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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 이후 장기 스테디셀러이 책은 헨리 나우웬의 대표적 저서 25권과 미간행 원고들에서 뽑은 기도에 관한 글을 주제별로 엮은 책이다. 기도에의 ‘갈망’에서 시작해 ‘기도란 무엇인가’, ‘고독’, ‘성령’, ‘경청’, ‘훈련’, ‘용서’ 등 기도에 관해 많은 사람들이 고민하고 목말라 하는 주제들을 나우웬 특유의 깊고 내밀한 고백으로 담고 있다. ?탕자의 귀향」?영적 발돋움」과 더불어 오랫동안 끊임없이 사랑받는 나우웬의 대표작으로 자리 잡고 있는 이 책은, 원서 출간 10주년, 국내 출간 8주년을 맞아 본문을 다듬고 새롭게 편집한 재조판이다.
사랑하는 하나님,
제 움켜쥔 주먹을 펴기가 너무 두렵습니다!
더 이상 붙들 것이 없을 때 저는 누구일까요?
빈손으로 주님 앞에 설 때 저는 누구일까요?
서서히 손을 펴 깨닫게 도와주소서.
제가 소유하고 있는 것이 제가 아니라
주님이 제게 주시려는 것이 곧 저임을.
주님이 제게 주시려는 것은 사랑입니다.
무조건적이고 영원한 사랑입니다.
아멘.
기나긴 노정에 나우웬과 그의 지팡이가 있음은 복된 일이다.
헨리는 고독 속에서 자신과 대화하기 원하시는 하나님께 시간과 공간을 내드리려 평생 자기 몫의 씨름을 그치지 않았다. 그 씨름이 그가 남긴 거의 모든 책에 잘 나타나 있다. 어머니의 무릎에서 시작해 학교와 신학교, 여행과 교육과 강의를 통해 기도를 배운 그는, 기도야말로 자신에게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라는 의식을 늘 잃지 않았다. 기도에 관한 그의 글들은 머리에서 온 것이 아니라 체험에서 온 것이다. 그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갈망했고 때로 그 ‘임재’를 느꼈으며 어둠 속에서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도전에 부딪칠 때도 많았다. 기도는 그의 신앙 여정에 성장의 싹이었다. 기도를 통해 그는 당당히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로 살아가는 체험으로 멀리, 넓게, 깊이 들어갔다. 하나님과의 이런 내적 연합은 그에게 역동과 도전과 위안이 되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그 연합은 사랑의 세계에 대해 그의 내면에 늘 새로운 체험과 통찰을 열어 주었다.
|특징|
– 나우웬의 대표적 저서 25권과 미간행 원고들에서 엄선했다
– 기도에 관해 고민하는 핵심적인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 나우웬의 기도문 수록
|독자 대상|
– 보다 깊고 풍성한 기도의 삶을 경험하고 싶은 그리스도인
– 공동체에서 기도의 훈련을 하고 있는 그리스도인, 이를 돕는 사역자, 상담자
|책 속으로|
기도하고 싶은 갈망
기도란 하면 할수록-기도의 삶을 산다는 의미에서-더 하고 싶은 갈망이 생긴다. 기도의 삶을 살면 하나님과 단둘이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은 갈망이 점점 커진다. 언제나 사람들의 생각과 정반대다. “내 삶이 곧 기도니까 굳이 따로 기도할 필요가 없다”가 아니다. 반대로 하나님과 단둘이 시간을 보내며 기도하고 싶은 갈망은 늘 더 커지는 법이다. 기도할수록 우리 속에는 주님과만 단둘이 있고 싶은 갈망이 싹튼다. 우리는 그분이 인파와 사건들 속에서도 여전히 빛을 발하시는 모습을 보아 왔다. 이제 기도는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선물 중 하나가 된다. 하루의 일상 속에서 발견하는 하나님, 그분과만 단둘이 있고 싶은 마음은 위대한 갈망인 까닭이다. 마치 하루종일 친구들과 함께 일하고도 저녁때 다시 그들과만 있는 것이 좋은 것과 같다. 그 특별한 사람들과 더 함께 있고 싶은 것이다. (29쪽)
[본문 75~79쪽 중에서…]
질투하시는 사랑
하나님께 돌아간다는 것은 내 모든 존재와 소유로 하나님께 돌아간다는 뜻이다. 내 존재의 절반만으로는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없다. 오늘 아침 탕자의 이야기를 다시 묵상하며 아버지의 품을 체험하려 하다가 퍼뜩 깨달은 것이 있다. 내 안에는 완전한 포옹을 꺼리는 저항이 도사리고 있다. 포옹을 원하는 마음도 있지만 한편으로 내 독립을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있다. 하나님의 사랑이 질투하는 사랑임을 깨닫는다. 하나님은 내 일부만이 아니라 내 전부를 원하신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자신을 온전히 드릴때에만 나는 끝없는 소요에 벗어날 것을 기대할 수 있고, 사랑의 음성을 들을 준비가 된 것이며, 나 자신의 독특한 소명을 인삭할 수 있다.
그것은 머나먼 길이다. 기도할 때마다 나는 그 싸움을 느낀다. 그것은 하나님을 내 전 존재의 하나님 되시게 하는 싸움이다. 진정한 자유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절대적 헌신 속에 숨어있다는 사실을 믿는 싸움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그 싸움에 들어가 참 자유를 얻는 길이다. 그 길은 십자가의 길이며, 참 자유는 죽음을 이기고 얻는 자유이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전적으로 순종하여 십자가에 이르셨다. 그리고 십자가를 통해 더 이상 세상의 경쟁에 종속되지 않는 생명에 이르셨다. 예수님은 아무것도 붙드실 것이 없었다. 가슴 벅찬 종교 체험도 아니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신 예수님의 말에 아버지께 대한 그분의 완전한 복종이 숨어있다. 그분이 매달릴 것은 아무 데도 없었다. 이 철저한 복종 속에서 그분은 온전한 연합과 온전한 자유를 얻어셨다.
