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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켈러의 인생질문 (Encounters with Jesus)

$28.00 $19.60

저자/역자 : 팀 켈러/윤종석  |  출판사 : 도서출판 두란노
발행일 : 2019-08-21  |  (140*206)mm 272p  |  978-89-531-3592-5
최고의 지성인들의 모임,
옥스포드와 하버드에서의
강의와 토론을 책으로 엮다.

삶의 의미를 찾고 싶었던 이들의
본질적인 물음과 예수님이 주시는
혜안의 답을 함께 들어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대면했던 사람들도 오늘의 우리와 똑같이 삶의 커다란 의문들에 부딪쳤다. 우리처럼 그들에게 전수되어 온 답도 현실 세계에 통하지 않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면서부터 모든 게 즉시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분은 해답을 주실 뿐 아니라 자신이 해답이 되셨다. 이 책에서 팀 켈러는 예수님 생애의 여러 중요한 사건과 만남이 어떻게 우리 자신의 삶까지 영원히 바꾸어 놓을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팀 켈러는 지성인의 집단인 옥스포드대학과 하버드클럽에서 이 주제를 놓고 강연과 토론을 할 기회를 얻었다고 한다. 이 책은 그때 강연을 기초로 했다. 그들은 누구보다 이성적이고 종교에 대해 회의적이었으며 마음의 공허를 채우고 싶어 했고 무엇보다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함께 성경에서,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사역에서 답을 얻었고 마침내 그것은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그후 팀 켈러는 자신의 부족한 말 주변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었던 질문의 답을 다년간의 강의와 연구로 채워 이 책을 완성했다.

요한복음을 통해 배우는 인생 질문과 예수의 대답
2012년 저자는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과 각 사람의 만남을 주제로 영국 옥스퍼드대학에서 강의를 하게 되었다. 그 자리에 참석한 이들은 이 시대 최고의 지성인들이었고, 누구보다 이성적이었으며, 대부분이 회의론자였다. 그들은 삶에 대한 의문으로 가득했으며, 그 답을 찾기 위해 길을 돌다 그 자리에까지 오게 되었다.

《팀 켈러의 인생 질문》은 모든 사람이 한번쯤은 해 봤을 법한 질문에 대한 답을 요한복음을 통해 찾는다. 요한복음의 예수님은 인생의 질문이 많은 이들을 만나셨고, 그때마다 개개인에게 맞는 혜안의 답을 주심으로 그들을 복음의 길로 인도하셨다. 회의론자였던 나다나엘과의 만남, 지성인이었던 니고데모와의 만남, 사마리아 여인, 마르다와 마리아와의 만남으로 가득 차 있다. 이들과 예수님의 만남들을 저자는 명쾌하고 설득력 있게 해석한다. 이는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을 막론하고, 삶의 질문으로 가득 찬 이들의 마음을 시원케해 준다.

예수가 진짜 답인가?
몸의 부활이 가능한 일인가?
왜 신이 죽어야만 했는가?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은 무엇인가?

기독교를 바라보며 갖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다.

이 책은 2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요한복음 속 예수님과 사람들의 만남을 통한 인생 질문과 답에 대한 이야기다. 2부는 기독교에 대해, 예수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물음과 그에 대한 답이다. 기독교인이지만, 제대로 알지 못했던 기독교의 진리, 듣고도 이해할 수 없어 마음 깊이 묻어 두었던 의문에 대한 답을 저자는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준다. 설득력 있는 논거와 문학, 철학, 대중문화 등 저자가 가진 힘을 총동원하여 종교적 관점을 제시해 주는 책이기에 비기독교인, 기독교인 모두에게 유익한 책이다.

