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책감은 우리 일상 생활의 조미료이다.
모든 가정 교육은 죄책감을 철저하게 길러 준다. 특히 자녀들의 도덕적인 훈련을 염려하고 그들이 성공한 인생을 살기를 간절히 원하는 부모들이 행하는 가장 훌륭한 교육일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이런 교육에는 무엇보다 책망이 포함된다. 비록 그것이 사려 깊은 무언의 책망이라 할지라도 모든 책망은 죄책감을 제시한다. “그런 짓을 하다니 창피하지도 않니?”
20세기 초의 이러한 가정교육은 아이들을, 야단맞지 않고 품행이 바르며 사교적인 매력을 잘 갖춘 진열장 안의 인형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었다. “주일만 생각하면 진저리가 나요” 내면적 억압으로 충분히 성숙하지 못한 한 여성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어렸을 때 언니와 나는 주일엔 가장 좋은 옷을 입어야 했어요. 풀을 먹여 빳빳한 레이스가 달린 치마를 입고, 매기도 어려운 복잡한 나비 모양 리본으로 머리를 묶어야 했지요 옷을 더럽히기라도 하는 날엔 실컷 야단을 맞았고요! 하지만 이런 일은 우리가 아무리 조심해도 항상 일어났어요 그래서 야단맞고 벌받는 걸로 하루가 끝나버리곤 했죠.”
얼마 전 나는 함께 식사하던 아내가 갑자기 이상한 미소를 짓는 것을 보고 그 이유를 물어 보았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보세요, 나는 버터를 이쪽 끝에서 잘라냈는데 당신은 다른 쪽 끝에서 잘라냈어요. 문득 내가 어릴 때 그렇게 행동했더라면 무슨 말을 들었을지 생각해 봤어요. 아마 ‘제대로 교육받은 아이라면 이미 잘린 쪽에서 버터를 잘라야 한다’는 말을 들었겠지요. 당신의 행동은 자유를 찾기 위한 몸부림 같았다고요!”
오늘날의 가정교육은 이와는 매우 다르다. 자유의 바람이 요람까지 불고 있다. 심리학자들의 영향으로 지나치게 세심한 과거의 가정교육은 더 이상 환영받지 못한다. 그러나 비슷한 문제는 여전히 존재한다. 요즘 부모들은 아이가 소란을 피우거나 개성을 드러내면 자랑스러워한다! 만약 아이가 개성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하거나 부모가 자랑스러워할 만한 특별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면 그 아이는 야단을 맞는다.
제대로 양육받은 아이의 유형이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부모의 친구들은 그 부모의 아이를 잘못 양육받은 아이로 판단하기 일쑤다. 아이는 부모가 느끼는 불가피한 두려움 – ‘사람들이 과연 뭐라고 말할까?’-을 감지한다. 부모의 사회적 평판은 위태롭게 되고 그에 대한 책임감이 아이를 무겁게 짓누른다. 아이는 자신이 부모에게 창피를 주거나 자신에게 부모가 자랑할 만한 특별한 재능이 없을 때 죄책감을 느낀다.
학교에서 좋지 않은 점수와, 그것을 부모님께 내보여야 할 순간에 대한 불길한 생각 때문에 아이의 어린 마음은 죄책감으로 가득 찬다. 이것은 하나의 강박 관념이 되어 아이로 하여금 부정 행위를 하게 만들고 진정한 죄책감의 근원이 될 수도 있다. 사실 교사들은 종종 성적표를 작성할 때 아이의 좋은 점보다는 잘못에 더 많이 주의를 기울이는 경향이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맞춤법에 자신이 없어서 평생 편지 쓰는 것을 꺼리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아버지나 엄한 선생님을 떠올리게 하는 권위를 접하면 어쩔 줄 모르고 얼어붙어 버리는가! 심지어 관공서에서 자신이 작성한 서류를 말단 공무원에게 건네 줄 때도 떠는 사람이 있다. 게다가 그 직원은 서류를 얼핏 보고는 빠뜨린 항목을 지적하며 “이것도 못 읽으세요?”라고 말한다.
정말 심각한 것은 부모나 교사가 그들 자신의 편견이나 문제, 죄책감을 교육에 그대로 투사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자신의 성적인 행동을 몹시 자책하는 사람들은 아이들에게 그 마음 가운데 성적 충동에 대한 진정한 두려움을 일깨우는 극적 함축이 담긴 교훈적 충고를 하게 된다.
불행한 부모일수록 아이를 너그럽게 대하고 아이의 원기 왕성함을 묵인하기가 어렵다. 이들은 하루에 수백 번씩 이런 말을 연발할 것이다. “바보같으니라구! 너는 도대체 돼먹지 않았어!” 딸에게 전문적인 보살핌을 주어야 할 부담을 느끼는 아버지는 별것 아닌 일로도 딸에게 화를 낼 것이다. 또한 남편에게 기만당한 아내는 자기도 모르게 아들에게 분풀이를 하거나 하찮은 일로도 “너는 아빠와 같은 거짓말쟁이로구나!”라며 아들을 호되게 꾸짖을 것이다. 그 아이는 직관적으로 이 부당한 비난의 짐을 불안이라는 형태로 느끼게 될 것이다.
