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2장에 기록된 창조에 대한 설명의 비유적인 특성을 보여주는 또 다른 예는 창조에 대한 이교적인 개념들에 대한 비판 및 그 개념들과의 상호 작용으로 함께 나타납니다. 그것은 바로 창세기 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는 아담의 창조에 대한 설명에서 발견됩니다. 에누마 엘리쉬는 사람이 흙과 악마 킨구의 피로부터 창조된 것으로 묘사했음을 기억하십시오.
성경과 고대 근동의 기록들 사이의 유사점과 차이점이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즉 성경이 이렇게 비슷하면서도 차이점이 있도록 기록하는 방식은 사람은 악마적인 것과 결부되어 있고 그래서 본질적으로 악하고 저급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고 보는 바벨론의 창조 이야기를 부인하는 방법입니다. 바벨론의 창조 이야기와는 대조적으로 사람이 하나님의 생기로부터 창조되었다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심오한 이해를 나타냅니다. – 28p
애석하게도 우리가 제2장 타락에서 보게 되는 것처럼, 죄는 하나님의 창조와 그분의 창조물들, 특별히 사람을 망가뜨렸습니다. 따라서 신약성경이 예수님이 재림하신 이후의 장래 모습을 묘사하기 위하여 새로운 창조의 언어(사 65:17 66:22을 볼 것)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특히나 흥미롭습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계 21:1)”.
하늘과 땅에 대한 새로운 창조를 말하면서, 성경의 저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가 파괴될 것이라는 관점에 대하여 경고합니다. 우주는 파괴되지 않고, 새롭게 변형(transform)될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에 따르면 하나님이 옛 것을 새로운 창조로 변형하시는 일은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고린도후서 5:17(또한 갈 6:15)을 보십시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 34p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던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는 우리 모두가 하는 일들이 무엇인지 잘 보여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따르기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자리에 우리만의 도덕적 잣대를 대신 채웁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망가졌고 우리의 세상은 분열되었습니다.
관계가 이처럼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일을 하긴 하는데 늘 허무하고 공허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왜 우리는 서로를 경시할까요?
창세기 3장에 따르면 이러한 우리의 고민들에 대한 정답은 바로 우리 인간의 죄 때문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창세기 3장의 내용은 거기서 끝이 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것을 배웠지만, 우리는 또한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과 화목을 위하여 여전히 일하고 계심을 보게 됩니다. -53p
요셉은 자신의 삶을 통찰하면서 자신의 삶에 일어난 끔찍한 일마저도 선으로 바꾸는 하나님의 역사를 분명히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안타까운 일들에 대하여 어떠한 설명이나 해명도 듣지 못한 채 무덤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고난은 무의미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무덤 너머로 확장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종말론적(미래지향적인)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의 관점은 제한적이고 한계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에 따르면,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고전 13:12)입니다.
미래의 관점에서 볼 때에야 비로소 우리의 삶은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아니지만 대부분이 자신의 삶을 회고한다고 가정해보면, 우리가 보기에 악한 사건이라고 생각되었던 것들이 결국에는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임을 보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광의적인 측면에서 요셉이 자신의 삶 속에서 경험하였던 하나님의 진리를 조금이나마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장차 다가올 그때에 우리 모두는 우리의 삶 속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105-106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