나도 그러했다

나는 개신교인으로 자랐다. 하지만 대학 시절, 몸과 마음의 영적 위기를 겪으면서 하나님과 세상과 자아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신념에 의문이 싹텄다. 그 시절에 알게 된 몇몇의 기독교인들은 소그룹 성경공부에 열심이었다. 모임의 인도자는 교사나 강사 역할이 아니라 그룹 전원이 같은 성경 본문을 읽고 해석하도록 돕는 역할만 했다. 모임의 규칙은 단순했지만 활동이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반드시 규칙이 필요했다. 기본적으로는 성경이 사실임을 가정했다. 성경 본문이 믿을 만하고, 성경 저자들이 유능하다고 간주해야 했다. 또 본문에 대한 어느 한 사람의 해석을 강요할 수는 없고, 소그룹원이 다 함께 성경의 의미를 발견해 가야 한다. 개인보다는 함께할 때 훨씬 많은 것이 보인다는 전제하에 공동체로서 성경에 숨겨진 풍성한 비밀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나는 신앙이 어떤 상태인지 확신할 수 없던 때에 성경공부 모임의 인도를 부탁받았다. 성경공부 교재는 메릴린 쿤츠와 캐서린 셸의 Conversations with Jesus Christ from the Gospel of John(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과의 대화)였다. 교재는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과 개인의 13가지 대화 장면을 다룬다. 나와 소그룹원들은 그 책을 함께 공부하며 성경에 숨겨진 깊은 의미와 통찰을 찾아내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수님의 생애를 살펴보며 나는 성경이 보통 책이 아님을 절감했다. 성경에는 고대 문학의 아름다움이 잘 드러나지만, 그 이상의 감동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렇게 예수님과의 만남을 공부하며 성경에 감추어진 불가해한 생명과 위력을 느꼈다. 아득한 옛날의 대화들이 신기하게 지금의 내게도 날카롭게 적중했다. 그때부터 나는 지적인 자극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기 위해 성경을 탐구했다.

나는 인내와 깊은 사고가 통찰의 비결이라고 배웠다. 오래전 성경공부 인도자들을 위한 수련회에 참석했던 적이 있다. 그때 했던 활동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강사는 우리에게 마가복음 1장 17절을 제시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그는 우리에게 이 성경 구절을 30분 동안 살피기를 요청했다. 5-10분이 지나면 본문을 완전히 파악했다는 생각이 들 수 있겠지만, 묵상과 연구를 멈추지 말 것을 당부했다. 그리고는 “이 구절에서 보거나 배운 바를 최소 30가지 이상 기록해 보십시오”라고 말했다.
나는 10분 만에 기록하기를 끝냈고, 홀가분한 마음과 지루한 마음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의 당부에 따라 의무감에 본문을 살피자 놀랍게도 기록할 것이 더 있었다. 시간이 다 되어 모두 한자리에 모이자 그는 각자의 목록 중 가장 감동이 되었거나, 유익했던 것에 표시하게 했다. 그리고 “최고의 통찰을 5분 만에 찾은 사람이 있다면 손들어 보세요”라고 말했다. 손을 드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10분 후에 찾은 분이 있나요?” 한두 명이 손을 들었다. “15분은요?” 몇몇의 손이 더 올라갔다. “20분은요?” 이번에는 다수가 손을 들었다. “25분은 어떻습니까?” 드디어 대부분이 손을 들고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내둘렀다.
인내심을 가지고 성경 본문을 귀납적으로 공부한 그 경험이 나의 신앙생활을 바꾸어 놓았다. 시간을 들여, 바른 자세로 마음을 열고 말씀을 신뢰하면 하나님께서는 성경 본문을 통해 말씀하신다. 나아가 성경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도록 사람들을 돕는 법을 배우면서 결국 내 직업의 방향까지 정해졌다. 그리하여 사람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설교한 지 어언 40년이 되었다. 내 모든 강연과 강의와 설교의 기초는 늘 대학 시절에 배운 대로 성경 본문 앞에 앉아 신중하게 깊이를 파헤치는 데 있다.