사울은 다윗과의 우정에 대해 요나단을 꾸짖는다. “패역 부도의 계집의 소생아, 네가 이새의 아들을 택한 것이 네 수치와 네 어미의 벌거벗은 수치됨을 내가 어찌 알지 못하랴?”(삼상20:30) 마치 아버지인 자신은 그것과 아무 상관 없다는 듯이 “네 어미의 벌거벗은 수치 됨”이라고 말하는 한 교활한 발뺌을 주목하라.
그래서 많은 부모들은 순수한 질투 때문이 아닐 경우에는 사회적 편견 때문에 아이들이 친구를 사귀는 데 죄책감을 느끼게 만든다. 아이들은 두 가지 죄책감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 친구에게 충실하면 부모에게, 부모에게 복종하면 친구들에게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다. 아이들은 친구와의 비밀스런 우정을 포기하지 않는 한, 이에 대한 죄책감의 짐을 지게 된다.
용기 있는 아이라면 곧바로 부모에게 잘못을 털어놓을 것이다. 그 아이는 징계를 받고 상황은 정리되겠지만, 반면에 훨씬 예민하고 두려움 많은 동생은 감히 부모에게 고백하지 못할 것이다. 아이는 자신이 잘못한 것과 이를 숨긴 것에 대해서 이중으로 죄책감의 짐을 질 것이다. 이로 인해 아이는 도덕적 고립에 빠져들고 수치스러움 때문에 부모에게 사실대로 말하는 것을 항상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조만간 그 아이는 노이로제에 걸리든지 부모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자신의 의지와 취향과 성향을 따라 살아가든지 둘 중 하나의 상황에 처할 것이다. 자신의 아이가 이렇게 개체성을 깨닫는 것을 좋아하는 부모는 거의 없다. 거의 모든 부모는 부모가 싫어하는 것을 좋아하거나 부모가 허락하지 않는 일을 하거나 부모의 기대와 다르게 행동하는 것은 모두 잘못이라고 아이에게 주의를 준다.
사도 바울은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순종하라”(엡6:1)고 말한다. 경건한 부모들은 자녀들이 더이상 어린 아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순종을 요구할 때 이 말을 인용한다. 그러나 그들은 사도 바울이 즉시 덧붙이는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엡6:4)나 다른 곳에서 언급하는 “낙심할까 하노니”(골3:21)라는 말에는 그다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값없이 주어지는 기쁨과 예기치 않았던 선물을 가장 고맙게 여긴다. 성경은 값없이 주시는 구원에 대해 말할 뿐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선물-큰 것과 작은 것 모두-에 대해서도 말한다. 지나치게 엄한 가정 교육으로 고통을 겪어 온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성경은 자녀의 행복을 기뻐하시고 그들에게 기쁨 주기를 즐겨하시는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을 보여 준다.
다시 청소년기 이야기를 돌리면, 죄책감이 깃든 비밀스런 생활에 빠져 보지 않고 이 시기-부모로부터 독립하는 시기-를 통과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흥미진진한 책을 발견한 아이는 촛불을 켜 놓고, 그가 두려워하는 누군가가 올라오는 것을 경고하듯 삐걱거리는 계단 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우며, 밤늦도록 책을 읽어 내려간다. 혹은 그 재미있는 책을 문법책 위에 펼쳐 놓고 누군가 다가온다 싶으면 재빨리 책상 서랍에 밀어 넣을 만반의 준비를 한 상태에서 그것을 읽기도 할 것이다. 혹은 어른이 되어 가는 증거로 처음으로 몰래 담배를 피워 볼 것이다.
이와 같이 개체성의 형성은 바로 비밀을 가짐으로써 이루어진다. 한 아이가 부모가 모르는 자기만의 비밀이 전혀 없거나 부모가 모르는 비밀을 친구에게 털어놓을 수 없다면 그 아이는 자신이 부모와 구별되는 존재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한다. 부모는 보통 아이에게 그들이 모르는 비밀을 가져서는 안된다고 선언한다. 그들은 부모 몰래 무언가를 숨기는 것은 잘못이라고 여긴다. 그들은 “너는 우리 마음을 몹시 아프게 했어”라고 비통하게 말한다.
