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방황 끝에 만난 예수는 나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왜 예수는 종교 이상인가? 왜 예수여야 하는가!
조정민 목사는 불교 집안에서 태어나 세상에서 성공가도를 달리며 열심히 살았다, 어릴 때부터 진리에 대한 갈급함이 있어서 여러 종교에도 심취했었다. 아내는 모태신앙인으로 오랫동안 그를 위해 기도했다. 그는 나이 47세에 새벽기도 가는 아내를 붙들러 교회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아내를 교회에서 구출하겠다는 각오로 출입을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되어 예수를 알게 되었다.
그는 성경 공부를 하면서 예수가 진리임을 깨닫게 되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성경을 읽을수록 그 믿음은 더욱 확고해졌다. 그는 섬기고 있는 베이직교회에서 인문학 강좌처럼 편하게 ‘왜 예수인가?’를 주제로 수요강좌를 시작했다. 바로 그가 고민하던 주제였다.
‘왜 예수인가? 왜 크리스천들은 예수만이 길이라고 고집해서 사람들을 답답하게 하는가?’
매주 하나씩 기도의 자리에서 받은 열두 개의 단어가 열두 번의 강좌가 되었고, 책이 되었다.
‘종교 이상, 노 마일리지, 자유, 기쁨, 사랑과 권력, 죄, 은혜, 고난, 거듭남, 제자, 십자가, 부활’ 등 열두 개의 키워드를 통해 왜 예수인지에 대한 답을 얻기를 바란다. 제대로 알아야 제대로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모든 크리스천과 교회는 다니고 있지만 경계선에서 방황하는 반(半)신자와 비신자 모두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다.
나는 앞에서 삶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세 가지 기준을 말했습니다. 종교 이상meta religion , 노 마일리지no mileage , 자유freedom입니다. 이제 삶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네 번째 기준을 이야기하겠습니다. 바로 기쁨입니다. 기쁨은 영어로 ‘joy’입니다. 나는 JOY를 ‘Jesus Overows You’라고 새롭게 의미를 부여하려 합니다. 뜻을 풀이하면 예수님이 우리 안에 흘러넘치는 것입니다.
인생에는 예수님이 아니어도 기쁜 일이 많습니다. 지난날 내가 술을 마신 것은 그것이 기뻤기 때문입니다. 사람들과 술을 마시며 어울려 노는 것이 즐거웠고, 술에 취해 갈수록 정신을 잃어 가고 횡설수설하며 헛소리하는 것이 일종의 일탈이 되어 즐거웠습니다. 평생 알고 지냈지만 좀체 속을 내비치지 않던 사람도 술에 취하면 한순간에 무장해제되어 자신을 드러냅니다. 금방 허물없는 친구가 됩니다. 골프는 또 얼마나 재밌는지 모릅니다.
나는 직장에서 승진도 해봤고, 주식 투자로 돈을 벌기도 잃기도 하면서 순간순간 기뻐했습니다. 많은 사람들과 어울려 여러 가지 잡기에 빠져서 기쁨을 맛보고 즐겼습니다. 그러나 돌아보면 그 즐거움은 정말 값싼 기쁨이었습니다. 너무 값싸기 때문에 너무 쉽게 빠져들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하찮은 기쁨에 만족하는 습관을 버릴 필요가 있습니다. 기쁨의 기준을 높일 필요가 있습니다. 인생의 기쁨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더 이상 어린아이들이 욕심 내고 갖고 싶어 하고 즐거워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에 전혀 다른 차원의 기쁨을 제공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미처 눈뜨지 못한,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의 세계로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p. 88-89
인생에서 만나는 고난 앞에서 우리는 이것이 누구로부터 온 고난인지, 이유는 무엇인지 신중하게 묻고 해석해야 합니다.
‘이 고난은 누구로부터 온 고난인가? 왜 왔는가? 이 고난을 어떻게 겪어 낼 것인가?’
그런데 무엇보다 고난을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영표 선수가 편파적인 판정을 일삼는 심판을 시합의 일부로 받아들였듯이 고난을 우리 인생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미 고난이 와 있는 걸 어떻게 하겠습니까? 거부하고 난리를 칠 게 아니라 일단 수용하는 것입니다.