지금도 나는 성경 전체의 권위를 받아들이며, 그 전부를 배우고 가르치는 일이 즐겁다. 그런데 성경의 영적 권위가 처음으로 나 자신에게 묵직하게 와닿은 것은 복음서를 통해서였다. 특히 예수께서 각 사람 – 회의론자 제자 나다나엘, 혼인 잔치에서 당황한 그분의 어머니, 밤중에 찾아온 종교 박사, 우물가의 여인, 사별을 겪은 두 자매 마리아와 마르다 등 다수 – 과 나누신 대화를 통해서였다. 나도 예수님을 만나며 빚어졌는데, 그 만남 중 다수는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과 사람들의 만남을 공부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나는 몇 년 전에 《팀 켈러, 하나님을 말하다》(The Reason for God)라는 책을 썼다. 뉴욕 시에서 오랜 세월 목회하면서 만난 회의론자들의 논지를 늘 고맙게 여긴다. 기독교의 독특성을 밝히고 규명하는 데 그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의 질문을 교만한 자세로 일축하는 기독교인들이 꽤나 거슬린다. 그 누구보다 회의적이었던 대학 시절 성경공부 모임 때의 내 모습이 떠오르기도 하고, 나의 질문을 진지하게 받아주었던 소그룹원들에게 큰 고마움을 갖는다. 내 경험에 의하면 시간과 노력을 쏟아 어려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면, 신앙이 깊어질 수 있다. 심지어 기독교에 회의적이었던 사람들은 기쁨을 얻고 닫혔던 마음을 열 가능성도 크다.
이런 이유로 나는 2012년 영국 옥스퍼드 타운 홀에서 학생들 – 회의론자가 대부분이었다 – 에게 5일 밤에 걸쳐 강연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매우 기뻤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과 각 사람의 만남을 살펴보기로 했다. 나는 이 주제가 그 모임에 잘 맞는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과거에 내가 직접 경험했듯이 본문에는 예수님의 핵심 가르침과 성품이 아주 설득력 있게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강연을 준비하면서 이런 만남이 적절한 이유가 또 하나 떠올랐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만나실 때 인류 보편의 커다란 의문인 ‘삶의 의미’를 다루신 적이 많다. 세상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며 어떻게 잘못되었는가?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며 우리는 해결을 위해 어떻게 동참할 수 있는가? 이런 의문의 답을 애초에 어디서 찾을 것인가? 이는 모든 사람이 가져야 하는 중요한 질문이며, 정직한 회의론자들이 특히 예리하게 탐색하는 의문이기도 하다.
이런 의문의 답은 가설로나마 누구에게나 있게 마련이다. 답을 찾지 못하고 삶을 살려고 한다면 머지않아 걷잡을 수 없이 허무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답이 필요 없다고 주장한다. 삶이란 광활한 우주 속의 무의미한 소일거리일 뿐임을 인정하고 그대로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살아 있는 동안 최대한 즐기라. 죽고 나면 이런 문제로 걱정할 일도 없다. 그러니 굳이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고생할 까닭이 무엇인가?” 기독교인이 아니었던 프랑스 철학자 뤽 페리(Luc Ferry)는 《사는 법을 배우다》(A Brief History of Thought)라는 책에서 그런 말은 “너무 잔인하여 진심일 수 없다”라고 썼다. 그렇게 말하는 본인들도 마음 깊이 정말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는 뜻이다. 사람은 아무런 희망이나 의미 없이 삶을 살 수 없다. 인생을 바칠 만한 가치 있는 일이 있다는 확신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뤽 페리의 표현으로 “잘 살려면, 자유롭게 능히 기뻐하고 베풀고 사랑하며 살려면….” 이런 커다란 질문에 답이 있어야만 함을 안다.
이어 페리가 역설했듯이 이런 중요한 철학적 문제의 가능한 답은 거의 5-6가지 주요 사상 체계에서 비롯되었으며, 오늘날 가장 보편화된 답 중 대부분은 특히 그중 하나의 체계에서 왔다. 예컨대 당신은 일반적으로 원수를 죽이기보다 선대하며 손을 내미는 게 좋다고 보는가? 페리의 말처럼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는 개념은 기독교에서 왔을 뿐 다른 어디에도 없다. 차차 살펴보겠지만 오직 기독교만의 산물로서 세간에 정당하거나 고결하거나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개념은 그 밖에도 많이 있다.
따라서 근본 질문들의 답을 탄탄하고 사려 깊게 제시하려면 기독교의 가르침을 조금이라도 숙지할 필요가 있다. 그러려면 예수께서 사람들을 만나실 때 자신에 대해, 만남의 목적에 대해 설명하셨고 그분의 답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삶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보는 게 가장 좋다. 그것이 옥스퍼드 강연의 전제였고 그 강연이 이 책 1-5장의 기초이다.
그런데 책을 거기서 끝낼 수는 없었다. 예수님을 직접 대면해서 삶이 변화된 기사들을 공부하고, 그분의 아름다운 성품과 목적을 보고, 중요한 질문에 대한 그분의 답을 들은 뒤로도 아직 당신에게 질문이 하나 더 남아 있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나는 어떻게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가? 나도 그 목격자들처럼 변화될 수 있는가?

