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가 고른 선물을 보면 그가 그 선물 속에 자신의 취향을 반영했는지, 아니면 받는 사람의 기호를 고려해서 그가 좋아할 물건을 애써서 골랐는지 금방 알 수 있다. 내가 아는 어떤 부부는 남편이 애연가인데 담배 파이프를 하도 사들인 덕분에 상당한 파이프 컬렉션을 갖고 있었다. 해마다 남편은 아내의 생일이면 자기의 “파이프 컬렉션을 더 풍성하게 하기 위해서” 새로 나온 오리지널 파이프를 아내에게 선물하곤 했다. 물론 아내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전에 없이 희색이 만면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엊그제가 제 생일이었는데 남편이 글쎄 향수를 선물하는 게 아니겠어요. 도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니까요.” (_26, 27쪽)
그렇다, 자기의 내밀한 부분을 열어볼 수 있게 하는 특권을 주는 것, 이것이 바로 우정의 가장 고귀한 징표다. 이는 “인격적” 선물, 다시 말해 인격이 그 속에 개입하는 선물인 것이다. 우리는 이미 어린아이에서 이런 선물을 본다. 자신이 부모에게 예속되지 않은 고유의 인격적 존재이고 자기만의 개인적 삶이 있음을 의식하기 시작하면, 아이는 부모에게 감추는 비밀을 친구에게는 믿고 털어놓는다. 부모는 아이가 선택한 존재가 아니다. 이 시기가 될 때까지 아이의 인생은 부모의 인생과 뒤섞여 있었고, 아이는 부모에게 비밀이랄 것이 전혀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이제 아이는 한 친구를 선택했고, 부모에게는 말하지 않는 일들을 그 친구에게 털어놓는다. 이런 인격적 선택을 통해 사람은 자기 존재를 뚜렷하게 드러낸다. 인격체의 본질적 특권이란,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어떤 일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_66쪽)
작은 기쁨에 도취됨으로써 자기를 피해가는 더 큰 기쁨에 대한 갈망을 가라앉히는 것이다. 하지만 미래에 올 더 크고 신비하며 최종적이고 완전한 행복의 형상이, 이 작고 불완전한 선물들이 주어지는 과정의 끝에 윤곽을 드러내며, 이 과정에 의미를 부여한다. 다시 말해 아주 보잘것없는 선물일지라도 각각의 선물은 저마다 사랑의 상징인 것이다. 이 상징 속에서 우리는 사랑이, 우리 모두가 기대하는 절대적이고 총체적인 사랑, 환멸을 주지 않는 사랑이 반드시 존재함을 기억한다. 하루하루 받아 누리는 작은 기쁨 속에서 우리는 이 사랑이 다가오는 예감을 찾는다. 날마다 조금씩 분할 지불을 하면 최종적인 완불에 이를 것처럼 말이다. (_101쪽)
지금 주고받을 수 있는 선물이 얼마나 상대적이고 제한적이며 불확실한지를 우리는 깨닫는다. 가장 아름다운 선물일지라도, 가장 값비싼 선물일지라도, 가장 진실된 선물일지라도 말이다. 우리는 누군가에게서 받은 것을 모두 다 잃을 수 있다. 사람이 사람에게 주는 사랑은 언제라도 부인될 수 있다. 또한 사람이 사람에게 주는 선물은 결코 다른 이면적 동기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상대방을 지배하고자 하는 욕구, 교만, 이득을 얻고자 하는 마음에서 선물을 줄 수도 있다. 선물에 대한 인간의 갈망이 끈질기게 지속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미 받은 불완전한 것을 보완하고 확실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늘 새로운 선물이 필요하다. 우리에게 이런 사라지지 않는 욕구가 있다는 것은 하나의 신호다. 즉 그칠 줄 모르고 반복되는 이 욕구는 최종적 결말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우리 모두가 혼란 가운데서도 열망하고 있는 그 결말을 향해서 말이다. 우리는 절대적으로 불변하는 사랑, 절대로 요동하지 않는 사랑을 찾고 있다. 선물에 대한 인간의 보편적 갈망은 곧 하나님을 찾으려는 열망과 다르지 않다(사람에 따라 이 하나님을 다른 어떤 이름으로 부르든 간에 말이다). 왜냐하면 만물을 만드시고 만물의 주인 되시는 그분만이 우리의 감사 외에 다른 어떤 반대급부도 요구하지 않으면서 그 만물을 우리에게 줄 수 있기 때문이다. (_102, 10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