부부가 사랑해서 아기를 낳았습니다. 아기를 키우는 일은 행복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자라서 머리가 굵어지면 여러 가지 사고도 일으킵니다. 자녀는 어떤 모양으로든 부모에게 고통을 안겨 줍니다. 그렇다고 부모가 자녀를 버립니까? 부모는 허구한 날 속을 썩이는 자녀라도 내 자녀로 받아들이고 함께 고통을 이겨 나갑니다.
열 달 동안 뱃속에 품은 아이가 태어나서 보니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부모가 자녀를 버립니까? 그렇더라도 내 아이로 받아들입니다. 부모니까 그럴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인간이 생각할 수 없는 방법으로 은혜를 주시는 놀라운 섭리입니다.
나는 고난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예수님이 고통을 겪으셨다고 믿습니다. 왜 예수님이 답입니까? 왜 예수님이 진리입니까?
결론부터 말하면, 예수님보다 더 고난을 겪은 사람이 이 세상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겪은 고난을 봐야 내 고난이 위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왜 석가모니나 마호메트나 공자와 같은 종교 창시자에 끌리지 않고 예수님께 끌렸는지 아십니까? 예수님이 나보다 더 많은 고난을 겪었으니까, 그분은 고난을 이해하니까, 그분은 고난을 해석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분만이 나 대신 고난을 겪었다고 주장하시고, 나는 그 주장에 동의하니까요. 왜 예수입니까? 고난받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신이 나 대신 고난받는다는 말은 어떤 종교에도 없습니다. 다른 신은 다 고고하고 초월적인 존재입니다. 인간의 고통과 상관이 없습니다.
그들에게 다가가려면 우리가 뭔가를 해야 합니다. 신 때문에 고통을 겪어야 신용이 쌓이는 겁니다. 모든 종교에서는 신에게 다가가기 위해 뭔가를 지불해야 하기 때문에 또 다른 고통이 가중되었습니다. 그 종교들은 모두 거래 시스템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주고받는 형태에서 못 벗어나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습니다. 내 죄 값을 지불했고, 나 대신 고난을 짊어지셨습니다. 예수님의 선포와 선언이 우리에게 클릭되어야 고난에 대한 모든 의문이 풀리기 시작합니다.
p. 198-199
예수님은 인생에 단 한 번이라도 랍비의 문하생이 될 생각도 없었고 또 손톱만큼도 그럴 자격이 없는 사람들을 부르셨습니다. 혹시라도 제자 삼아 달라고 찾아오면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단번에 거절해야 할 사람들을 예수님은 직접 찾아가서 “나를 따르라” 하신 것입니다.
나는 이 장면에서 숨이 턱 막혔습니다.
‘신은 인간을 찾아간다.’
인간과 깊은 관계를 맺기 원하는 신이 인간을 먼저 찾아간다는 사실을 그 순간 깨달았습니다. 내가 애써 찾지 않아도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신을 찾을 능력도 없습니다. 우리가 볼 수 없는 존재는 먼저 우리에게 다가와야 합니다. 그분이 진짜라면 우리를 초청해야 합니다. 불러야 합니다. 신이 유명한 랍비들처럼 많은 문하생 후보생들 중에서 제일 똑똑한 놈을 골라서 제자 삼는다면 나 같은 사람은 아무리 찾아가도 그를 따라갈 수 없습니다. 그분이 내게 와서 “나를 따르라”고 해야 나 같은 사람도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붓다는 샤캬 부족의 왕자였습니다. 왕자로 태어나 결혼도 했고 자녀도 낳았으나 스물아홉에 다 버리고 출가해서 서른다섯에 득도하여 80여 년을 돌아다니며 가르쳤습니다. ‘인생은 고통의 바다이니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유하라’가 붓다의 가르침이었습니다. 하지만 바닥 인생을 사는 사람들은 ‘내려놓으라’는 말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한 번도 제대로 가져 본 적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무엇을 내려놓을 수 있겠습니까?