우리 모두는 끊임없이 비난에 둘러싸여 있다. 그 비난은 때로는 신랄하고 노골적이며 때로는 잠잠하다. 그러나 소리 없이 비난당한다고 해서 덜 고통스러운 것은 아니다. 우리 모두는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더라도 다른 사람들의 비난에 민감하다. 자기 확신에 차 있는 사람이 비난을 가장 잘 견뎌낼 수 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옹호하고 타인의 말에 반박하며 자신에 대한 비난에 맞서 타인을 비난하는데, 이렇게 되면 그들을 비난한 사람이 잘못한 것처럼 되어 버린다. “우리 언니는 자기 의견에 대해 너무 절대적이어서 언니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오히려 죄책감을 느끼게 돼요!” “점점 언니 집에 가기가 싫어져요, 언니 집을 나설 때면 언니는 으레 ‘뭐라구? 벌써 간단 말이야?’라며 비난하는 투로 말하기 때문에 죄책감이 들거든요”
자기의 주장에 대해 너무나 절대적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비난을 퍼붓는 사람들은 그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점을 주목하라. 그들은 다른 사람에게 의심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자신에게서 의심을 없애 버린다. 이와 같이 보통 강자는 약자에게 죄책감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자신의 죄책감에서 벗어난다. 더구나 약자는 늘 자신에게 불리하게 생각하는 법이다.
매우 꼼꼼한 어느 여성을 예로 들어 보자. 그녀는 이러한 자신의 특성을 해야 할 일을 매우 조심스럽게 하는 데서 드러낸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너무 꼼꼼한 것과 모든 일에 시간을 너무 많이 들이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낀다고 말한다. 알고 보니 그녀는 자신과는 상당히 다른, 무슨 일이든지 즉시 대충 서둘러 해치우는 어머니 밑에서 자라났다. 딸이 자신과는 달이 아주 꼼꼼한 것에 화가 난 어머니는 딸로 하여금 이에 대한 죄책감을 갖게 만들어서 자신이 일을 신중하게 처리하지 못하는 데 대한 죄책감을 없애 버리려 했을 것이다.
모든 사람은 제각기 남들과 다른 자기 자신만의 리듬을 갖고 있다. 사무실에서 빠른 속도로 타이프를 치는 타이피스트는 자기처럼 타자 속도가 빠르지 못한 다른 동료들에게 계속해서 죄책감을 심어 주며, 이러한 죄책감은 그들을 한층 더 마비시켜 버린다. 그러나 그것은 객관적으로 보아야 할 사실일 뿐이다. 타자 속도가 빠른 것이 특별한 장점이 아니듯 다른 동료들이 타자 속도가 느린 것도 책잡을 일이 아니다. 더구나 그녀가 아주 민감한 사람이라면 오히려 본의 아니게 동료들을 불쾌하게 했다는 생각에 죄책감을 갖고. 그들의 용서를 얻고자 이런저런 작은 일을 해주게 될 것이다.
오랫동안 지속되는 죄책감은 다른 사람의 행위나 단언, 비판, 경멸, 심지어 아주 부당한 비난 등으로 인해 계속해서 약자의 마음 속에 새겨지게 된다. 왜냐하면 반박에 반박이 거듭될수록 비난은 더 거칠어지고 더 공격적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바룩(Baruk)박사는 억압된 죄책감은 공격적 반응을 낳는다는 방어적 공격의 법칙이 보편적으로 나타남을 보여준다. 따라서 남편이 아내를 공격하면서 화를 내게 될 때, 그는 “내가 아내에게 무엇을 잘못했을까?”라는 질문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조금만 정직하게 생각한다면 그는 항상 그 답을 찾아낼 것이다. 아내가 남편을 대할 때 혹은 고용인이 고용주를 대할 때 그리고 그 반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비난뿐만 아니라 충고도 다른 사람을 깎아내릴 수 있다. 요구되지 않은 충고는 어떤 것이든 베일에 가려진 비난을 숨기고 있다. “내가 당신이라면 이런저런 식으로 할텐데”라는 말은 상대방의 행동 방식이 올바르지 않다는 점을 암시한다. 그래서 많은 열성적인 부모들은 훌륭한 충고로 아이들을 무력하게 만든다. 그들은 아이들로 하여금 스스로 올바른 행동 방식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고, 아이들 마음속에 자신이 부족하다는 생각의 씨앗을 심어준다.
제2부 비판의 정신
제7장 참된 죄책감과 거짓된 죄책감
제8장 누구나 비난을 한다
제9장 누구나 자신을 방어한다
제10장 죄책감의 단일성
제11장 비판은 파괴적이다
제12장 의사는 비판하지 않는다
제3부 반전
제13장 멸시받는 자의 방어
제14장 금기로부터의 해방
제15장 정신 분석과 죄책감
제16장 양심의 억압
제17장 죄책감의 각성
제18장 인간의 조건
제4부 반응
제19장 신적인 영감
제20장 모든 것에는 대가가 따른다
제21장 대가를 지불하시는 하나님
제22장 조건 없는 사랑
제23장 고백의 방식
제24장 멜기세덱의 반차
참고문헌
인명색인
성경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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