예수님은 내게 말씀하신다. “내게 와 나를 따르라…내가 온 것은 네가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10:10).
축복 아래 사는 삶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들의 위대한 영적 소명은 저주의 그늘 속에서 상처를 끄집어내는 축복의 빛 아래 두는 것이다.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를 둘러싼 어둠의 세력은 강하다. 이 세상은 자아를 받아들이는 이들보다 자아를 거부하는 이들을 더 조종하기 쉬운 곳이다. 그러나 우리의 상처는 내가 무가치한 자라는 두려움의 확증이 아니라 내게 머무는 축복을 정화하고 심화할 수 있는 기회이다. 나를 ‘사랑하는 자’라 부르는 음성에 계속 귀기울일때 상처를 그런 기회로 살리는 것이 가능해진다.
축복 아래 살 때의 신체적, 정신적, 정서적 아픔은 저주 아래 살때의 신체적, 정신적, 정서적 아픔과는 극과 극으로 다르게 느껴진다. 자신의 무가치성의 증거로 받아들일 때는 아무리 작은 짐 하나도 우리를 깊은 우울에 빠뜨릴 수 있다. 자살로 몰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축복의 빛 가운데 살 때는 크고 무거운 짐도 가볍고 쉬워진다. 감당 못할 것만 같던 일이
도전으로 변한다. 우울의 구실 같던 일이 정화의 기회로 바뀐다. 형벌 같던 일이 자상한 가지치기로 변한다. 거부 같던 일이 더 깊은 연합에 이르는 길이 된다.
사랑의 집에 들어감
예수님은 복음서에서 아주 강한 어조로 말씀하신다. 복음서 도처에서 우리는 이 말씀을 듣는다. “두려워 말라.” 가브리엘이 사가랴에 한 말이다.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한 말이다. 천사들이 무덤 앞의 여인들에게 한 말이다. “두려워 말라.”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주님께서 하신 말이기도 하다. “두려워 말라. 나다. 두려워 말라. 나다. 두려움은 하나님께로서 온 것이 아니다. 나는 사랑의 하나님이다. 너희를 불러 가난한 자들의 기쁨과 평안과 감사의 선물을 받게 하고 두려움을 떨치게 하는 하나님이다. 이제 너희는 그토록 두려워 떨치지 못하던 것들을 이웃과 함께 나눌 수 있다.”
그리스도의 초청은 두려움의 집에서 나와 사랑의 집으로 들어오라는 초청이다. 그 감옥 같은 곳에서 벗어나 자유의 자리로 오라는 부름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내게 오라. 내 집으로 오라. 내 집은 사랑의 집이다.” 신구약 전체에서 그 초청을 볼 수 있다. “오, 내 영혼이 여호와의 집에 거하기를 얼마나 사모하는가. 주는 나의 피난처, 주는 나의 거할 곳, 주는 나의 장막, 주는 나의 안전이시라.” 제자들이 “주여, 어디에 머물고 계십니까?” 하고 여쭙자 주님은 “와 보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들은 그분과 함께 머물렀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장막을 쳤다. 하나님이 사랑의 집에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기 위함이다. “내가 너희 집,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아버지께 간다. 내 아버지 집에는 너희가 있을 곳이 많다. 내가 너희 안을 내 집으로 삼은 것처럼 너희도 내 안을 너희 집으로 삼아라. 주의 이름 안에 거하라. 그곳이 너희가 거할 곳의 이름이다. 너희는 어디 있느냐? 내 이름 안에 있느냐? 사랑의 집안에 있느냐?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
하나님은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희를 사랑한다” 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그것을 말해주러 우리에게 오셨다. 세례받으실 때 예수님은 이런 음성을 들어셨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예수님은 우리도 이 중요한 말을 듣기 원하신다. 우리는 사랑받는 자이다. 우리가 무슨일을 했거나 자신을 입증했기 때문이 아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와 무관하게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것이 사실인진대 우리가 짧은 세월 이 땅에 보냄받은 것은 삶 속에서 이렇게 응답하게 하기 위함이다. “예, 하나님. 저도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시는 것처럼 우리도 세상에서 하나님을 돌보는 것이 아주 중요한다. 여린 아기로 태어나시는 하나님은 누군가 가르쳐 주지 않으면 걷거나 말할 수 없는 분이다. 그것이 예수님의 이야기이다. 그분이 자라려면 사람들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나는 약해지고 싶다. 네가 나를 사랑할 수 있도록 말이다. 내 사랑에 대한 네 반응을 돕기 위해 내가 약해지는 것보다 더 좋은 길이 있을까? 그래야 네가 나를 돌볼 수 있으니 말이다.” 하나님은 비틀거리는 하나님이 된다. 십자가에서 넘어지고 우리를 위해 죽으시며 철저히 사랑이 필요한 분이 된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것은 우리가 그분께 가까워지게 하기 위함이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약해지시는 하나님, 구유와 십자가에서 남에게 의존해야 하는 하나님, 한마디로 “너 내 곁에 있느냐?” 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응답을 기다리신다. 아주 신비로운 방식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의존하신다. 그분은 말씀하신다. “나는 약해지고 싶다. 네 사랑이 필요하다. 네가 내 사랑을 인정해주었으면 좋겠다.” 우리의 사랑을 원하시고 우리의 긍정적 반응을 바라신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다. 그래서 요한복음 끝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세번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고 물으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반응을 기다리신다. 이생은 그 반응을 보일 무수한 기회의 연속이다.
맺는 말
주
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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