기독교의 복음이 말하는 구원 – 영원한 변화 – 은 우리의 행위나 심지어 예수께서 사람들을 만나실 때 해 주신 말씀에서 나는 것이 아니다. 복음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이루신 일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삶을 변화시키는 예수님의 은혜와 능력을 가장 잘 접하려면 그분이 생애의 주요 사건들 – 출생, 광야와 겟세마네 동산에서 겪으신 고난, 제자들과 함께 보내신 마지막 몇 시간, 십자가의 죽음, 부활과 승천 – 을 통해 이루신 일을 보아야 한다. 바로 그런 행동을 통해 예수님은 우리의 힘으로는 절대로 이루지 못할 구원을 이루셨다. 그것을 깨달으면 예수님을 스승이나 역사적 인물로만 알던 당신도 그분을 구속자와 구주로 고백하고 삶이 변화될 수 있다.
그래서 책의 후반부에서는 예수님의 생애에서 몇 가지 핵심 사건을 살펴볼 것이다. 6-10장의 기초는 내가 몇 년간 뉴욕 시의 하버드클럽이라는 정기 조찬 모임에서 기업과 정부와 문화계의 지도자들을 상대로 했던 강연을 엮은 것이다. 옥스퍼드 강연과 마찬가지로 참석자의 다수는 교육 수준이 높고 성공한 이들이었으며, 고맙게도 각자가 가진 회의와 의문을 내게 털어놓아 주었다. 양쪽 모두의 강연에서 나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으레 그랬듯이 복음서의 이 본문들로 다시 돌아갔다. 내가 성경의 “살아 있고 활력이 있”는 특성을 처음 느꼈던 본문들이다(히 4:12). 과거 수련회 강사가 가르쳐 주었듯이 매번 말씀 속에서 더 많은 것이 내 눈에 띄었고, 그때마다 내가 배운 내용을 나누고 싶은 열정도 더해 갔다.
이 책을 쓰고 싶었던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사랑하는 손녀 루시는 생후 18개월이었을 때 분명히 많은 것을 지각하지만, 표현은 훨씬 그에 못 미쳤다. 아이는 무언가를 가리키거나 손에 들고는 나를 쳐다보며 아주 답답해 하곤 했다. 무엇인가 말하고 싶은데 너무 어려서 소통할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도 루시와 같은 그런 답답함을 느낄 때가 평생 많이 있다. 만약 당신이 무언가 심오한 경험을 하고 나중에 산 정상에서 내려오거나 콘서트홀이나 아무튼 어딘가에서 나와서는,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려 하면 말로는 근처에도 가지 못한다.

기독교인도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을 표현하고 싶을 때면 의당 누구나 그런 심정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시고 어떤 일을 하셨는지 그 순전한 아름다움을 사람들이 보도록 도와주는 게 교사이자 설교자로서 나의 본분이요 가장 간절한 소원이다. 그런데 내 말주변이 부족해서 그 아름다움을 다 전달하지 못하니 늘 답답하고 안타깝다. 어쩌면 본래 말이라는 것 자체가 역부족인지도 모른다. 다행히 이 어려운 숙제 앞에서 세상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되는 게 있으니 바로 예수께서 사람들을 만나신 복음서의 기사다. 이런 기사를 접하는 것이 이번이 처음이든 1백 번째든, 당신도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분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에 다시금 감격하기를 바란다.
– 프롤로그 중에서

예수를 찾아온 회의론자
이 만남은 요한복음의 서문 직후에 벌어진다. 프랑스 철학자 뤽 페리(Luc Ferry)는 이 서문을 사상사의 한 전환점으로 꼽았다. 헬라인들은 우주에는 합리적 도덕 질서가 있다고 믿고 그 ‘자연 질서’를 로고스(Logos)라고 칭했다. 헬라인에게 삶의 의미는 곧 세상을 관찰하여 그 질서를 파악하는 데 있었다. 그들은 거기에 순응하여 잘 사는 것에서 삶의 의미를 찾았다. 복음서의 저자 요한은 의도적으로 헬라 철학 용어인 로고스를 차용하여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태초에 말씀(로고스)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요 1:1-3, 14).
이 본문은 고대 철학 세계에 내리친 벼락과 같았다. 많은 현대 철학자와는 달리 요한은 헬라 철학자들처럼 삶 자체에 목적(텔로스, telos)이 있음을 인정했다. 모든 인간은 특별한 목적을 위해 창조되었으며 자유롭게 잘 살기 위한다면 그것을 인식하고 존중해야만 한다. 요한이 선언했듯이 세상은 그저 임의의 맹목적인 힘의 산물이 아니며, 역사도 ‘음향과 분노로 가득 찬 어느 어리석은 사람의 무의미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런데 곧이어 성경은 삶의 의미가 어떤 원리나 추상적 합리 체계가 아니라 한 인격체(person)라고 주장한다. 이때 인격체는 이 땅을 사셨던 한 인간을 가르킨다. 페리의 말처럼 이 주장은 당시의 철학자들에게 ‘미친 짓’으로 보였다. 그런데 그것에서부터 혁명이 태동했다. 기독교가 진리라면 잘 사는 삶이란 주로 철학적 명상과 지적 추구에 있지 않다. 기독교가 기준이라면 세상 사람의 대부분이 참된 삶의 의미를 모르고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그 삶은 우리가 만나서 관계를 맺는 한 인격체의 손에 달려 있다. 이것은 출신 배경을 불문하고 누구에게나 어디서든 동일하게 적용된다.
(중략)

