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바울은 어떻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목숨까지 걸 수 있었을까? 이유는 분명하다. 배신자요, 행악자인 자신을 만나주셨던 예수님에 대한 경험 때문이다. 다메섹 도상에서 태양보다 강렬한 빛으로 임하신 주님께 사로잡힌 은혜와 기적의 경험 때문이다. 그 경험으로 바울은 힘든 위기의 순간마다 다시 새 힘을 얻어 주님을 담대히 전하는 삶을 살았다.
– p.35 나를 바로 알기_<그리스도인의 경험> 중
하나님이 용서하셨음에도 그 용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마음은 불신앙이다. 죄에 민감해지라는 말씀은 지금 죄와 맞서라는 말씀이시지, 과거의 오만가지 죄까지 다 끄집어내서 괴로워하라는 말씀이 아니다. 죄의식의 노예가 되면 하나님의 용서가 안 믿겨진다.
– p.51 나를 바로 알기_<죄의 빗장을 풀어라> 중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났다.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으로 새롭게 태어난 것을 말한다. 그분은 우리를 수단으로 삼으시는 분이 아니다. 그분에게는 우리가 목적이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그분 자신이 수단이 되신 분이다. 그렇게 우리를 낳으셨다.
– p.75 나를 바로 알기_<낳으신 분 낳은 자> 중
우리는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들이다. 그러니 우리가 하는 노력들로는 관계를 회복할 길이 없다. 이것을 먼저 인정해야 한다. 오직 하나님께서 가없는 은혜로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심으로 관계가 회복된 것이다. 이런 회복된 관계 안에서 내가 만나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용서하는 삶, 이것이 바로 의로운 삶이고 의로운 행위이다.
– p.96 나를 바로 알기_<하나님의 빛으로> 중
사랑이신 하나님은 전능한 능력으로 아무 때나 당신이 원하시는 때 내려와서 세상을 헤집고 무책임하게 다시 올라가시는 분이 아니다. 그분은 저 하늘 위에서 인간의 희생만 받아 잡수시는 분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분의 이름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 한 가운데 오셔서 우리가 힘들어할 때 같이 눈물 흘리신다. 세상에 나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나를 품고 사랑하신다.
– p.108 하나님은 사랑이시라_<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중
기독교인으로서의 삶은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나와 세상을 죄로부터 구원하실 구세주이심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유식한 말로 ‘영접’이라고 한다. 그리스도 예수를 맘속에 모셔 들이는 것이다. 그런데 구원의 길은 영접하고 멈추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고 영접하여 하나님 안에 거하게 되었으면, 이제 하나님과 함께 걸어야 한다.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 이것을 다른 말로는 ‘동행’이라고 한다.
– p.126 하나님은 사랑이시라_<하나님의 아들, 예수> 중
하나님과의 사귐을 위해서는 죄의 담을 무너뜨려야 한다. 혹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데 어떤 담이 있는가? 그렇다면 십자가를 의지해야 한다. 그 위대한 십자가의 사랑으로 모든 담이 무너지면, 그때 시작되는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이 우리의 삶을 행복으로 가득 채 울 것이다. 십자가의 보혈은 악랄한 살인마의 죄도 무너뜨릴 능력이 있다. 십자가 아래서 무너지지 않는 죄의 담은 어떤 것도 없다.
– p.153 하나님은 사랑이시라_<하나님과의 사귐> 중
그분의 생명의 빛이 비춰지면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는다. 물질은 물질의 자리로 돌아가고, 건강도 제 자리를 찾는다. 그분의 빛 아래에 있으면 근심하는 문제가 오히려 인생을 깨닫게 하시는 또 다른 은혜가 된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할 때 주시는 기쁨이다.
– p.174 이웃을 나 자신과 같이_<세상을 등에 지고 십자가로> 중
교회에 손가락질 하며 비아냥거리는 사람들은 교회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살아있는 유기체이다. 때문에 다칠 수도 있고, 아플 수 있다. 교회가 아프면 붙들고 눈물을 흘리며 회복을 꿈꾸어야 한다. 그게 사랑이다.
– p.217 이웃을 나 자신과 같이_<누가 적그리스도인가>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