내가 청담동에서 교회를 개척하니까 왜 하필이면 부자 동네에서 개척하느냐고 볼멘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부자들이 영혼은 더 가난합니다. 모든 걸 다 가졌는데 가난한 사람들이 바로 부자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들만 찾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사회 지도층도 만나셨습니다. 이들 중 하나인 니고데모는 나중에 예수님의 제자로 살기도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와서 “나를 따르라”고 부르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부르시는 음성을 들으면 ‘내가 예수님을 따라가야겠구나. 세상과 세상 사람들을 따라갈 게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가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듭니다. 이런 생각이 들도록 만드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런 까닭에 나는 평소에도 복음서를 열심히 읽으라고 당부합니다. 우리말이 이해 안 되면 영어로 읽어 보십시오. 영어도 이해가 안 되면 헬라어를 찾아서 읽어 보십시오. 헬라어 프로그램을 깔면 해석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뜻이 이해될 때 그 기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성경이 이해되고 깨달아지면 예수님이 우리를 향해 부르시는 “나를 따르라”가 귀에 들립니다. 그동안 귀가 막혀서 듣지 못하던 예수님의 음성이 또렷이 들립니다.
p. 236-237
사람들은 권력가와 재력가를 좇습니다. 그것도 충성을 다해 좇습니다. 그들을 대신해 감옥에 갈 각오로 좇습니다. 물론 먹고살 일은 보장을 받지요. 그러니까 권력가와 재력가를 목숨을 바쳐 좇는 이유는 돈 때문인 것입니다. 만일 감옥까지 가줬는데 먹고살 돈을 주지 않으면 그때부터 전쟁이 납니다. 어제까지 충실한 개로 살다가 오늘은 그들을 죽이려 드는 저격수가 되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면 먹고살 것을 책임져 주겠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십니다. 자기를 죽이고 따르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세상과 다른 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점을 분명히 알고 그분을 따라야 합니다.
주변 사람들이 교회를 가니까, 교회 가면 밥도 주고 사람들도 사귈 수 있으니까, 그 교회 다니면 사람들이 우리 가게에 와서 물건을 사줄 것 같으니까 따라가면 곤란합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을 누구라고 가르치는지, 또 예수님을 따라가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보고 예수님을 따라나설 것인가 말 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그리고 따라나서더라도 최대한 짐을 가볍게 해서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따르는 사람이 너무 많아지니까 갑자기 메시지를 바꾸셨습니다. 기적도 끊어 버리셨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이후 사람들이 벌 떼처럼 모여드니까 예수님은 한적한 곳으로 피하셨습니다.
군중은 부르지도 않았는데 따라왔습니다. 거기 가면 먹을 것이 생긴다더라, 병을 고쳐 준다더라 해서 쫓아왔습니다.
예수님은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니까 나중에는 이렇게 설교하셨습니다.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요 6:53-56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못 알아들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더러 식인종이 되라는 얘긴가?’ 하며 마음이 불편해져서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들도 가겠느냐?”고 묻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하고 대답합니다. 계속 따르겠다는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따르는 자에게 물질을 주겠다, 명예를 주겠다 약속하시지 않았습니다. 다만 나를 주겠다, 나를 마시고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살과 피는 생명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겠다고 하신 것은 생
명입니다. 그것도 영원한 생명eternal life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뭘 주겠다고 하셨는지, 그 의도가 뭔지 정확히 알고 따라가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목적은 생명을 얻기 위함입니다.
p. 244-245
1강 종교 이상(META RELIGION)_ 예수는 종교 그 이상이다
2강 노 마일리지(NO MILEAGE)_ 복음은 마일리지가 필요 없다
3강 자유(FREEDOM)_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자유롭다
4강 기쁨(JOY)_ 예수님이 흘러넘치면 기쁨의 삶을 산다
5강 사랑과 권력(LOVE AND POWER)_ 권력의지를 버리고 사랑의 길을 가라
6강 죄(SIN)_ 판단을 버리고 분별함으로 죄에서 벗어나라
7강 은혜(GRACE)_ 은혜를 경험하면 사랑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8강 고난(SUFFERING)_ 고난이 해석되면 더 이상 두렵지 않다
9강 거듭남(REGENERATION)_ 거듭나면 인생이 완전히 달라진다
10강 제자(FOLLOWER)_ 세상의 리더가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가 돼라
11강 십자가(THE CROSS)_ 세상을 이기는 유일한 비밀병기
12강 부활(RESURRECTION)_ 우리는 부활해서 다시 만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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