우선 나다나엘의 문제에 주목해 보자. 그는 똑똑한 척하는 사람이었고 조금 편협하기도 했다. 빌립이 그에게 와서 “네가 만나 볼 새 랍비가 계신다. 그분에게 우리 시대의 중대한 의문들에 대한 답이 있다. 그분은 나사렛 출신이다”라고 말하자 나다나엘은 “설마 나사렛에서!”라고 비웃었다. 당시 예루살렘 출신은 모두 다 갈릴리 출신을 우습게 보았다. 이런 태도는 인류의 본성이다. 어떤 동네는 늘 다른 동네를 ‘후진 동네’라고 멸시한다. 그러면 멸시당한 사람은 어떻게 반응할까? 자신도 멸시할 다른 대상을 물색한다. 이러한 일들은 끝없이 반복된다. 심지어 나다나엘은 예루살렘 출신이 아니라 갈릴리 출신이었다. 그런 그도 나사렛 같은 곳은 함부로 여겨도 된다고 여겼다. 나사렛은 갈릴리 중에서도 더 낙후된 시골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옳고 똑똑한 적임자 부류가 늘 있고 나머지는 다 (목소리를 낮추어) ‘기타 등등’이었다. 옳고 똑똑한 적임자 부류에게 당신도 그들 편이라고 신호를 보내려면, 기타 등등의 사람이나 지역이 언급될 때 조롱의 눈빛을 보내면 된다.

우리는 타인의 눈에 유능하고 똑똑해 보이기를 원한다. 그런데 그 정체감을 정중하고 탄탄한 논증이 아닌 조롱과 멸시를 통해 얻으려고 할 때가 많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단순한 실수조차도 낙오와 퇴보와 무식으로 둔갑시킨다. 나다나엘은 나사렛 같은 곳의 출신자에게 우리 시대의 중대한 의문들에 대한 답이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 사람에게 답이 있다고? 나사렛 출신인데? 그럴 리가 없지.” 그는 멸시의 눈빛을 보냈다. “진짜 그곳 출신이야? 정말?”
당신이나 당신의 지인이 기독교에 대해 ‘나사렛’과 같이 본다고 해도 놀랄 일이 아니다. 오늘날 기독교를 나다나엘이 나사렛을 보듯 하는 사람이 많다. 기독교는 사람들에게 ‘나사렛’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기독교를 조롱하기 좋아한다.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며 자기들을 위해 어떤 일을 하셨고 또 하실 수 있는지에 대한 기독교의 주장에도 마찬가지의 태도를 취한다. 기독교에 대해 좀 안다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기독교라면 나도 다 알아. 그 속에서 자랐어. 나한테는 맞지 않음을 진즉 깨달았지. 내 마음은 이미 정해졌어”라고 말한다. 이렇듯 과거에도, 현재에도 예수님은 여전히 나사렛 출신에 불과하다.
– 28-29, 31-33쪽 중에서

프롤로그

1부. 예수와의 조우, 인생의 답을 얻다
1. 회의론자: 나다나엘
“기독교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는가”

2. 인사이더와 아웃사이더: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인
“기득층과 소외층이 있는 현 세상, 뭔가 잘못된 거 아닌가”

3. 슬퍼하는 자매들: 마르다와 마리아
“신이신 예수가 인간의 슬픔을 알겠는가”

4. 혼인잔치: 예수의 어머니
“답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예수가 진짜 답인가”

5. 최초의 그리스도인: 막달라 마리아
“정말 부활이 가능한가”

2부. 영원한 삶을 위해 당신의 구주 예수를 만나라
6. 궁극의 적: 사탄과 맞서심
“요즘 세상에 사탄의 존재는 너무 터무니없지 않는가”

7. 두 분의 대언자: 성령을 보내심
“교양 있고 괜찮은 사람인 나에게 굳이 대언자가 필요한가”

8. 순종하시는 주님: 십자가에 죽으심
“왜 신이 죽어야만 했는가”

