시는 기쁨의 경험은 행복이 아니며 단순히 고조된 감정도 아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기쁨은 세상의 그것과 다르다. 예수님의 기쁨은 결코 슬픔과 단절되어 있지 않다. 세상은 참 이상해서 우리가 경험하는 슬픔과 기쁨을 불행과 행복이라는 두 가지 감정 상태로 나눈다. 이런 식이다. “세상에는 슬픔이 너무 많아서 우리가 살아남으려면 그 사이사이에 행복한 순간이 필요하다.” 술을 마시는 시간처럼 말이다. 세상은 말한다. “우리의 슬픔을 잊기 위해 약간의 행복을 만들어 내 보자. 인생이란 본래 슬프고 우울하고 비통한 것이니 잠깐이라도 일부러 행복해져야 한다.” 많은 상업용 제품들이 이런 생각과 연결되어 있다. 기업마다 당신에게 잠깐의 행복을 느끼게 해 줄 소소한 상품들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한순간의 행복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기쁨이 아니다. 기쁨은 틀에 박힌 상태와 뿌리가 없는 상태 사이에 낀 어느 적당한 중간 지점이 아니다. 기쁨은 그런 것이 아니다. 기쁨은 무거운 삶의 짐에서 잠깐씩 해방되는 것도 아니고 세상의 문제를 외면하는 도피처도 아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기쁨은 영적 차원이다. 그저 감정이나 육체적 상태가 아니라 영적 선물이다.
<135-136쪽 중에서>
우리 삶의 가장 큰 유혹 가운데 하나는 삶을 앞당겨 살라는 속삭임이다. 세상은 우리로 하여금 진짜 중요한 일은 다음 주, 다음 달, 내년에 벌어진다고 믿게 만든다. 그리스도인 앞에 놓인 도전은 의미 있는 일이 늘 지금 바로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믿는 것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이다. 현재에 충실하면 미래는 자라나게 되어 있다. 미래는 우리 앞에 저절로 드러난다. 우리가 이미 성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미 우리는 영생의 시작을 받았고 하나님의 집에 와 그분의 숨결을 호흡한다. 그러니 그 자리를 지키며 귀를 기울이자. 우리는 복음서에서 “인내”라는 놀라운 단어를 만난다. 인내란 현재의 자리에 온전히 머물며 순간에 충실하고,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이 이곳에 있음을 믿는다는 뜻이다.
<162-163쪽 중에서>
기도를 통해 하나님이 지금 여기 우리 안에 계심을 알면 알수록 다른 이들에 대한 주의력도 깊어진다. 자아에 덜 함몰되어 자신에 대한 염려가 줄기 때문이다. 자기 일로 염려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더 또렷이 보인다. 그들의 고민과 아름다움과 친절이 보인다. 그들이 내게 상처를 주려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 문제를 안고 있음도 보인다. 우리는 성령의 임재 안에 있기에 훨씬 온유해지며 다른 이들의 삶도 고달프다는 것을 깨닫는다.
<169쪽 중에서>
섬김은 결과를 얻어 내려는 행위나 세상을 구원하려는 초조한 욕구가 아니다. 우리는 변화가 보장된다는 조건 때문에 섬기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랬다가는 자칫 극단으로 흐를 수 있다. 누군가를 돕거나 이런저런 일을 할 때 사람이나 세상이나 나라나 정치나 사회 환경을 변화시키려는 것이 유일한 관심사라면, 즉 변화가 섬김의 조건이라면 우리는 금세 원망으로 가득 찰 것이다. 반면에 섬김이 이미 누리고 있는 사랑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라면 너무 무리하지 않고도 홀가분하게 변화에 참여할 수 있다. 섬김은 당신 안에 주어진 선물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려는 표현이다. 어떤 면에서 섬김은 감사의 행위다.
<170-171쪽 중에서>
CHAPTER 1. 초대 – “와서 보라”
‘나의 길’을 떠나 ‘예수의 길’에 들어서다
CHAPTER 2. 부름 – “나를 따르라”
익숙한 두려움에서 일어나 믿음의 한 걸음을 내딛다
CHAPTER 3. 도전 –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
충만히 사랑받고 자유로이 사랑하게 되다
CHAPTER 4. 대가 – “너희 십자가를 지라”
답 없는 내 실상을 예수 십자가에 잇대다
CHAPTER 5. 보상 –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으리라”
마음이 시린 날에도 ‘생명의 하나님’을 누리다
CHAPTER 6. 약속 –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예수와 ‘지금 여기’를 오롯이 살아 내다
엮은이의 말
감사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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