9. 아버지의 오른편: 승천의 의미
“승천하지 말고 우리 곁에 계속 계시면 안 되었는가”

10. 마리아의 용기: 미리 만나지 못해도 순종함
“그리스도인이 되는 데 따르는 대가가 필요한가”

감사의 말

팀 켈러는 성경 본문의 예수님과 각 사람들의 대화에서 금광을 캐냈다. 그리스도인이든 비그리스도인이든 누구나 이를 통해 사고가 넓어지고 마음이 뜨거워질 수밖에 없다. 성경을 이미 수없이 읽어 본 사람이라도 마찬가지다.
– Graceforsinners.com

이 책은 성경을 진지하게 공부하는 이들의 책장에 반드시 꽂아 놓아야 한다. 급하게 읽기 보다는 한 모금씩 천천히 음미하면 좋다. 그래야 삶을 바꾸어 놓는 메시지의 위력을 십분 건질 수 있다.
– Examiner.com

50년 후에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이 도시와 이웃을 사랑하고 자비와 정의에 헌신한 사람들로 널리 알려진다면, 팀 켈러는 새로운 도시 그리스도인의 선구자로 기억될 것이다.
– <크리스채너티투데이>

팀 켈러 목사는 고전 문학, 철학, 인류학 등 다수의 분야에서 자료를 발굴하여 지성적으로 설득력 있게 하나님을 변증한다. 이 책도 저자의 박학다식한 학식을 증언해 줄 뿐 아니라 신앙에 대한 작금의 담론을 설득력 있게 개괄한다. 회의하는 사람에게는 물론 자신이 무엇을, 왜 믿는지 재평가하려는 사람에게 유익하다.
– <퍼블리셔스 위클리>

대다수의 도시 대형 교회들과 달리 리디머교회는 놀랍도록 전통적이다. 전통적이지 않은 점이라면 자신의 청중인 도시인들의 언어로 말하는 켈러 목사의 솜씨다. 그의 호소는 이해하기 쉽다.
– <뉴욕 타임스>

팀 켈러 목사는 맨해튼의 명물이다. 당신의 단골 식당처럼 그도 도시의 공공연한 비밀 중 하나다. 그를 따를 이들이 워낙 열성적인데다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교회를 홍보할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 <뉴스위크>

팀 켈러는 뉴욕 시의 가장 성공적인 기독교 전도자다. 지성적 설교로 주일마다 수많은 젊은이들을 교회로 이끈다. 교회 지도자들은 그를 도시 복음화의 모델로 삼고 있다. 그의 도움으로 뉴욕에만 50여 개의 복음적인 교회가 개척되었고 샌프란시스코에서 런던까지 다른 도시에도 50여 개가 더 세워졌다.
– <뉴욕>

하나님을 확고히 믿어도 되는 설득력 있는 논거를 문학과 철학과 대중문화를 활용하여 제시한다. 팀 켈러는 다른 책들처럼 세속적 측면을 지나치게 비판하지 않으면서 종교적 관점을 제시하려 노력하는 점이 참신하다.
– <라이브러리 저널>

팀 켈러

맨해튼을 비롯해, 미국 뉴욕 세 군데 지역에서 약 6천 명의 성도들이 예배드리는 리디머교회(Redeemer Presbyterian Church)의 설립 목사. 팀 켈러의 설교는 철저히 예수 복음 중심이며, 따뜻하면서도 예리한 지성으로 이 시대를 통찰력 있게 읽어 준다. 그래서 신실한 그리스도인뿐 아니라, 구도자와 회의론자들에게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또한 팀 켈러는 한 시대의 문화와 사상이 만들어지고 집약되는 ‘도시 지역’ 선교에 헌신했다. 실제로 지금까지 전 세계 100개 이상 도시에 430개 교회의 개척을 도왔다. 한편 〈뉴스위크〉에서 “21세기의 C. S. 루이스”라는 찬사를 받을 만큼 변증가로서도 영향력 있는 행보를 보인다.
펜실베이니아주에서 태어나 자랐고, 버크넬대학교(Bucknell University), 고든콘웰신학교(Gordon-Conwell Theological Seminary), 웨스트민스터신학교(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에서 수학했다. 대학 시절 IVF 활동을 통해 복음을 받아들였고, 신학교를 갓 졸업한 스물네 살의 나이에 버지니아 웨스트호프웰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1984년부터는 5년간 모교인 웨스트민스터신학교 강단에서 설교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저서로는 《팀 켈러, 하나님을 말하다》(두란노)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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